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뗏목 타고 바다를 떠도는 사나이 윤명철 |
망망대해 별빛 아래 누리는 고독한 절대자유 |
일엽편주에 몸을 맡기고 황해를 제 집 안마당처럼 돌아다니는 뗏목탐험가 윤명철 교수. 고대 해양교섭사 연구를 위해 현장답사를 한 것이 뗏목 여로의 시작이었다. 이제 뗏목탐험은 그에게 답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바다 한가운데서 화두를 참구하는 실존의 공간이자 대자연과 자신이 하나임을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뗏목이기에. |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이 있다. 산전(山戰)은 산에서 벌어지는 전투이고 수전(水戰)은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일컫는다. 필자는 그동안 산전에만 주목해왔다. 산전은 등산을 의미했다. 전국의 수백 개 명산을 오르내리면서 깨달은 이치는 ‘독서불여등산(讀書不如登山)’이다. 말 그대로 ‘독서가 등산만 못하다’는 뜻이다. 등산은 독서가 주지 못하는 하체근육과 건강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전(水戰)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국내외에서 수전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윤명철(尹明喆·51) 동국대 사학과 겸임교수를 만나 수전에 관한 철학을 들어보기로 했다. 좀더 공식적으로 표현하면 윤 교수는 세계적인 뗏목탐험가다. 그가 뗏목을 타고 돌아다닌 코스는 다음과 같다. 1982년, 거제도에서 출발해 일본 규수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뗏목탐험을 시작했지만 출발한 지 33시간 만에 중단했다. 첫 탐험이 중도에서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다음해에는 성공했다. 거제도에서 출발해 일본의 쓰시마섬을 지나 오시마 열도로 가는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였다. 1996년에는 황해문화 뗏목 학술탐사를 했다. 중국 저장성에서 산둥성 지산까지 가는 코스였다. 1997년에는 중국 저장성 저우산 군도에서 흑산도를 경유하여 인천에 도착했고, 2003년에는 저장성에서 출발해 황해를 건너 인천에 간 다음 다시 제주도를 경유해 일본 규수의 나루시마에 도착했다. “바다와 나, 대자연과 내가 하나” 일엽편주 뗏목에 몸을 맡기고 황해를 제 집 안마당처럼 돌아다닌 윤 교수의 인상은 의외로 양순하다. 목숨을 거는 뗏목탐험에 나선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얼굴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다분히 문학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문사(文士)의 이미지다. 하지만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니 콧대가 똑바로 섰다. 콧대는 결단과 돌격력을 상징한다. 유명한 무인(武人)들은 공통적으로 콧대가 있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의 수행을 겪어낸 고승들도 대개 콧대가 섰다. 콧대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돌진하는 힘을 준다. 따라서 코가 뭉뚝한 사람은 중도통합적인 절충을 선호하기 때문에 결단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콧대를 보고 윤 교수의 본질을 짐작하게 됐다. 그의 본질은 부동(浮動)하는 뗏목이다. ‘윤 뗏목’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게 바다에 떠 있는 뗏목은 어떤 의미인가. “바다 위 뗏목은 실존을 체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에 앉아 있으면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특히 하늘에 별빛만 보이고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 한가운데서 뗏목에 두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으면 우주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은 절대고독에 휩싸인다. 이는 선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 뭐꼬’ 화두를 참구하는 선승과 비슷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다와 하늘, 그 절대공간 사이에 나 혼자 있다 보면 ‘명선일체(命禪一體)’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선방에서 말하는 ‘목숨과 선이 하나로 관통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홀로 떠 있으면 대단한 공포를 느낄 것 같다. 한 발만 내디디면 깜깜한 심연으로 빨려들어간다고 생각할 때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지 않는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번 무섭다고 생각하면 공포가 끊임없이 다가온다. 그러면 뗏목을 탈 수 없다. 밝은 생각을 해야 한다.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시고 나서 한 말이 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이요, 심멸즉종종법멸(心滅卽種種法滅)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그 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이 전혀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안하게 보면 불안하지만 태연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바다처럼 좋은 곳이 없다. 뗏목에는 보통 원두막처럼 조그만 집을 만들어놓는다. 짐을 넣거나 대원들이 취침하기 위한 용도다. 밤에 원두막 지붕 위에 앉아 있으면 별빛만 보인다. 복잡다단한 사회와 완전히 절연된 공간인 것이다. 전화도 없고 TV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다. 그야말로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그렇게 별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진다. 저절로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게 된다. 서울에서 쫓기는 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순간순간 요동치면서 호흡이 아랫배로 내려가지 못한다. 그러나 뗏목 지붕 위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단전호흡을 할 수 있다. 바다의 뗏목 원두막 위야말로 내게는 아주 푹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이다.” (계속) |
바다에서 四柱의 불기운 식히다 -뗏목을 타면서 언제가 가장 즐거운가. “밤에 별을 보면서 상상할 때다. 별빛을 보면 늘 태초의 신화가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인간과 우주가 합일되는 체험은 과연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가끔은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기도 한다. 대양의 끝에서 마지막 붉은 빛을 토하는 석양에다가 사랑하는 여인을 오버랩시키는 순간 한없이 행복하다는 느낌이 든다. 해질 무렵의 노을빛은 기가 막히게 멋지다. 바다에서 보면 시야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없다. 수평선 뒤로 벌건 태양이 넘어가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우주 탄생의 신화에 나오는 장면이 아마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노을빛도 시간대별로 다른데, 처음에는 옅은 붉은색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진홍색으로 변해간다. 바닷물 색깔도 시간대별로 달라진다. 또 뗏목에 앉아 있다 보면 바다와 나, 대자연과 내가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바다와 사람은 갈등관계지만 그 사이에 뗏목이 자리잡으면 양상이 변한다. 양자가 화합한다. 상극관계가 상생관계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이치가 참 묘하다고 느꼈다. 정처 없이 바다에 떠다니다 보면 라면봉지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데 라면봉지를 건져내 보면 거기에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 생명력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생명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이렇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탐험을 굳이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험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깨뜨리는 행위다. 한계상황을 깨뜨리면 통쾌한 자유가 밀려든다. 인간 역사는 자유로의 확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탐험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가 확장된다고 믿는다. 또 탐험은 대자연과 합일을 이루는 행위다. 현대인은 문명에 갇혀버렸다. 루카치는 그의 명저인 ‘미학’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막의 대상들이 밤에 별을 보고 가던 때가 행복했다’고. 사막에선 자연과 인간 사이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다. 자연과 내가 직접 교감한다. 동양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데서 오는 쾌감 아니겠는가. 탐험은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행위다. 극한 상황에서야 비로소 대자연의 실체에 직면할 수 있다. 직면은 목숨을 거는 순간에 이뤄진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벌거벗고 마주친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러면 인간은 진실해진다. 진실해질 때 자연과의 합일이 이뤄지지 않나 싶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추구한다. ‘빵 가운데 가장 맛있는 빵은 안전빵’이라는 농담도 있지 않던가. 우리가 돈 벌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안전한 인생을 보장받고 싶어서다. 안전이란 무엇인가. 목숨이다. 인간은 목숨을 지키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인간은 자진해서 목숨을 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안전에 금가는 행동을 자처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필자는 윤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내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자유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납득하기 쉽지 않았다. 뒤집어보면 뗏목탐험은 그 무엇보다도 자유를 구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뗏목 위에 무슨 자유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자유를 이야기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 하부구조에는 엄청난 위험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공포와 자유. 이것도 동전의 양면관계에 속한단 말인가. 공포스러운 만큼 거기에 비례해서 자유를 느끼는 쾌감도 큰 것이 세상 이치란 말인가. 하지만 40대 중반에 들어선 후로 필자는 부쩍 ‘인생 별것 아니다’는 생각을 한다. 성인이 된 후 보낸 20여년을 생각하니 순식간이었다. 앞으로의 20년도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 뻔하다. 이렇게 지내다가 삶을 등지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밀려온다. 임종의 순간에 너무도 후회할 것 같다. 그럴 바에야 모험을 한번 시도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윤 교수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그는 도대체 어떤 팔자길래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인가. 나는 분석의 한계를 느낄 때 상대방의 생년월일시를 묻는 습관이 있다. 사판(事判·합리적 판단)으로 풀리지 않는 대목이 이판(理判·신비적 판단)으로 해석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54년 음력 4월7일 사시(巳時)에 태어났다고 한다. 만세력을 꺼내 찾아보니 갑오(甲午)년, 기사(己巳)월, 을축(乙丑)일, 신사(辛巳)시가 나온다. 지지(地支)에 불이 많은 사주다. 음력으로 4월이면 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거기에다가 태어난 해가 말띠 해인데, 이는 불을 의미한다. 태어난 시간도 사시다. 사시도 불에 해당한다. 누워 있는 방바닥 구들장이 뜨끈뜨끈 데워지는 형국이다. 이렇게 불이 많은 것은 예술가 사주에 가깝다. 조직에 길들여지지 않는 팔자인 것. 예술가는 자기 생각을 숨기지 못하고 밖으로 발산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다. 불이 많아서 그 발산하는 힘이 대단하다. 그 힘이 그를 탐험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필이면 왜 바다를 택했는가. 방바닥이 뜨거우니 물로 식혀야 할 것 아닌가. 불을 식히려면 물이 최고다. 바다의 뗏목에서 타고난 사주의 불기운을 식히는 형국이다. 이런 사주가 쉬는 날 방바닥에 누워 TV를 보기는 어렵다. 뛰쳐나갈 수밖에 없다. (계속) |
망망대해 별빛 아래 누리는 고독한 절대자유 |
물론 윤 교수가 뗏목탐험을 시작하게 된 건 사주 때문이 아니다.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됐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고구려 해양교섭사 연구’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해상교섭사를 연구하면서 해상루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고대의 고속도로는 육상도로가 아니라 바닷길이다. 이 바닷길이 어땠는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해양교섭사 분야는 문헌 자료가 별로 없다.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는 방법은 실전에 뛰어드는 것, 즉 현장답사였다. 느리되 뒤집히지 않는 뗏목 현장답사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살을 섞는 과정이다. 살을 섞지 않고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또 현장답사란 신원(身元)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동안 잊혀졌던 본래 면목을 회복한다는 의미다. 고대 해양사를 밝혀낼 루트를 어떻게 현장답사할 수 있는가. 오랜 고민 끝에 얻은 해답은 뗏목이었다. ‘뗏목 타고 한번 가보자’는 결심으로 시작된 여로가 그의 뗏목탐험이다. 그는 뗏목탐험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동아시아의 해상루트를 밝혀냈다. 전인미답의 ‘동아시아 해양사’라는 분야를 그가 새롭게 개척한 것이다. 윤 박사가 제시한 학설이 ‘동아시아 지중해’ 설이다. 황해, 남중국해 일대가 고대 동아시아의 지중해 역할을 했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 중국 일본 등 고대국가들이 활발한 교역을 펼쳤다는 주장이다. 동아시아 지중해 이론은 21세기에 새롭게 적용할 연대의 틀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뗏목을 만드는 재료는 무엇인가. 뗏목 만드는 공정, 구조, 그리고 항해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뗏목 재료는 주로 통나무와 대나무다. 통나무라 하면 삼나무가 가장 좋다. 물론 소나무, 참나무, 느릅나무를 쓸 수도 있지만 삼나무가 가벼워서 좋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무거운 편이다. 그러나 최고의 뗏목 재료는 역시 대나무다. 가볍고 부력(浮力)이 좋다. 내가 타고 다닌 뗏목은 거의 대나무로 만든 것이다. 뗏목의 크기는 앞폭 3m, 뒤폭 4.5m 정도다. 앞폭이 좁고 뒤폭이 넓은 형태다. 그래야 전진하기에 유리하다. 또 뗏목은 뒷부분이 무거워야 한다. 뒤가 무겁다는 것은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후륜구동 시스템이다. 앞은 가볍고 뒤는 무거운 쪽을 배치한다. 뗏목의 길이는 11m 정도다. 지난해 3월 중국에서 시작해 인천을 거쳐 일본에 도착한 뗏목 ‘장보고호(號)’는 길이가 11m다. 마스트(돛대)는 통상 2개를 만든다. 마스트의 재질도 대나무다. 속도는 보통 1노트(시속 1.8km)인데 태풍이 불면 5노트 정도로 빨라진다. 태풍이 불어도 뗏목은 뒤집히지 않는다. 물에 잠기는 일도 없다. 이 점이 뗏목이 지닌 최대 장점이다. 빨리 나아가지는 못해도 절대로 전복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자연과의 합일에서 오는 미덕이자, 느림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뗏목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나라 해안지방 어민들의 운송수단이었다.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 전 해안가에 뗏목이 있었다. 지금은 제주도에만 남아 있지만. 뗏목을 타면 원시성이 느껴진다. 구조가 소박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문명적인 장치가 없다. 뗏목탐험을 할 때 적정인원은 4명이다. 너무 많이 타면 좁은 공간에 복작거릴 뿐 아니라, 식량과 식수를 많이 실어야 하므로 뗏목에 부담이 간다. 4명 정도면 각기 역할을 맡아야 한다. 선장, 항해사, 식량(주방)담당, 갑판장이다. 흔히 망망대해에서 식량조달 방법으로 낚시를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낚시하기가 쉽지 않다. 폭풍이 심할 때 방어가 갑판에 뛰어오른 적도 있지만 이는 횡재한 경우에 속한다. 물과 식량은 보통 한 달치를 싣는다. 항해 일정이 15일 예정이라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넉넉하게 실어야 한다. 주식은 쌀과 라면이다. 주식 외에 행동식이라는 게 있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태풍이 몰아칠 때는 잠시도 앉아 있을 새가 없다. 이럴 때는 몸을 움직이면서 먹을 수 있는 식량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행동식이다. 빵, 육포, 미숫가루 같은 것이다. 또 초콜릿, 사탕, 껌 같은 비상식도 싣는다.” -뗏목을 타면서 가장 위험한 상황은 언제인가. “해안에 접안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뗏목은 조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해안가 여기저기에 암초가 널려 있는 상황에서 파도가 밀려오면 뗏목은 저항할 수가 없다. 암초에 걸리면 꼼짝도 못한다. 이때 다시 파도가 몰아치면 대단히 위험하다. 물결은 대개 절벽을 향해 몰아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뗏목이 부서지거나 뒤집힌다. 그래서 해안가나 또는 암초 지대를 지날 때는 긴장해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다. 날씨가 좋지 않아 파도가 몰아치는 날 해안가에 뗏목을 접안시키는 일은 목숨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번은 해안가에 접안하는데 12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다. (계속) |
몇 해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울릉도 근해를 거쳐 일본 오키 제도에 도착할 예정이던 뗏목 ‘발해 1300호’가 조난당한 적이 있다. 발해 건국 1300주년을 기념한 항해였는데, ‘발해 1300호’에 탔던 대원 모두가 죽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추측하건대 아마 ‘발해 1300호’는 일본 오키 제도 해안에 접안하려다가 전복되지 않았나 싶다. 접안은 그만큼 위험하다. 고도의 기술과 경험 그리고 운이 따라야 한다.
다음으로 위험한 상황은 태풍이다. 뗏목탐험을 감행하는 시기는 주로 늦은 봄에서 여름철이다. 이때는 태풍이 부는 시기이다. 한번 항해를 나가면 보통 2~3번 태풍을 만난다. 파도가 높을 때는 7m까지 올라간다. ‘집채만한 파도’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태풍이 불 때 파도는 거대한 산맥이다. 집채가 아니라 산맥이 통째로 몰아닥치는 것이다. 처음 태풍을 겪는 사람은 파도의 높이와 강한 비바람에 기가 질린다. 그리고 파도가 허옇게 춤을 출 때 엄청난 공포에 휩싸인다. ‘이제 죽었구나! 여기서 수장되는구나! 고기밥이 되는구나! 내가 왜 뗏목을 탔던가!’ 하는 후회와 함께 가족의 얼굴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다시는 뗏목을 타지 않으리라 결심하기도 한다.
태풍이 불 때 가장 위험한 상황은 뗏목이 파도에 밀려 기우뚱거리면서 옆으로 쏠릴 때다. 뗏목이 쏠리면 강한 바람에 사람이 바다로 떨어지기 쉽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태풍이 불면 굵은 밧줄로 사람을 뗏목에 묶어놓는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태풍 불 때 대변보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뗏목에서 엉덩이를 까고 대변을 본다고 상상해보라. 밧줄에 몸이 묶인 채 다른 밧줄을 손으로 잡고 대변을 봐야 한다. 뗏목 뒤에는 대변보조용 밧줄이 하나 설치돼 있다. 바람이 없을 때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보조 밧줄을 달아야 한다. 경험의 산물이다. 항로 이탈에 대비해서는 1997년부터 GPS(위성항법장치·Global Positioning System)를 이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파라디오, 아마추어 햄, 측량장비, 풍향계, 풍속계, 나침반, 콤파스, 해도(海圖)를 휴대한다.”
-바다에서 길을 찾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길 찾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스스로 체험하며 찾아내는 것과 남에게 들은 정보를 따르는 방법이다. 바다에는 물씨가 있는데 그 씨앗은 자기만의 색깔을 띤다. 나뭇잎, 꽃잎, 햇살, 달빛만 색이 있는 게 아니다. 물에는 물색이 있다. 지구상의 모든 바다는 하나로 이어져 있지만 물색은 곳곳이 다 다르다. 넓으면 넓은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진하든 엷든 차이가 있다. 그 물색을 보면서 위치를 알아내고 방향을 찾아가는 방법이 있다. 동아시아 바다는 흑조(黑潮)라 부르는데, 물색이 검은 빛을 띠기 때문이다. 환한 하늘색을 띤 지중해, 또는 밝은 하늘빛이지만 왠지 우수가 서린 듯하고 멜랑콜리한 느낌이 드는 동남아 바다와 달리 동아시아 바다는 힘이 있고 물빛에서 가시가 느껴진다.
물색 보며, 바람내 맡으며
물론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해역에 따라 색이 조금씩 달라진다. 중국과 가까운 바다는 황하에서 흘러나온 흙물이 섞여 약간 황색이다. 하지만 조금만 멀리 나오면 진한 파란색을 띠는데 여기가 정말 황해인지 의심될 정도다. 더 멀리 나가면 흑색을 띤다.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옛 항해자들은 물색을 보며 항해했다고 한다.
또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고 방향을 결정하기도 하고 천문항법(天文航法)을 이용하기도 한다. 천문항법은 해와 달을 보고 방향과 시각을 추정하는 것이다. 구름의 모양과 움직임도 길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가장 확실한 이정표는 밤하늘의 별들이다. 멀리서나마 육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면 지문항법(地文航法)을 사용한다. 제주도 한라산은 우뚝 솟아서 먼 바다에서도 훌륭한 이정표 노릇을 한다. 여기에 바람의 속도와 방향, 해류의 속도와 방향, 조류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뱃머리의 방향을 잡는다.
두 개의 돛도 중요하다. 우선 주(主) 돛의 방향을 결정한 뒤 줄을 조정해서 어떤 방향으로 힘을 받게 할 것인가를 정한다. 때로는 바람의 세기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다음 보조 돛인 앞쪽 돛의 방향과 세기 등을 정한다.
하지만 요즘은 앞에서도 말했듯 GPS를 이용한다. GPS 덕분에 최소한 자기 위치를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감, 초조감, 고립감은 사라졌다. 1983년 항해할 때는 2000원짜리 전자 손목시계를 차고 그 엄청난 파도 속에서 뗏목 지붕에 올라서서 멀리 등댓불이 깜박거리는 횟수를 세면서 어느 등대인지 체크했다. 그러던 것이 1996년 이후론 GPS를 사용해 위치를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계속)
망망대해 별빛 아래 누리는 고독한 절대자유 |
정해진 길로만 흐르는 해류 -뗏목 하나 만드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나. “대략 4000만~5000만원 든다. 뗏목은 출발하는 현지에서 만든다. 그동안 출발지가 중국이어서 주로 중국에서 뗏목을 만들었다. 탐험대원들은 뗏목 만드는 과정을 감독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을 뗏목으로 이동할 때는 양국 정부의 승인이 필요 없다. 중국에서 출발해 아무런 승인 없이도 한국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본을 오갈 때는 다르다. 한일 양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사전 승인·비행기 값과 활동비가 만만찮다. 이런 비용을 모두 합치면 그만큼 들어간다.” 윤 교수는 서해안에서 뗏목으로 항해하기 가장 좋은 시기로 남서계절풍이 불 때를 꼽는다. 뗏목은 자체로는 동력이 없어 오로지 바람에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바람의 방향이 어떤지가 가장 중요하다. 남(南)중국의 닝보 앞바다에서 흑산도 쪽으로 올 때는 남서계절풍이 불어야 한다. 여름에 남서계절풍이 불면 남중국에서 흑산도를 경유하여 전라도 해안가에 도착할 수 있는데, 이 때는 해류도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흐른다. 계절풍과 해류가 일치하면 뗏목 항해가 아주 편해진다. 바람을 이용해 항해한 고대 뱃사람들에게 이러한 계절풍과 해류의 방향은 필수적인 정보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떤가. 겨울에는 뗏목 항해가 불가능하다. 북풍이 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바람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부는데, 반대로 해류는 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올라간다. 바람과 해류가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면 부딪치기 마련이다. 또 해류와 북풍이 마주치면 파도가 크다. 그래서 겨울 항해는 아주 위험하다. 하지만 발해인들은 주로 겨울에 일본을 갔다. 음력 10~1월에 출발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바람이 북에서 남으로 불기 때문에 위험하긴 해도 발해에서 일본에 도착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처럼 해류와 바람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면 고대인의 항해시기를 역추적할 수 있다고 윤 교수는 설명한다. 또 윤 교수는 해류를 통해 고대 역사의 유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해류는 마치 셔틀버스와 같다. 한 지점에서 출발하면 정확히 정해진 또 한 지점에 도착한다. 감포, 포항, 울산에서 떠나면 일본의 시마네나 돗토리 지역에 도착한다. 따라서 삼국시대 신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신라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사람들은 전남의 해안이나 영산강 하구, 해남, 섬진강 하구에서 출발했다. 도착 지점은 일본 규슈의 중서부인 나가사키, 구마모토 지역. 백제계는 규슈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다. 가야는 어떤가. 가야의 영토인 김해, 거제에서 출발하면 쓰시마를 경유하여 하카타 지역에 도착하게 된다. 즉 가야계 사람들은 하카타에 정착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구려는 강릉 등지에서 출발했다. 즉 동해안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면 일본열도의 후쿠이, 니가타 지역에 도착한다. 이렇게 고대의 해상 항해는 해류, 조류, 바람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방향을 정했다. 여기서 해류는 늘 흐르는 바닷물의 흐름을 가리키고, 조류는 육지와 가까운 바닷물의 흐름을 말한다. 조류는 지역의 형세에 따라 대단히 복잡하게 변화한다. 해안가 중간중간에 바위와 섬이 가로막아 물의 흐름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 진도의 바닷물 흐름을 예로 들면 만조와 간조에 따라 해남과 진도 사이의 조류는 크게 변화한다. 이런 조류의 흐름은 그 지역 뱃사람만이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이 남해안과 서해안 해전에서 크게 패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조류의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외부에서 온 배가 해안가에 접안하려면 현지 사람의 안내를 받아야 하고 여기서 해상권력이 탄생했다. 이 조류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 해상권력을 장악했다는 얘기다. 이는 또 물류체계의 장악을 의미한다. 물류를 장악하면 권력과 군사력을 장악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호족 내지 지방세력이 탄생했다. 해상 지방세력은 필연적으로 중앙정부와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해상세력은 개방성과 무정부성이 강한 속성이 있어 중앙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 쉬웠던 탓이다. 고대에 해상은 모든 정보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첨단기지였다. 하지만 중앙세력은 상대적으로 내륙에 위치해 있어 정보를 접하는 데 항상 조금씩 늦어 어느 시대건 지방의 해상세력은 중앙세력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계속) |
우리 역사에서도 상대적으로 섬이 많은 전라도 지역이 고대 해상세력의 본거지로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통일신라 말기의 장보고다. 장보고는 역사상 보기 드물게 전라도 완도를 중심으로 해상세력의 챔피언으로 군림했지만 결국 신라 중앙정부와의 마찰 끝에 제거됐다. 조선 왕실 역시 해양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뱃놈’이라는 말에 그 당시의 탄압과 경시사상이 깔려 있다. 해양세력은 조선시대 신분계급의 위계를 나타내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가장 하위 계급인 상(商)에도 속하지 못했다. 이런 태도가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해양문화가 발전하지 못하게 된 이유라며 윤 교수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길을 걷는다”
윤 교수는 고대 해양루트와 관련한 저술활동을 활발히 했다. ‘윤박사의 뗏목 탐험’ ‘말 타고 고구려 가다’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장보고의 나라’ ‘역사전쟁’ 등 모두 15권의 저서를 남긴 것.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몇 부나 되냐”고 물었더니 “5000부 미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목숨 건 탐험을 감행한 후 그 다이내믹한 체험을 책으로 냈어도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다. “고생에 비해서 팔리지 않는 것, 이게 인생이지 않느냐”며 그는 빙긋이 웃었다. 마지막으로 “50년 인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윤 교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길을 걷는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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