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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한글의 ‘세계화 1호’ 해외서 공식 표기 문자로 채택

한글의 ‘세계화 1호’ 해외서 공식 표기 문자로 채택

정환보기자 botox@kyunghyang.com
ㆍ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族 한글 표기 교과서로 수업

한글이 인도네시아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族)의 표기 문자로 채택됐다. 한글이 다른 나라·민족의 공식 표기 문자가 된 것은 처음이다.

훈민정음학회(회장 서울대 김주원 교수)는 한글이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 부톤섬 바우바우시(市) 찌아찌아족의 공식 표기 문자로 도입됐다고 6일 밝혔다.

인구 6만여명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은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지만 이를 표기할 고유 문자가 없어 고유어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훈민정음학회 관계자들은 바우바우시를 찾아가 한글 채택을 건의했고 지난해 7월 한글 보급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학회는 그후 찌아찌아어를 배우기 위한 교과서를 제작했고 지난달 21일부터 바우바우시 내 소리올리오 지구 초등학생 40여명에게 한글로 된 교과서로 수업을 시작했다.

한글로 된 교과서는 ‘바하사 찌아찌아1’. 우리말 쓰기에 해당하는 ‘부리’, 말하기인 ‘뽀가우’, 읽기인 ‘바짜안’의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교과서는 모두 한글로 표기됐다. 교과서에는 한국 전래 동화인 <토끼전>이 찌아찌아어로 번역돼 한글로 실렸다. 찌아찌아족이 표기 문자로 사용하는 한글은 찌아찌아어 발음 특성상 지금 우리는 쓰지 않는 순경음 ㅂ(ㅸ)이 포함됐다.

한글 학계는 지금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태국과 네팔의 소수민족이 표기 문자로 한글을 사용하도록 노력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찌아찌아족이 한글 세계화 작업의 첫 결실이 된 것이다.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우수한 글자인 한글이 소수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사라질 소수민족 언어 ‘한글’로 새 생명

정환보기자 botox@kyunghyang.com
ㆍ인도네시아 소수민족 ‘한글 공식문자’ 채택
ㆍ어떤 말이든 표기 가능한 ‘우수성’ 입증
ㆍ세계 곳곳 ‘한글 마을’ 탄생 기대감 높여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표기 문자로 공식 채택하면서 독창적 표음문자(表音文字)인 한글의 우수성이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한글 세계화가 속도를 내는 데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가 찌아찌아족 밀집지역인 소라올리오 지구의 초등학생 40여명에게 한글 수업을 시작한 것은 지난달 21일. 학생들에게는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 ‘바하사(語) 찌아찌아 1’을 나눠주고 주당 4시간씩 읽기·쓰기·말하기 수업을 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의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 초등학생들이 자신들의 토착어를 한글로 표기한 교과서를 펴놓고 수업을 하고 있다.
| 훈민정음학회 제공·연합뉴스

수업은 토착어인 찌아찌아 말을 육성 그대로 한글의 자음·모음을 조합해 옮겨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국내에서 쓰지 않는 순경음 ㅂ(ㅸ)도 이곳에서는 사용된다. 현지인들의 울리는 ㅂ발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이미 교과서에는 찌아찌아족의 언어와 문화, 주거주지인 부톤섬의 익숙한 역사와 설화가 담겨 있고, 한국 전래동화 ‘별주부전’도 ‘껠린찌 마이 꾸라꾸라(토끼와 자라)’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인구 6만명이 사는 이 섬에서는 단순히 교과서에만 한글 표기를 도입한 것은 아니다. 바우바우시는 현재 지역 도로 표지판에 로마자와 함께 한글을 병기하고 한글로 역사서와 민담집 등을 출간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시는 오는 9월 소라올리오 지구에 ‘한국 센터’ 건물을 착공하고 한글·한국어 교사를 양성해 다른 지역까지 한글 사용지역을 넓히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한글로 표기돼 찌아찌아어 교과서에 실린 별주부전.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 보급과 한글 표지판 설치 등의 작업이 본 궤도에 오르면, 이 곳은 명실상부한 ‘한글 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학계에서는 문자체계가 없는 소수민족의 언어가 대부분 사멸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글 보급이 더 확산될 수 있다는 평가다.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전기가 됐다는 것이다.

훈민정음학회의 오랜 노력 끝에 한민족 외의 민족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받아들인 첫 물꼬가 터지면서, 세계 곳곳에 ‘한글마을’이 더 많아질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한글 관련 단체·학계에서는 한글의 세계화에 대해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한글을 전 세계와 함께 나누는 동시에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념인 ‘문맹 타파’ 정신을 더욱 발전시키는 길”이라는 의미도 부여하고 있다.

김주원 훈민정음학회장은 “너무도 많은 언어가 사멸돼 가고 있는 현실에서 문자가 있는 민족과 없는 민족의 문화적 역량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며 “한글 세계화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긍심 고양과 국가 브랜드 가치 제고에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정환보기자 botox@kyunghyang.com>

'글 없는 백성 어엿비…' 세종의 뜻, 세계에 펼치다

입력 : 2009.08.07 02:34

"로마 문자보다 우수하다"
아(亞) 소수민족 찾아다니며 학자들이 '한글 세계화'
정부차원 총괄단체 절실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에게 한글을 표기수단으로 전파하는 운동은 민간 차원에서 여러 차례 전개되어 왔다.

이현복(73)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글 해외전파'의 개척자이다. 이 교수는 1994~2003년 매년 두세 차례 태국 북부의 소수민족인 라후(Lahu)족을 찾아 한글을 전파하는 활동을 펼쳤다. 처음 5년은 라후어의 음운을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어떤 글자가 필요한지 연구했고, 이후 산골마을 사람 20여명을 대상으로 라후어를 한글로 표기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우리말 발음에 없는 목젖소리나 콧소리 등을 표기하기 위해 한글 자음과 모음을 24개에서 80개까지 늘린 '국제한글음성문자'(IKPA·International Korean Phonetic Alphabet)도 개발했다.

이 교수가 한글 해외전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영국 런던대에 유학하던 1960년대부터였다. 그는 "로마자를 뿌리로 하는 국제음성기호(IPA)보다 한글이 훨씬 뛰어난 음성체계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훈민정음학회가 찌아찌아족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만 ‘쓰기’(부리) 교재. 왼쪽 위에 한글로 적은 ‘렝까뿌에 깔리맏 이 􅐡���루 마이 알라사노’라는 문장은 ‘아래의 빈칸을 이유와 함께 완성하라’는 뜻이다. 오른쪽 위의 ‘아디 세링 빨리 노논또 뗄레􅐨���시…’는 ‘아디는 텔레비전을 자주 아주 많이 본다’는 뜻이다./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
한글 해외전파는 이후에도 학자들 차원에서 아시아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이어졌다.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는 중국 소수민족인 '로바족'(2002년)과 '어웡키족'(2008년)의 언어를 한글로 적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경북대 연구팀은 한글로 동티모르 민족어인 '떼뚬어'를 표기하는 연구를 했다. 김석연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는 네팔 오지 마을의 언어를 한글로 적기 위해 몇년 동안 노력했다. 이번에 찌아찌아족에 한글 교과서를 만들어준 이호영 서울대 교수도 2004년 중국 흑룡강 유역의 소수민족인 '오로첸족'에게 한글 전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학자들 개인 차원의 노력으로는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현지 정부와의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이호영 교수는 "중국 오로첸족에게 한글을 전파하려고 했을 때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는 중국 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따라서 '한글 해외전파'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현복 교수는 "개인 차원으로 한글을 보급하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결국 국가 차원에서 장기적 계획 아래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의 경우에도 지속성을 갖고 한글이 정착되려면 상주 교육인원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직 '한글 해외전파'를 총괄하는 기구도 없는 실정이다. 4~5년 전 한글 해외전파를 총괄하는 단체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현재 문자가 없는 소수민족의 언어는 전 세계에 66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네스코 후원을 받는 국제단체인 SIL(하계언어학교)은 사멸 위기에 있는 종족의 언어에 로마자 기반의 문자를 보급하는 '바벨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SIL은 1934년 창립 이래 중남미·호주·서남아시아 등 2550개의 소수민족 언어를 연구해왔다.

전문가들은 한글이 영문 알파벳 못지않게 소수민족 언어 표기 수단의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다. 전광진 교수는 "한글이 어느 문자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하면서 한글이 한국어만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글에 대해 우리 스스로 울타리를 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배우기 쉽고 모양도 정말 예뻐… 글자 갖는 게 이리 행복할 줄이야"

입력 : 2009.08.07 00:42

찌아찌아족 반응

훈민정음학회와 함께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만든 사람은 바우바우시의 고교 교사인 아비딘(Abidin·32)씨였다. 그는 작년 12월 훈민정음학회 초청으로 서울대 언어교육원에서 6개월간 한국어 교육을 받으면서 언어학과의 이호영 교수, 박사 과정 황효성(26)씨와 공동작업을 했다. 6일 국제전화로 연결된 그는 "한글이 아주 과학적이라고 느껴서 귀국한 뒤 인도네시아 정부에 한글 채택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현재 바우바우시에는 15개 남짓한 언어가 쓰이고 있다. 이 중 '올리오(Wolio)'라는 언어만 표기법이 있는데 복잡한 아랍 문자를 사용해서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현지 주민들은 "한글이 올리오보다 훨씬 간단하고 배우기 쉬워서 좋다"고 말한다고 아비딘씨는 전했다. 사라져가는 종족 언어를 지켜보면서 역사와 전통을 잃을까 걱정하던 마을 원로들도 한글 교재의 출간을 반기는 눈치라고 한다.

바우바우시의 소리올리오 지역 학생들은 최근 출간된 찌아찌아어 한글 교재로 초등학생은 매주 4시간, 고교생은 매주 8시간씩 배운다. 아비딘씨는 "학생들이 아직 한글을 익숙하게 읽고 쓰지는 못하지만 자기 말을 표기하는 글자를 처음으로 배운다는 열의가 뜨겁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유 언어를 표기할 문자가 없었다. 이젠 배우기 쉽고 모양도 예쁜 글자가 생겼다. 글자를 갖게 된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 "앞으로 한글 교사가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한글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아 든 찌아찌아족의 표정은 매우 밝다고 아비딘씨는 전했다.

"우월감 아닌 상호주의로 접근… 소중한 첫발"

입력 : 2009.08.07 00:48

한글 전파 앞장선 이호영·김주원 교수

"한글을 해외에 전파하는 것은 모든 국어학자와 언어학자의 꿈이죠. 이제 간신히 첫발을 뗀 겁니다."

'한글 해외전파'의 첫 결실을 맺은 훈민정음학회장 김주원(53)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2007년 7월 국어학자와 언어학자 70여명이 만든 훈민정음학회는 그동안 중국·네팔·태국 등에 한글을 전파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원인을 철저히 분석했다. 언어학적 분석이 제대로 안 된 언어를 무작정 한글로 표기하려 했고, 현지 주민과의 교감 없이 문자만 전파하려고 했던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대상 선정부터 신중을 기했다. 지난달 한글 교재인 '바하사 찌아찌아 1'을 펴낸 이호영(46)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는 "처음부터 한글 전파 대상을 동남아와 남태평양 지역으로 한정했다"고 말했다. 한글로 기록하기 쉬운 발음을 가졌고, 중앙 정부의 견제가 상대적으로 덜한 데다, 한류(韓流) 열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를 펴낸 이호영(왼쪽)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같은 과 김주원 교수와 함께 활짝 웃고 있다./박동주 인턴기자(중앙대 사진과 3년)
인도네시아의 소수민족 찌아찌아족을 최종 대상으로 선정한 것은 작년 6월이었다. 훈민정음학회 부회장인 전태현 한국외대 교수(말레이·인도네시아어 통번역학)가 추천했다. 그들의 토착어인 찌아찌아어는 문자가 없어 앞으로 50년만 지나면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글 전파를 위해 찌아찌아어 발음을 분석하면서 학회는 15세기에 사라진 '순경음 비읍(ㅸ)'도 되살려 사용하기로 했다. 김 교수는 "현지인들에게 무조건 낮은 자세로 접근했다"고 말했다. 한글의 우수성에 심취해 글자를 베푼다는 시혜(施惠)적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자존심이 없는 민족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면서 "동등하게 교류한다는 상호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년 7월 학회와 인도네시아 바우바우시가 맺은 양해각서(MOU)에는 한글을 매개로 서로의 문화를 교환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글판 찌아찌아어 교재가 출간돼 수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김 교수는 "앞으로 가게 간판, 공문서 등 일상생활 표기에 한글이 얼마나 쓰일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훈민정음학회는 현지에 1명뿐인 한글 교사를 늘리고, 한글 교재도 수준별로 만들 계획이다. 9월에는 '훈민정음문화센터'를 지어 한국문화 전파의 중심지로 활용하기로 했다. 김 교수는 "아직 만세 부를 때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얘기였다.

찌아찌아족 “섬의 아름다운 전설, 한글로 후손에 전해야죠”
■ ‘한글수출 1호’ 인도네시아 부퉁섬 찾아가보니

한국의 망부석 이야기처럼
풍부한 구전문화유산 많아
한글 열심히 배우고 싶은데
교과서 너무 부족해 아쉬워






《찌아찌아족이 사는 부퉁 섬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서울에서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까지 비행기로 7시간. 자카르타에서 다시 마카사르를 들러 큰다리(Kendari)까지 비행기로 5시간을 더 가야 했다. 큰다리에서 하루 두 번 있는 배를 타고 5시간 걸려 바다를 건넌 뒤에야 부퉁 섬에 도착했다. 8일 오후 3시 45분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부퉁 섬에 도착한 것은 9일 오후 9시. 28시간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하지만 한글을 쓰는 찌아찌아 사람들을 보자마자 피곤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찌아찌아 사람들은 웃음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꼬레아?”라며 관심을 보였다. 기자가 “할로(HALO·영어의 헬로와 같음)”라고 손을 흔들자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며 깔깔 웃었다. 11일 먼 이국에서 만난 찌아찌아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들이 쓰는 한국말로 금방 정겹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한국인의 발걸음이 거의 없었던 곳. 가는 길도 마음도 멀기만 했던 부퉁 섬 찌아찌아족은 한글을 쓴다. 찌아찌아족에겐 고유의 말이 있지만 글은 없었다. 지키고 싶은 아름다운 말이 있어도 짧은 문학작품 하나 글로 남기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글을 글로 가지게 되면서 찌아찌아족은 풍부한 문화유산을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찌아찌아족은 근대까지 고립을 자처하며 자기만의 문화를 고수해 온 덕분에 독특한 전통 문화를 때 묻지 않은 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바우바우 시내에는 그들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녹아 있다. 사람들이 집을 짓고 닭을 키우며 한가롭게 사는 곳 옆에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진 둘레 2.47km의 ‘크레톤 요새’가 있다. 1542년 이 섬에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첫 술탄(Sultan)이 된 왕의 무덤도 마을이 내다보이는 곳에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자식과 조카들에게 전통 춤인 린다춤과 무술을 가르쳐온 라사미리 씨(46)는 “찌아찌아족의 문화유산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고 자랑했다. 찌아찌아족은 해마다 두 번씩 전통 춤과 무술, 음악을 미리 부족 주민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도 마련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내기철 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면서, 수확 뒤 감사 인사를 드리며 축제를 열었지만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8월 17일 독립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공연을 펼친다. 공연은 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제단인 바루가 앞에서 열린다. 찌아찌아족은 바루가를 다른 장소로 옮기면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건물 전체를 들어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글이 없어 이렇다 할 역사서나 전통 문학이 하나도 없다. 글이 없어 입으로만 전해 내려오다 보니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소멸돼 원형을 찾기가 힘들다.

바루가 앞에서 열린 찌아찌아 전통 공연에서 1등상을 거머쥔 아리스 씨(23)는 “직접 전통 춤을 배워 소중한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어 뿌듯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글이 없다는 게 우리에게 모자란 부분이었다”며 “앞으로 한글을 통해 찌아찌아족의 문화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됐다”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고교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카사타니아 양(15·여)은 찌아찌아족인 아버지와 삼촌, 어머니에게서 찌아찌아족의 전설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전설은 많지 않다. 찌아찌아어로 된 이야기를 인도네시아어로 그대로 번역하기도 힘들고 어린 시절 잠결에 들었던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키만큼 긴 여자가 연인을 기다리다 돌이 됐대요.” 아버지가 찌아찌아어로 들려준 길고 긴 망부석 이야기 중에서 카사타니아 양이 기억하는 내용은 이게 전부다. 카사타니아 양은 “책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면 잊어버리지 않고 친척 동생에게도 자세히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한글 수업에 열심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그는 한글 공책을 펼쳐 들었다. ‘바하사 찌아찌아’ 교과서도 30권밖에 없어 초등학교 4개 반이 조금씩 나눠 가졌는데,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아비딘 선생님이 쓰는 한 권밖에 없다. 카사타니아 양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써준 노트 필기만 가지고 책 한 권 꽂혀 있지 않은 빈 책상에 앉아 복습을 한다.

카사타니아 양의 어머니 와사리 씨(52)는 찌아찌아어밖에 할 줄 모른다. 대부분이 인도네시아어도 함께 할 줄 알지만 와사리 씨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부모님께 배운 찌아찌아어만 한다. 카사타니아 양은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어만 해 글을 쓸 줄 모르는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싶단다. 그런 딸을 보며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모범생인 막내딸이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 한국어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어요.”

영어 선생님이 한글 전도사로
아비딘 씨, 이호영 교수와 교과서 내… 사전 출간 계획도






바우바우 시 제6고등학교(SMA6) 영어 교사인 아비딘 씨(33)는 한여름 인도네시아에서도 긴팔에 잠바를 입고 다닌다. “한국이 어땠느냐”는 물음에 아비딘 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우기를 빼고는 1년 내내 무더운 날씨 속에 살아 추위를 많이 타는 인도네시아인 아비딘 씨는 한국 이야기를 꺼내자 추웠던 기억에 몸서리쳤다.

서울대 이호영 교수(언어학)와 함께 한글로 된 찌아찌아어 교과서 ‘바하사 찌아찌아’를 만들기 위해 아비딘 씨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서울대 근처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16.5m²(5평)짜리 원룸을 구해 놓고 혼자 5개월을 지냈다. 무슬림이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어 학교 밥 대신 근처 시장에서 쌀과 생선을 사다 밥을 지어 먹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을 먼 고향에 두고 온 그는 코끝이 시리게 추운 날이면 어김없이 아들 생각이 났다. 같이 한국을 찾은 다른 영어 선생님은 매일 가족 생각에 울다가 포기하고 부퉁 섬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깊숙한 섬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한국에까지 와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된 것은 한글로 된 교과서 때문이었다. 이 교수는 한국외국어대 전태현 교수(말레이·인도네시아통번역학과)의 소개로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자기 글이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주고 싶었던 전 교수는 고유의 말은 있지만 글이 없고 중앙정부의 견제가 덜한 부족을 찾다가 찌아찌아족을 알게 됐다. 이 교수는 지난해 7월 찌아찌아족을 만나러 와 바우바우 시의 아미룰 타밈 시장과 교육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한글을 쓰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이 교수와 아비딘 씨는 내년 여름 전까지 ‘바하사 찌아찌아’ 2권을 만들 계획이다. 찌아찌아어 한국어 인도네시아어 아랍어 등 4개 국어로 된 사전도 낼 계획이다.

바우바우(인도네시아)=신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