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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

김연아, 한국 피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다
최초 그랑프리파이널 우승, 그 이틀간의 기록
신재명(신재명) 기자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펼쳐진 2006-2007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시니어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의 연기 모습.
ⓒ 연합뉴스
15일 상트뻬쩨르부르그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 촬영을 위해 필자가 처음 본 김연아 선수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실전이 아닌 오전 프리스케이팅(Free Skating· 본 경기당일 오전에 가지는 연습)인데도 언제나 박분선 코치를 대동하고 경기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당일의 쇼트프로그램(필수 테크닉들을 조합한 3분 가량의 연기) 직전에도 만 16세의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언론의 취재 경쟁과 경기 직전의 압박감은 그녀를 촬영하는 필자마저 숨을 크게 들이쉬게 만들었다.

일본에서 날아온 수십 명의 팬들과 서로에게 의지하는 3명의 일본 선수들, 시차와 유럽 대륙이라는 유리한 점을 지녔던 2명의 유럽 선수들에 비해 처음 시니어 그랑프리 무대에 선 김연아 선수는 분명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아사다 마오는 아주 좋은 선수예요"

하지만 그녀의 차례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로 있던 그녀의 스케이트 날은 차디찬 빙판 위를 미끄러졌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가 자세를 잡자 음악이 흘러나왔고 그 순간 김연아 선수는 본능적으로 음악에 빠져버렸다.

김연아 선수는 '치이익'하고 날카롭게 얼음 깎이는 소리를 내며 카메라 든 필자의 앞을 빠르게 지나갔고 놀랍게도 그런 그녀의 두 눈에서는 조금 전 잔뜩 긴장해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녀는 음악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였다.

음악이 끝나고 신들린 그녀가 멈추자, 관중석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서야 그녀는 정신이 돌아온 듯 관중들에 인사하고 박 코치와 함께 결과를 기다리는 자리로 갔다. 김연아 선수는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잠시 긴장하는 듯했지만, 프레젠트 스코어(현재 순위) 1위가 나오자 활짝 웃으며 카메라 앞으로 나왔다.

빙판 뒤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캐나다(CBC), 미국(ESPN), 일본(아사히), 한국(SBS), 러시아(NTV+)의 언론들이었다. 그들은 김 선수의 소감과 16일 경기에 대한 각오를 수십번씩 물었다.

김연아 선수는 스케이트도 풀지 못하고 다리가 저린 상태에서 같은 대답을 수십번씩 해야했지만, 만 16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친절하고 또렷하게 본인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은 이후 3위가 확정된 상태에서 3위 안에 든 선수들을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세계 50여개 언론사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지친 기색도 없이 또박또박 답했다.

언론은 그녀와 당일 1위를 달리던 일본의 아사다 마오 선수를 언제나 '라이벌'로 만들고 싶어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사다 마오는 아주 좋은 선수예요. 저보다 한 수 위라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제 최선을 다할 뿐이고 마오 선수나 다른 어느 선수도 특별히 의식하고 있지는 않아요."

뚜벅뚜벅 빙판으로 나온 김연아

그녀는 오전 프리스케이팅에서 여전히 긴장했지만 많이 여유로워진 모습이었다. 허리 통증과 새로운 스케이트의 적응 등으로 표정이 그렇게 밝지는 못했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만은 확실한 듯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 프리스케이팅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1위 아사다 마오, 2위 미키 안도(일본)와 함께 몸을 푸는 김연아 선수는 빠르게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녀는 본인의 차례가 되자 뚜벅뚜벅 빙판을 향해 걸어갔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빙판에 몸을 맡겼다. 그녀는 앞선 사라 메이어(스위스) 선수의 경기 결과가 발표되는 동안 빙판을 서너 바퀴 돈 후 '김연아 선수 준비하세요'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갑자기 박 코치에게 다가가 물을 마시고 땀을 닦아냈다.

시작 직전 관중들의 시선을 느끼며 긴장감이 몰려드는 순간이었다. 이때, 어디선가 "대~한민국!"과 우리나라 특유 박자의 박수가 흘러나왔다. 전 관중이 갑자기 술렁였고 "김연아 파이팅!", "띄 싸마야 크라시바야 나 졔믈례!(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입니다)" 등 교민들의 응원과 박수가 경기장을 압도하자 그녀는 알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찬 듯 씩씩하게 관중 앞에 섰다.

경기 첫날 홀림(피겨 동호회), 교민 등의 20여명의 한국 응원단과 함께 현지 총영사관 지원으로 가세한 50여명의 교민 응원단이 관중의 호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안겨주었다.

전세계 피겨 요정들의 여제를 뽑는 시니어 그랑프리 무대 결선에서 그녀는 한국 피겨의 희망으로 우뚝섰다.

이후의 5분은 한국 피겨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순간이였다. 김연아 선수의 몰입된 표정은 전세계 취재진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그녀의 열정적인 연기 앞에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붙박혀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의 트리플 착지가 약간 흔들리는 순간 경기장 전체가 숨죽였고, 이후 그녀가 선보인 격정적인 연기에 모두가 몰입했다.

음악이 끝나고 김연아가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하자 관중들은 꿈에서 깨어난 듯 우뢰와 같은 함성과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김연아 선수는 사방에 떨어진 꽃과 인형들을 보며 미소로 답했다.

한국인 최초 시니어 그랑프리 여자대회 우승

이후의 결과는 스포츠가 한 편의 드라마임을 증명해 주었다. 마지막 주자였던 아사다 마오가 넘어지면서 김연아 선수는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고, 빙판 뒤에서 미국의 ESPN과 인터뷰를 하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감격의 순간에도 끝까지 마음을 다잡고 취재진들의 축하에 겸손하게 감사를 표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필자는 경기기간 내내 러시아 언론과 영어권 언론들의 김연아 선수 인터뷰와 기자회견 통역을 진행했다.

이어진 시상식에서는 1위를 한 김연아 선수가 가장 먼저 단상에 올랐고, 이어 2위 아사다 마오가 나와 환한 미소로 축하해주었다. 아사다 마오는 비록 김연아 선수에게 주니어 대회에 이어 시니어 대회에서까지 패배를 맛봐야 했지만, 새로운 승자의 탄생을 축하해주었다.

애국가가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태극기 앞에 관중 모두가 기립했다. 김연아 선수 역시 높이 올라가는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2006년 12월 16일. 김연아 선수, 한국인 최초 시니어 그랑프리 여자대회 우승. 한국 피겨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피겨요정' 김연아의 고생길
허리통증 불구 일반석 9시간 비행... 도착후에도 길 몰라 우왕좌왕
정인고·이준호(smolin) 기자
고생길 떠나는 '피겨요정' 김연아(앞)와 코치 박분선씨가 지난 13일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4일부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2006~07 국제빙상연맹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파이널이 열리고 있다.

이 대회에는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빙상연맹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 시리즈 4차대회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피겨요정' 김연아(16)도 참가했다.

김연아는 16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이스팰리스에서 열린 쇼트프로그램에서 3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16일 밤 열리는 프리스케이팅 경기 합산 결과에 따라 우승 여부가 가려진다.

러시아로 가는 고생스러운 여정

한국 피겨스케이팅 사상 첫 금메달을 딴 주인공이기에 김연아는 그동안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예전에 비해 김연아를 대하는 대우가 달라졌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는 길에 김연아가 겪은 고생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김연아는 지난 13일 인천국제공항에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출국 전 국내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최근 허리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는 등 몸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밝혔는데 멀고도 힘든 여행일정은 중요대회를 앞둔 김연아에게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다.

대회 개최지인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현재 한국에서 직항편이 없다. 따라서 김연아는 인천에서 모스크바로 간 뒤 공항(국제선->국내선)을 바꿔 다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야했다. 허리가 아픈 김연아는 인천-모스크바 구간을 일반석에 앉아 무려 9시간이나 장시간 여행을 해야 했다. 비행편은 국내항공이 아닌 외국(러시아) 항공사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김연아는 최종 목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기 위해 모스크바(셰레메체예보) 국제선 공항에서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런데 두 공항 간의 환승 시스템은 불편하기로 악명이 높다. 안내 표지판도 찾기 어렵고, 영어도 통하지 않아 이곳을 처음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엔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몇배에서 몇십배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공항을 이동하기 일쑤다.

김연아를 응원하기 위해 동행했던 피겨동아리 회원 임아무개씨에 따르면, 김연아 일행도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후 이동경로를 몰라 공항 주변을 헤매다가 결국 비행기에 동승했던 모방송사 직원들의 도움으로 밴택시를 불러 공항을 이동했다고 한다. 최종 목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김연아는 "가장 힘들었던 여행길이었다"고 밝혔다고 동행했던 임씨는 전했다.

김연아 "가장 힘든 여행길이었다"

임씨는 기내에서 김연아의 안타까운 모습과 공항이동을 동행하며 겪은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도 9시간을 좁은 좌석에 앉아 오느라 불편했는데 큰 대회를 앞둔 한국의 대표선수가 그것도 허리 통증을 겪는 저 어린소녀가 힘들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제 돈으로라도 대한항공 퍼스트 클래스를 사주고 싶더라고요. 또 관광객들도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하면 픽업서비스를 받는다고 하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이에 대해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연맹에서 러시아항공사 표를 끊어줬으며 나중에 주최측에서 환불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연맹에서 관계자가 나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보통 선수와 코치 정도만 대회에 가고 연맹 관계자는 따라가지 않는다"면서 "이번 대회에는 연맹의 피겨 심판이사가 심판을 맡게 돼 김연아 선수와 동행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