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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여기저기가 아른거립니다. 매화꽃 만발한 매화마을, 온통이 노랗게 물들어 버린 산수유 마을, 꿀벌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하는 지리산 자락 벌통들, 툭툭 움터오는 소리를 낼 것 같은 양지쪽 실버들, 뾰족뾰족 돋아나는 가지 끝 연록 빛 새싹들…. 소한테 멍에를 씌워 쟁기를 걸고 "워~워~" 거리며 줄을 당기고, '어~더~더~더' 거리며 논밭을 갈던 농부와 '푸푸' 거리며 허연 거품 뱉어내면서도 우직하게 쟁기를 끌던 소 그리고 이미 흙빛이 되어버린 촌로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종다래끼를 들고 봄나물을 챙기던 아낙들의 모습, 꽃놀이를 하며 마신 한 잔 술과 흥에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던 상춘객들 모습도 허영처럼 떠오릅니다. 꿈인 듯 생시인 듯 여기저기를 떠올리다 악몽이라도 꾼 듯 벌떡 일어나 보면 눈앞에 보이는 건 컴컴한 천정입니다. 햇볕 잘 드는 꽃나무울타리 아래서 잔뜩 웅크리고 낮잠을 즐기던 강아지 꼴로 일장춘몽을 즐겼습니다. 목덜미를 잡고 있는 개줄 때문에 꽃나무 아래서도 웅크릴 수밖에 없는 강아지처럼 삶이란 현실에 얽혀 잠꼬대 같은 봄나들이를 즐길 뿐입니다.
허겁지겁 채움으로 잃는 어리석음 안타깝게도 어리석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다는 걸 실감하는 건 멀리 있거나 깊은 명상 끝에 터득하게 되는 거창한 게 아닙니다. 일상, 아주 가까운 일상에서 느낄 수 있음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따금 외식을 합니다. 삼겹살이나 장어를 구워먹는 그런 외식도 있지만 간혹은 차례를 맞춰 나오는 코스요리라는 것도 먹게 됩니다. 이미 몇 번을 먹어봤으니 끝날 무렵이 돼야 주요리가 나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먼저 나오는 요리로 미리 배를 채우니 진짜 맛나거나 요리의 주가 되는 그것들은 남기거나 건성으로 먹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음에 미리 배를 꽉 채웠기 때문입니다. 우선 당장 배가 고프고,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는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한정된 식보를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후회를 합니다. 다음엔 아무리 배가 고프고 맛나 보이는 것이 먼저 나와도 끝 무렵에 나오는 메인 요리를 맛나게 먹기 위해 꾹꾹 참아야지 하며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은 번번이 당장의 허기와 눈에 보이는 욕심 때문에 다시금 후회로 이어지기 일쑤입니다.
걸망 하나 챙겼습니다 웬만한 것들은 술술 흘러내리는 걸망 하나를 준비해 봄나들이를 시작하려 합니다. 굵직한 건더기는 건지고 소소하거나 흘려도 좋을 것들은 미련 없이 흘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매일 아침 바랑을 챙길 겁니다. 마음조차 서글플 만큼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궂은 날에는 거르겠지만 어느덧 중독이 된 듯 중증으로 찾아드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랑을 챙길 겁니다. 구멍이 숭숭 뚫려 담는 족족 다 흘리는 엉성한 바랑이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챙기고 챙길 겁니다. 바랑을 챙기곤 꿈 속에서 봤거나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것들을 챙기러 가출을 시도하렵니다. 깨달음을 갈구하는 수행의 길, 구도자들이 집을 나서는 고매한 출가와는 격도 다르고 엄두도 낼 수 없지만 훌훌 떠나버리는 가출이라도 하고 싶어 바랑을 챙길 겁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매일 그렇게 가출을 시도하겠지만 번번이 몸뚱이가 현실에 묶이는 이불 속 몽상으로 끝나게 될 겁니다. 박차고 일어나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실타래 같은 연들의 꺼들림에 이불 속에서만 꼼지락거리는 열병을 앓게 될 겁니다. 끊고 싶은 연과 속박, 버리고 싶은 번뇌와 연정을 멀찌감치 가져다 버리겠다 열심히 챙겨보지만 바랑에 담겨지는 건 하나도 없고 끊어지는 것 역시 하나도 없을 겁니다. 버리고 끊으리라 마음먹지만 속세의 일상이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좀체 떨어지질 않을 겁니다. 어떤 것은 가슴에 달라붙고, 어떤 것은 머리에 틀어박혀 꼼짝을 안합니다. 아침이면 그것들을 자르겠다고 가위질을 하겠지만, 저녁이면 그것들이 다시 자랐거나 심지어 챙겨두었을지 모릅니다. 그렇듯 속절없는 게 아상인가 봅니다.
새로 짊어진 새끼줄 걸망에 채워질 봄나물처럼 삶의 걸망에도 거를 것 거르고 챙길 것 챙기는 지혜가 가득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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