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좋지 아니한가>를 봤다. 왠지 끌렸던 그 영화. 결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떠올리는 또 하나의 영화. 그것은 몇 년 전 대학로에서 봤던 다큐멘터리 영화 <영매>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화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던 그 영화는 무당들의 일생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성찰케 하였는데,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꽤나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비록 소재는 무당이었지만 영화는 무당을 통해서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난 그 애증어린 가족들의 관계 속에서 현재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도, 상처 주는 것도 가족에게서 배운다. 역시 모든 근원적인 상처는 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아마도 저 비슷한 문장이 그 영화의 주제였던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가족으로부터 사회를 배운다. 가족은 사회를 투영하며 사회는 가족의 연장선상에 있다. 가족은 결코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마냥 편안한 안식처가 아니다. 현실에서의 가족은 어린 내가 경쟁을 배워왔던 공간이며, 비합리적인 권위를 관성적으로 습득했던 관계인 동시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와 함께 해 줄 사람들이 지지고 볶는 그런 곳이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끝없이 상처를 주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서로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결국 내게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가족의 소통을 이야기 한다는 면에서 영화 <영매>의 다른 버전이었다. 조금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이야기. 배우 천호진의 힘
그러나 똑같이 이 시대의 가족을 소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서 보기에는 흡입력이 부족했던 영화 <가족의 탄생>과 비교해 본다면 <좋지 아니한가>에는 앞선 영화가 가지지 못한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배우의 힘,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개인적으로 배우 천호진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 때문이었다. 천호진에 대한 나의 기억은 TV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차인표와 대척점의 위치에서 그와 대등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보여주었던 천호진. 나는 아직까지도 지포라이터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담배연기를 고독하게 내뿜던 그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굳게 다문 입술과 잔인하리만큼 강렬했던 그의 눈빛. 이후 영화에 등장하는 천호진은 항상 예외 없이 그 눈빛을 번뜩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스러웠지만 천호진의 진가만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영화 <로스트메모리즈 2010>부터 시작해서 <혈의 누> <범죄의 재구성> <비열한 거리>까지 그의 강렬한 눈빛과 카리스마는 영화를 지탱해주는 주요 버팀목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눈빛이 마냥 강렬하고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천호진의 눈빛에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고독이 깊게 배어 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그의 확고한 표정은 그의 결연함을 이야기하지만, 강인한 만큼 퀭한 눈동자는 그 이면에 숨겨진 근원적인 고독과 공허함을 보여준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 등장했던 천호진의 눈빛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가장 좋은 예이다. 사회적으로는 분명 성공했지만, 개인의 인생으로는 그 누구보다 불우한 현대인. 그의 눈빛은 바로 그런 현대인의 고뇌를 가장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천호진이 아버지로 나오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 흔들리는 가장의 역할을 하는데 있어서 천호진 만큼 어울리는 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어느 사회보다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가장이지만, 해체되는 가족 사이에서 그 권위를 잃어버린 채 고독을 곱씹어야 하는 한국 중년 남성 역할로 천호진은, 가장 훌륭한 캐스팅이었다. 가족 내 소통의 문제와 상처
소통의 부재. 영화는 이를 증명하듯이 가족들 각자의 삶을 모자이크 식으로 병렬한다.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구성원들. 그들은 모두 서로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이며 외계인이다. 모두들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자식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만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가족 구성원들의 삶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채 파편화된 모습을 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소통의 부재는 결국 구성원 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영화 속에서 선생님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퇴근길에 피를 흘리고 있는 여고생을 도와주기 위해 부득불 여관에 가게 된다. 그러나 앞뒤 맥락이 생략된 채 기록된 여관에서의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됨에 따라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평소 가족간 소통이 단절되었던 그는 그 누명을 벗어버릴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오해는 가장으로서 갖는 권위를 실추시킴으로써 그에게 복구하기 힘든 크나큰 상처가 되었으며, 이는 또다시 부부가 가져야 하는 신뢰를 떨어뜨리고, 이어서 부모와 자식 간 핏줄을 바탕으로 하는 끈끈한 유대감에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감독은 원조교재라는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낼 듯하다가 결국 영화가 끝날 때까지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관객들을 위해 한 번쯤 속 시원하게 가족들 간 푸닥거리를 해도 좋으련만 감독은 오히려 그 오해를 가지고 더 큰 상처를 만들어가는 꼴이다. 그것이 바로 가족 간에 갖는 애증의 근원이며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사회의 어느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의 입장을 서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쌓고 쌓이는 오해 앞에서 우리는 그 상처를 소통으로 치유하기 보다는 언제나 그렇듯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해결해주길 바란다.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한 밥상에서 밥을 먹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소통의 부재는 가족 구성원들 간 애증의 바탕이 된다. 끝없이 상처를 주며, 동시에 끝없이 상처를 보듬는 관계. 영화 <영매> 중 많은 이들이 영정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죽은 이가 불쌍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회한과 미련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데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한 한(恨)이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세대 간의 소통과 그 가능성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기기들이 발전했지만 정작 상호간의 소통은 불가능한 시대. 어쩌면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발명되는 문명의 이기들은 소통을 좀 더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전 보다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가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에 민감한 것은 그만큼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칠판에다 대고 자신의 언어를 정성스럽게 기록하지만, 학생들은 핸드폰을 들고 자신의 의사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시대. 그것은 결국 급격한 사회변화가 낳은,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가 공존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이다. 자신들의 어렸을 적 배고픔만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유신세대와 의지만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386세대,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소비하는데 익숙한 버릇없는 신세대 간의 의사소통이 어디 쉽겠는가. 아직까지 국회에서조차 욕설과 주먹질이 난무하고, 인터넷의 악플은 '초딩질'로 무시해버리는 우리의 현실은 그 세대격차의 극복이 매우 지난한 일임을 보여준다. 소통의 부재, 다양성에 대한 존중으로 치유될 수 있어
그러나 이와 같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의 문제해결 방식을 사회적 차원으로 그대로 차용할 수는 없다. 가족 내에서와 같이 무작정 참고 기다리기에는 사회라는 울타리가 가족보다 너무 크며, 그만큼 구성원들 간 가질 수 있는 신뢰는 가족이란 틀보다 훨씬 낮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미 도시화되고 산업화 되어 있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혈연에 기초한 신뢰가 아니라, 익명성이 전제되어 있는 합리성과 그를 바탕으로 한 사회규약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회 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영화 전체에 깔려있는 감독의 시선을 음미해볼만 하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매우 담담하다. 그의 전작 <말아톤>이 그랬듯이 감독의 담담한 시각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결코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온갖 편견의 대상이 되는 초원이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회를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만드는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이며, <좋지 아니한가>의 가족들 역시 우리 사회가 충분히 품을 수 있는 수많은 가족들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의사소통이란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영화는 가족 안에서조차 다양한 군상이 존재할 수 있음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그 각기의 다른 삶이 제각기 모두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현재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의사소통의 부재는 결국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나와 다른 다양성에 대한 존중으로서 치유될 수 있는 상처인 것이다. |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2>시스템으로 관리하는 미국 (0) | 2007.04.13 |
---|---|
<1>돈 없고 갈 곳 없는 한국 (0) | 2007.04.13 |
담을 건 담고 거를 것은 거르는 지혜의 걸망이 되길 (0) | 2007.03.20 |
''Korean Pregnant Women''시리즈 (0) | 2007.03.16 |
왈칵 진짜로 울어버린 최무룡 (0) | 2007.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