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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유난히도 더우면서도 이상하게 비도 많았다. 그날 하루 날씨가 쨍쨍하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고, 장마철도 지났는데도 장마철보다 더 비가 내리곤 하였다. 고고학을 공부하고 있는 기자는 이번 여름에 발굴장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오전에는 날씨가 좋아서 땀을 뻘뻘 흘러가면서 일을 하다가 오후에 갑자기 큰 소나기가 내려서 우왕좌왕하면서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며칠간은 계속 비가 내려서 발굴이 힘들게 되었다. 사실상 쉬게 되었는데, 이때는 실내작업을 하거나 유물세척 및 복원을 하는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시간을 보내던 차에 기회가 생겨서 함안박물관에 발굴장 사람들끼리 단체로 가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함안은 아라가야가 있었던 곳이다. 아라가야? 순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많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면 교과서에서 왠지 들었던 이름 같기도 할 것이다. 가야는 가야라는 하나의 국가가 아닌 여러 소국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흔히들 가야를 소국연맹체라고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알고 있으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가야는 나라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여러 소국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로서, 이러한 개념은 9세기에 생긴 개념으로 그 당시와는 거리가 있다. 가야연맹에서 연맹이란 말은 그러한 소국들끼리 뭉쳐있는 것을 말하겠지만, 생각보다도 가야는 서로 뭉치지 않고 반목하며 대립하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후기에 와서는 백제와 신라의 편에 서는 등 여러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점을 들어 최근에는 가야연맹이라는 말보다 가야제국(伽倻諸國)이라는 말을 주로 쓰고 있다. 가야를 정의 짓는다고 한다면 낙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있었던 여러 소국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함안박물관은 특이한 모양새를 갖고 있다. 정면에서 보면 무슨 첨성대 같은 게 형상화되어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데, 사실 첨성대 같은 게 아니라 토기의 아랫부분을 형상화한 것이다. 즉 토기 중에서 기다란 굽을 가진 토기를 고고학에서는 고배(高杯)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고배의 굽에 뚫린 구멍을 투창(透窓)이라고 부른다. 즉 그 당시 토기 중에서 긴 굽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것을 투창고배라고 하는데, 이 함안 지역에서는 그러한 투창고배의 투창, 즉 구멍의 모습이 화염문, 즉 불꽃모양으로 생겼다고 한다. 함안박물관 정문 쪽에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화염문 투창고배의 모습에서 접시를 제외한 굽 부분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마침 비가 내려서 기자와 발굴장 식구들은 재빨리 함안박물관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우선 화염문 투창고배 형상화 건축물의 아래에서 비를 피하였는데, 도리어 거기에서도 비가 떨어졌다. 알고 보니 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아닌가. 비를 피하고자 재빨리 달려왔는데, 도리어 안쪽에도 비를 맞으니 약간 허탈하였다.
동촌리 고인돌군에는 27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고인돌은 다른 고분들처럼 옹기종기 모여서 군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쉽게 생각해서 당시의 공동묘지라고도 생각되는데, 군장의 무덤이 묻히고 그 후에 그 후손들이 묻혀 계승성이 있거나, 혹은 마을 사람들이 묻힌 경우엔 서로 연계성을 위하여 같이 무덤구역을 썼다고 생각된다. 이 동촌리 고인돌 26호는 덮개돌에 모두 398개의 알구멍[性穴]이 있다. 알구멍을 만든 이유는 후세가 풍년을 빌거나 자식을 낳기를 기원한 의미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러한 성혈 중에서는 별자리를 나타낸 것도 실제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토속신앙의 일종으로 보는 민속적인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사진 속에서도 그러한 여러 알구멍들이 잘 보인다. 이 성혈들이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자는 좀 더 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제23권의 '남행월일기'를 보면 고인돌을 지석(支石: 사실 지석묘란 명칭은 여기서 유래했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으로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즉 옛 사람들은 이를 특이하게 생각하고 이를 신성시함으로써 그에 따른 여러 전설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흔적이 아닐까 한다. 혹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이를 만들어 놓고 그들의 종교적인 관습으로서의 가능성인데, 이 또한 설득력 있는 것이 고인돌 근처의 선돌[立石]도 비슷한 일례이기 때문이다. 사실 외부전시 중에서 선돌이 있는데, 1쌍으로 각각 암수를 설정해 놓고 있었다. 이 또한 과거 우리의 조상들의 인식에서 나온 게 아닐까? 외부전시는 고인돌과 선돌 외에도 차륜형토기를 형상화한 구조물도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선 문화재보존 작업 중이었는데, 공룡 발자국을 보존처리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시간 관계상 공룡 발자국 보존처리를 보진 못하였는데, 알고 보니 학교 선배가 그쪽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함안박물관 내부로 들어가자 전시실은 크게 3개였다. 1층의 기획전시실과 2층의 역사전시실과 민속전시실이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마침 특별전을 하고 있었는데, 돌로 된 그릇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특별전을 본 후 2층에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아라가야의 유물들을 살펴보았다. 소위 아라가야로 알려져 있는데, 기록에서는 안라국이라는 이름으로 보인다. 이 안라국은 본디 기원전 3세기에 등장하였던 안야국이 발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포상팔국의 난과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에 이를 극복함으로 인하여 정치적으로 발전을 이루었다고 본다. 안라국의 전성기 때의 권역은 지금의 함안지역뿐만 아닌 인근 마산의 진동만과 현동지역, 의령과 진주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6세기 대의 안라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을 저지코자, 가야제국을 대표하여 외교활동을 펼치는데, 529년엔 고당회의를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561년 신라에 의해 멸망되게 된다. 안라국은 주로 5세기 이후에 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대형고분들의 축조 시기도 바로 그때로 보고 있다. 역사학에서는 안야국이 안라국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현재는 이게 정설이나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대의 유물 및 유적이 없어 이를 확증하기가 어려운 게 현황이다. 안야국에서 안라국으로 가면서 국가 구조가 크게 커져 이에 대해서는 현재 2가지 의견으로 나뉘어 있는데, 금관가야의 사람들이 건너감으로써 안라국으로 커졌다는 것과 자체적으로 발생하여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 불꽃무늬 토기는 단순히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닌 일본에서도 여럿 보인다. 긴키지방 등에서는 이러한 불꽃무늬 토기가 여럿 보인다. 이를 가지고 단순한 교역의 흔적으로도 볼 수는 있으나, 고고학자들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교역품이라면 그 교역로에 따라서 불꽃무늬 토기가 분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당시 일본의 중심지라고 할만한 곳에 보이는 것은 교역품을 넘어, 정권 대 정권 간의 상호 교류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그 외에도 함안지역의 토기들은 특이한 게 여럿 보이는데 다른 지역과 비교되는 특징은 주로 화려한 문양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기대를 보면 화염문을 비롯하여 그밖에도 여러 화려한 문양들이 여럿 보인다고 한다.
함안의 수혈식석곽묘에는 다른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특이한 시설이 있다. 즉 구덩이의 벽면 위쪽에 구멍이 있다는 것인데, 과거엔 이를 감실이라 생각하였다. 감실이란 무덤 내에서 특별히 따로 유물을 넣거나 무엇인가의 목적을 위해 옆을 살짝 파 놓은 시설을 말하는데, 별도의 유물이 발견된 바 없으니 감실로 보기에도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결국 근래에 들어서는 이게 감실이 아닌, 큰 나무를 사이에 껴 놓게 하기 위해서 만든 시설로 보고 있다.
이러한 토제 귀걸이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형태는 원통형에 가까우며 측면이 약간 오목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함안 도항리 고분군에서는 3점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도 출토된 바가 있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귀걸이를 많이 쓴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의 여러 유적을 보더라도 귀걸이가 나오는데, 특히 금동으로 된 것은 지배자가 주로 쓰던 것으로서, 그 지배자의 힘을 표현하는 유물, 즉 위세품의 일종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남자들도 귀걸이를 했다고 하니 그 쓰임새가 생각보다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산산성에서 발견된 것인데, 성산산성은 최근 수많은 목간(木簡)들이 출토되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는 유적지이다. 이 박물관에서도 그 목간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목간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종이가 많지 않아서 글 같은 것을 나무판에 쓰곤 하였는데, 이를 좁고 길게 만들어서 문서처럼 쓰던 것들을 말한다. 책을 뜻하는 冊이라는 한자는 바로 이러한 목간(중국에선 주로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을 사용하였다)을 옆으로 이어 놓아 모아 놓은 것을 형상화 한 것이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유물을 보면 삭도라고 하여 작은 칼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지우개 같은 것이다. 즉 목간에다가 글을 쓰다가 틀릴 때 이 삭도라는 것을 이용해 재빨리 목간에 대고 그 면을 긁어 내듯이 베어 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성산산성에 대해 예전에는 안라국의 성곽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최근 발굴된 목간, 그리고 다수의 신라 유물 등을 미루어 보아, 주로 신라시대의 성곽으로서 보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실제로 성산산성을 먼발치에서 본 바가 있는데, 생각만큼 크지 않는 동네 뒷산 같았다. 사실 삼국시대의 성곽을 보면 그 정도의 규모의 산에 성곽이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러한 개마무사는 당시엔 최강의 파괴력을 자랑하였고, 그 위력은 전투에서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이러한 개마무사들과 싸우는 방법들도 생겼는데, 고대전투에서는 이런 식으로 절대강자가 없는 서로간의 역학관계에 따라 운용되고 그에 맞게 장군들이 군사들을 배치하는 등으로서 여러 매력이 있다.
아라가야는 당시 가야에서도 강대한 세력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이 아라가야는 역시 소국이었다는 점이 한계였고, 이는 백제와 신라가 강대한 세력이 되면서 아라가야 및 다른 가야제국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소국은 고대국가, 즉 중앙집권국가와는 달리 힘이 산발적이어서 하나로 뭉치기 힘들다는 게 단점이었다. 결국 시대에 도태되게 되고, 외교를 통하여 존속하려고 노력하나, 결국 패망하게 된다. 그러나 가야의 다양한 문화는 오늘날에 들어 밝혀지고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문화의 원천은 소국체계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어, 예전과 달리 가야사를 보는 눈도 새로워지고 있다. 함안박물관은 주위에 고분군도 있고 하여 한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기자가 갔을 땐 하필 날씨가 좋지 않아 주위의 고분군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가서 천천히 아라가야의 과거를 느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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