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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무채

"아가, 굴이 그렇게도 맛나더냐?"
굴 앞에서 시부모님도 몰라 본 간 큰 며느리
안소민(bori1219) 기자
바야흐로 굴의 계절이 다가왔다. 먹었을 때 입안 가득히 퍼지는 굴 특유의 신선하고 시원한 풍미가 그만이다. 예전에 나는 굴을 싫어했다. 굴의 비릿한 냄새와 미끈거리는 촉감이 기분 나빴다. 하지만 사람의 식성이란 성장하면서 변할 수도 있는 법.

굴은 겨울철이 제 철이다. 12월부터 2월 사이에 생산되는 굴은 가장 실하고 영양가가 많다. 그 시기 바다의 수온이 굴의 성장에 가장 알맞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모두 겨울에 출산한 나는 산후조리를 할 때 미역국, 시금치나물과 함께 굴을 퍽 많이도 먹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굴을 좋아하다 못해 굴 향기만 맡아도 그냥 쓰러지는 경지에 이른 것도.

▲ 굴무채에 쓰이는 굴은 성인 엄지손톱 만한 자연산 굴이라야 맛있다. 자연산이 귀해 양식굴을 쓰곤한다.
ⓒ 안소민
엊그제 시어머님께서 외출하셨다가 이 문제의 굴(?)을 사가지고 오셨다. 마침 무도 있으니 저녁에 굴무채를 해놓으라고 하셨다. 굴무채는 시아버님께서 대단히,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다.

시부모님께서는 그날 마침 저녁 식사 모임이 있어 외출하시고 나는 굴무채를 하기 시작했다. 굴을 보니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굴 향기가 날 유혹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신선한 굴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이건 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어디 맛이나 볼까? 재료가 신선한지 우선 확인부터 해야겠다는 핑계 삼아 젓가락을 들었다. 언감생심 시아버님께서 드실 음식을 어디 며느리가 먼저 손을 댈까마는 윗물 아랫물 잘 가린다고 평소 자부하는 이 며느리도 굴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나보다.

굴을 한두 개 먹고 그쳤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두 개 먹고 그칠 사람이면 애당초 굴을 시식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굴만 보면 브레이크가 고장난다는 것을. 한 개, 두 개, 네 개, 여덟 개…. 머릿속에서는 '이제 그만 먹어야지'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손은 자꾸 굴을 향하고 있었다. 미각에 도취된 나머지 판단력까지 흐려진 걸까? 나중에는 "이걸 누가 다 먹었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난 분명히 한 대여섯 개 정도 먹은 것 같은데 굴 봉지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참 이상했다.

▲ 아직도 자신없는 채썰기. 그러나 서투른 솜씨지만 채칼에 써는 것보다 더 맛있게느껴지는건 왜일까
ⓒ 안소민
하지만 언제까지 의구심에 사로잡혀 미스테리를 캐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시부모님이 돌아오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재빨리 잔머리를 돌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수배명령을 내렸다. 시어머님이 사오신 굴과 제일 비슷한 굴을 구하라.

하여간 간이 부어도 보통 부은 며느리가 아니었다. 붓다 못해 배 밖으로 나왔다. '시아버님'을 위해 특별히 '시어머님'이 사오신 굴을 아무 생각없이 날름날름 먹어치운 며느리였다, 나는. 어쨌거나 남편이 구해온 굴로 무사히 굴무채 완성. 그것도 아주 능청스럽게. 저녁식탁에 오른 굴무채를 본 아이들. 그런데 굴에는 손도 안 댄다. 어린시절 내가 그랬듯.

"얘들아, 굴 좀 먹어봐. 이 맛있는 걸 왜 안먹니?"
"윽,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 맛만 있는데. 그리고 이 굴이 얼마나 영양가가 많다구."
"진짜요? 뭐가 좋은데요?"
"음… 피가 맑아져."

어린 시절 엄마에게 들은 것이 생각나서 얼른 대답했다. 굴을 한 입 베어 문 조카아이가 말하길,

"어? 갑자기 기분이 막 좋아지려고 그래요."
"어? 그래? 왜?"
"피가 막 맑아지고 깨끗해지니까 몸이 가벼워지고 날아갈 것 같아요."
"뭐라구? 하하하."

굴은 금세 바닥이 났다. 괜히 얘기했나?

▲ 고춧가루, 생강, 새우젓, 소금, 마늘, 깨소금 등의 양념 입장
ⓒ 안소민

▲ 굴과 무의 환상적인 조화.
ⓒ 안소민
저녁모임에서 돌아오신 어머님은 내가 해놓은 굴무채를 보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으셨다.

"아줌마가 오늘 잡았다고 가져왔는데 보기엔 제법 싱싱해 보이더만 어떠냐? 굴 괜찮든?"
"네? 네…."

어머님이 사오신 굴은 이미 그 운명을 달리했는데 우짤꼬. 이 일을 어떡해야 하나. 그냥 말씀드릴까 아니면 덮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용단을 내렸다. 설마 쫓겨나기야 하겠는가.

"저, 어머님… 저…."
"무슨 일이냐."
"사실은요… 이러저러해서 어쩌구저쩌구해서…."

이야기를 듣고 계시는 어머님 얼굴에 복잡 미묘한 표정이 스치더니 나중에는 점점 웃음이 번지신다.

"아이구. 난 또 무슨 일이라구. 잘했다. 잘했어. 그게 뭐 큰일이라구."
"어머님, 죄송해요."
"죄송할 거 없다. 누구든 맛있게 먹었음 된 거지. 다 먹었으면 내일 또 사서 담그면 그만인데 무슨 걱정이냐.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

휴우… 아마 굴의 신(神)이 도왔던 것이 틀림없다.

▲ 시원한 굴무채 한입 드셔보실래요
ⓒ 안소민
그 다음날.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

"그렇게 먹고 싶었으면 얘길 하지."

만져보니 물컹한 게 예사롭지 않다. 굴이다. 횡재했다. 이걸로 초고추장에 마음껏 찍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연이어 들어오신 아버님도 무언가를 가지고 오신 것 아닌가. '설마, 굴은 아니겠지…' 하는 순간, 벌써 후각으로 신선한 내음이 느껴진다. 이게 웬 대박인가. 아버님은 봉지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아가, 굴이 그렇게도 맛있더냐? 많이 먹거라. 많이 먹어."

나는 감사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그냥 웃고만 있었다. 이 굴로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굴무채를 많이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바야흐로 굴의 계절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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