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풍수 왕릉보다 태실에 명당이 많은 이유 문종 태실이 있는 명봉사를 돌아본다…왕릉은 성형미인격 | ||||||||
백두대간 자락 경북 예천군과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촛대봉(1,081m) 산자락,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있다.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절 오른편 숲속에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유형문화재 제3호)가 현존하고 있어 명실공히 천년고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조선의 왕릉에는 명당이 없다
이에 비해 왕가의 태실은 팔도를 대상으로 명당을 찾았고, 또한 태실이 차지하는 면적이 비교적 적으므로 당시의 지관들이 풍수지리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터를 구했기 때문에 왕릉보다 오히려 명당인 경우가 아주 많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분포된 수백 개의 태실터를 찾아 풍수공부를 하면 형기풍수는 물론이고 풍수이론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왕릉은 문화재 차원에서 가치는 높지만 풍수 공부를 하기로는 태실지가 더욱 좋은 현장 교과서가 된다. 왜냐면 골동품도 진품을 보아야 진품을 알아볼 수 있듯이 기존의 명당을 보아야 명당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즉 가짜만 보면 가짜라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진품을 보고도 진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의 왕릉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일부 묘를 제외하면 외견상으로는 아주 그럴듯해 명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릉은 혈장(穴場·묘를 쓰는 장소)을 인위적으로 보기 좋게 만든 소위 성형미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성형미인인 만큼 겉보기로는 좋겠지만, 그 자손이 미남미녀로 태어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형기풍수지리에서는 용(龍), 혈(穴), 사(砂·주변의 산세), 수(水)라고 하여 이 4가지 조건을 모두 잘 갖추어야 명당이 된다. 이중에서도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용과 혈은 사와 수에 비해 더욱 중요하고, 또한 사와 수는 인위적으로 길상(吉象)으로 변화가 가능하지만, 용과 혈은 인위적으로 길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풍수지리에서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대개의 경우는 용이 좋아야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용은 부모에 비교되고 혈은 자식에게 비교되어 부모님이 훌륭하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그 자식도 역시 훌륭하게 되듯이 대개는 용이 좋으면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용은 기복하고 굴곡하고 내려오는 모습이 살아있는 용처럼 내려오면 진룡(眞龍)이 되는데, 대부분의 왕릉은 진룡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혈만 좋게 보인다. 그 이유는 능을 조성할 당시에 막대한 인원과 시간을 동원해 혈을 보기 좋게 조성했기 때문이다. 성형한 명당(?)인지, 아니면 천연적인 명당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내룡을 보고 판단하고 다음에는 혈장 주위를 돌아보면 비록 수백 년 전에 조성된 능이라도 유심히 살펴보면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왕릉은 풍수지리 공부를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당시의 왕릉을 감정하므로써 왕과 왕손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아내는 데에는 조선실록 등의 좋은 사료가 많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대군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 풍수적 사연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1462∼1530년)는 1530년(중종 25년)에 69세로 죽었기 때문에 중종의 왕위등극과는 상관이 없고, 유독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세종 19-연산군 10)의 왕릉이 인수대비의 손자인 중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조상의 묘로 인한 풍수지리적 길흉화복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이론을 분방법(分房法)이라 하여 같은 조상에 같은 자손이라도 길흉화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방법 이론은 풍수학파별로 다양하지만 현공풍수이론의 분방법은 적중률이 아주 높지만 부작용의 소지가 많은 점이 있어 이곳에서 공개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하기 바란다. 인수대비는 조선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의 아내로 1455년(세조 1)에 세자빈에 간택됐으나 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20세에 병사한 관계로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못했다. 하지만 성종 때 왕후에 추봉되고, 이어 인수대비에 책봉됐다. 인수대비의 손자인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사사(賜死)됐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된 신하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꾸짖으니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는 사건이 있은 얼마 후 승하하니 춘추 68세로, 서오릉의 경릉에 안장했다. 인수대비가 안장된 경릉은 중종과 동기감응이 되는 능이기 때문에 인수대비의 경릉을 현공풍수법으로 감정해 중종의 운명을 추론할 수 있다. 인수대비는 1504년(8운 1년차)에 계좌정향(癸坐丁向·195도 내외)으로 안장했다. 인수대비를 안장한 경릉의 좌향과 조성시기를 근거로 현공풍수이론을 적용해 택명반을 작성하면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다만 택명반 작성하는 방법은 복잡하므로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홈페이지(www.koreafengshui.net)를 이용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이미 작성된 택명반으로 길흉을 감정한다. 낙서(洛書)에서 ‘5’는 절대권력 의미
택명반을 보고 추론하는 방법은 1운 20년동안은 주로 향궁의 ??①五, 중궁의 65一, 좌궁 29六의 3개의 궁에 배치된 숫자를 위주로 감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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