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천호산(天護山, 원래 이름은 황산)에 짓기 시작하여 23년 12월에 완공한 화엄종 사원이다. 개태사가 자리잡은 곳은 원래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일리천(一利川) 전투의 주요한 전장이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나당연합군과 계백이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던 황산벌과도 인접하였다. 후삼국 통일 직후 후백제의 견훤이 황산(黃山,지금의 연산)의 작은 절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절이 개태사자리라는 설도 있다. 태조는 후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를 기념하고자 최후의 전승지 자리에 개태사를 세웠는데, 여기에는 후백제의 자취를 없애고, 후백제민을 위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더 나아가 하늘의 도움을 입어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통일의 시대를 열어간다는 의미를 상징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하늘이 수호하셨다는’뜻의 산 이름인 천호(天護)와 ‘태평한 시대를 연다’는 뜻의 절 이름인 개태(開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절에는 나중에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眞殿)이 세워져 왕실의 조상숭배를 통해 왕실을 보호하는데 있어 특별한 기능도 담당하였다. 고려가 홍건적과 왜구에게 시달렸던 공민왕 11년(1362)~12년에는 이인복(李仁復)을 개태사의 태조 진전에 보내어 그곳에서 천도와 환도의 길흉을 점치어 묻게 하였고, 고려 멸망 직전인 공양왕 3년(1391)에는 태조 진전에 제사를 지내고 옷과 옥대를 바친 기록이 있다.
한편 주지 임명 사례를 살펴보면 고려 전기인 예종(재위 1105~1122) 때에는 예종의 동생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澄儼)이 교종(敎宗)의 최고 승계인 승통(僧統)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지를 맡을 정도였으나, 고려 말인 우왕(재위 1374~1388)때에는 두번째로 낮은 대사(大師) 급이 주지를 맡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같이 개태사 주지의 승계가 하락한 까닭은 고려후기에 화엄종 세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어 고려 불교계내에서 개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기에 비해 낮아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개태사(開泰寺)는 태조의 진전이 있어 왕실과 관련한 길흉을 점치고, 제사를 지냈을만큼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중요한 사찰이었다 |
| | | | 개태사는 극중 신돈,큰스님,보우스님,반야를 이어줄 매개체가 됩니다. (辛旽 5回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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