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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즉위와 기씨세력

공민왕 즉위와 기씨세력
공민왕이 충정왕의 뒤를 이어 고려 국왕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기황후와 직결된 기씨세력이 알게 모르게 공민왕을 지지한 점도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우선 충정왕이 폐립되는 사건 자체가 원나라 황실의 실권자였던 기황후의 개입없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보아도 첫째, 공민왕의 즉위를 알리고 충정왕으로부터 옥새를 거두어 강화로 보낸 원나라 사신 올제이부카(完者不花)는 기철의 조카인 기완자불화(奇完者不花)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씨 일가는 공민왕 즉위를 강행하는 원나라의 조치에 사신으로 참여한
셈이다.

둘째, 기씨는 고려에서 유력한 가문이 되면서 다른 유수한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데,
기철의 조카인 기인걸(奇仁傑)과 이제현의 손녀, 기철의 딸과 왕후(王煦)의 아들
왕중귀(王重貴)가 결혼하였다. 이같은 혼인관계의 영향으로 기씨 일파는 당시의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해 신중하게 대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부원세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항상 같이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이러한 혼인관계는 공민왕을 지지하던 왕후나
이제현의 입장에 기씨 일파가 어느 정도 동조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셋째, <고려사>에 의하면 공민왕은 원나라에서 머무는 동안에 단본당(端本堂)에서 황태자를 시종하였는데, 단본당은 원나라 순제가 기황후 소생의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를 위해 건립한 것이었다. 공민왕은 아유시리다라를 시종하면서 기황후를 비롯한 기씨 일파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원나라와 기씨 일파가 공민왕 즉위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공민왕이 기철 등을 죽이고, 반원정책을 단행했을 때 기황후가 격분하였는데,
이는 기씨 일파가 공민왕을 지원하였으나 오히려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데에도 주요한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성부원군 기철(左)과 그의 누이 기황후(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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