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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석(滿花方席)이던 화려한 꽃 거개가 지고 푸른 녹음이 천지를 기분 좋게 가리고 있다. 신록이 우거지니 이제 달포 녹음방초(綠陰芳草), 만화방창(萬化方暢) 시절이라 지화자 좋다. 높은 데서 숲을 내려보니, 조물주가 아무도 모르게 '사알 살' 날마다 수채화 물감을 옅게 풀어 욕심 부리지 않고 덧칠을 하니 볼 때마다 새롭다. 물먹은 가지는 낭창낭창 휘어지며 제 몸을 불린다. 도시에 갇힌 사람들 마음만 벌써 천방지방 지방천방 들뜨니 부화뇌동(附和雷同) 끝과 시작은 어드메요? 실바람에도 샛노란 소나무꽃가루 천지를 뒤흔들어 흩뿌려놓으니 우리 몸은 날아갈 듯 가볍다. 울긋불긋 옷 차려입고 산들바람에 콧노래를 부르며 산모롱이 비집고 들어가면 제비초리만한 자잘한 나뭇잎이 반가이 맞이한다. 상춘곡(賞春曲) 골짜기마다 울려 퍼지매 '흠흠흠' 봄을 들이키고 향을 마시는구나. 오늘은 결코 다래순, 홑잎, 고춧잎, 뽕잎, 오갈피싹, 옻순엔 한눈을 팔지 말자. 어젯밤 꿈자리가 좋았더라도 밑바닥 산삼뿌리 만나기 쉽지 않으니 거창한 몽상일랑 버리고 애오라지 한가지에만 매진하자. 진달래보다 며칠 이른 땅두릅 땅 속에서 고개 내미네
한 자리에서 예닐곱 개가 넘는 나무도 아닌 두릅이 지표면보다 약간 위에 서서 칼로 도려내 주길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맛일까? 오살나게 두꺼워 그냥 먹기가 꺼림칙하다. 두 쪽으로 나눠볼까. 부글부글 끓는 물에 굵은 소금 던져놓고, 한 번 더 바글바글 끓으면 후딱 건져 겉과 속이 매한가지로 설컹설컹한 느낌에서 멈추도록 찬물에 헹궈버리는 거야. 흠흠 코를 벌름거리지 않아도 조건반사인가. 제 알아서 향기를 빨아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우린 벌써 후각으로 한번 먹었다. "초고추장 어딨어?" 괜스레 정갈한 향기에 초를 칠지 모르니 그냥 시골집에서 담근 맨 찰고추장에 찍어볼까? 자 그럼, 한 입 "쏙∼" '뭐야 왜 이리 부드러워. 씹을 일도 없잖아.' '안 되겠어. 볼품없이 이 좋은 걸 그냥 먹는다는 건 봄나물 산나물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집으로 가져와 제대로 된 나물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막걸리도 어떤 향도 첨가하지 않은 누룩 맛이 약간 도는 누리끼리한 것 한 되 받아가기로 했다.
5분 후 도착한 집엔 물이 끓고 있었다. 한 뼘 가까이 되는 땅두릅 예닐곱 개를 칼로 반쪽으로 나눴다. 티끌만 털어내고 물에 잠기게 불을 다시 높여 팔팔 끓였다. 3분 여 지나 건져 물기가 쪽 빠지며 김이 날아가도록 엉기지 않게 한다. 그 사이 마늘을 찧고 깨소금 꺼내놓고 고춧가루와 참기름 대령이다. 옆지기도 이젠 내 눈빛만 봐도 간장을 내야 할지 그릇을 줘야 할지 어림짐작은 할 줄 아니 세월이란 참으로 명약이다. 너른 그릇에 오복이 놓고 조물조물 무친 다음 고소한 참기름 끼얹어 뒤적이니 정말이지 훌륭한 반찬이다. 사발에 막걸리 따르고 김 모락모락 나는 밥 한 술에 한 가닥 집어먹으니 거북하지 않게 향취가 고루 퍼졌다. 커갈수록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먹어댄다. 막걸리 한잔 마시니 나른한 봄날 저녁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는 기분이다. 하룻밤을 그렇게 보내니 땅을 걷고 얻은 수확과 먹어주니 몸이 알아차리고 깨어나 다음 날 아침 가뿐하였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으뜸으로 치는 개두릅 납시오
"엄나무싹 좀 먹으려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따라 오시래요." 그냥 밭에서 키운 것이나 집에 미리 따다놓은 것을 몇 개 주는 걸로 착각했다. 촌로가 나그네를 데리고 간 곳은 골짜기 초입이다. 손짓을 하며 "저 골짜기로 들어가면 있을 거래요"라고 한다. 불친절한 사람이었다면 아는 체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골짜기까지 알려주는 심성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접근하는 길에 옷을 금방이라도 찢어버릴 듯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간신히 사정사정해서 내 옷자락을 되찾았다. "가시가 있는 것은 모두 약이여"라는 어른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허나, 어쩌랴. 눈앞에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는 나뭇가지에 싹눈이 날 자리마다 강원도 사람들이 참두릅이나 오가피싹보다 더 쳐주는 개두릅이 우릴 조롱하고 있으니 예서 물러설 수는 없다. 마음을 단단히 챙기고 가시와 전쟁을 벌일 각오를 다졌다. 다만 첫 느낌만 쓸 뿐 먹을수록 첫 입맞춤처럼 달콤하지는 않지만 시원하고 깔끔한 원시의 순수함을 맛볼 생각을 하니 염장에 몇 마력 발동기를 단 듯 용솟음친다. 나무줄기를 가까스로 붙잡아 조심조심 내 옆으로 당기고는 측아(側芽)를 하나둘 따서 윗주머니에 담았다.
'저 놈을 따야 그래도 먹은 기분이 나잖아.' 늘 이렇듯 나도 인간인지라 먹는 탐욕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마음을 다독이고는 재차 도전에 들어갔다. 갈고리나 낫이라도 있었으면 가시덩이를 확 채서 당기면 그만이지만 앞선 마음에 달리 도리가 없지 않는가. 기어이 제법 큼지막한 걸 땄다. "휴∼" 기운이 좀 빠졌지만 벌써 요령이 생겼는지라 두려울 것도 없다. 나무가 끄는 인력을 파악하였다. 몇 군데 찔리고 찢겼지만 처음보다는 한결 수월해 30여 분 매달리니 쓰고 간 모자로 가득하다. 이 정도면 내 장에 낀 묵은 때 고기기름을 덜어내는 데는 충분한 양이다. 더 헤맬 일도 없다. 집으로 달려와 끓는 물에 넣었다가 곧바로 건져 고추장에 찍으니 살맛이 났다. 새로 돋는 가시마저 잇몸을 살살 건드리는 품새가 좋은 건 천천히 먹으라는 가르침까지 주는 거다. 먹을수록 당기며 잠자던 영혼이 깨는 듯한 착각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건가. 하산 길에 두릅 데쳐 막걸리 한잔에 두릅 먹는 신선이 되다
식당에 나오는 참두릅은 삶을 때 향기를 일부러 죄다 빼서 버렸는지 원래 그 맛이 없어 한번 먹어볼까 망설이다가도 결국 먼 산 바라보듯 하고 만다. 알고 보니 바쁜 아주머니가 푹 삶은 게 한 가지 요인이고 그 다음은 하우스에서 물 비료를 듬뿍 줘가며 길러서 그렇단다. 민 두릅은 가시가 없어 따기는 편하지만 그다지 맛을 당기지 않으니 오늘은 우리 산야 물기가 가득한 잘록한 골짜기 패인 곳으로 진달래 꽃 쏙 빠지고 철쭉 부풀어오르던 날 여행을 떠난다. 절대 '잣나무 밭에는 들어가지 말라'는 1급 비밀을 누설한다. 피톤치드가 많은 침엽수인 소나무와 낙엽송, 전나무, 구상나무 따위 수목 아래에서는 적당히 하늘이 열림은 물론 송진이랬자 여타 아래층에 있는 관목이나 그 아래 있는 나물이 자랄 수 있는 터전을 터주기도 하며 결코 죽이기까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요놈의 잣나무 숲 아래는 해가 거의 들지 않고 가지도 비바람과 눈에 쉬 찢어지는데 진을 어찌나 질질 흘려대는지 그 아래에 있는 대부분 생물은 한마디로 초토화되기 때문에 눈을 씻고 찾아야 가물에 콩 나듯 하기보다 나물을 만나기 힘들다. 밭가에도 더러 있지만 이건 필시 누군가 심어놓았을 테니 건드리지 말고 골짜기 깊숙이 운동 삼아 오른다. 줄기가 다소 하얗기에 멀리서도 금세 눈에 띈다. 등성이까지 오를 일도 없다. 비탈진 산자락에 한 개를 발견하면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한 가지에 몇 개 달리지 않아 아쉽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따자마자 진액을 밖으로 밀어내 상처를 어루만지는 치유력 앞에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매사 동식물이 학대당하는 것만 생각하고는 세상만사 굶어죽으라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다만 줄기째 자르거나 옆에 달린 작은 것을 모조리 따지 않은 걸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바삐 따다보니 허기가 밀려온다. 차츰 봉지가 처지더니 도톰한 것이 쏠쏠하다. 사람을 불러 내려가기로 했다. 산자락 하나는 훑었으니 무얼 먹은들 맛나지 않을손가. 바짝 침도 마를 때 석간수 한 모금 축이고 내려오니 저 멀리 외딴 식당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옳지! 저기 가서 목이나 축이고 가야겠다.' "우리 저 식당에 가서 한잔하고 갑시다. 안주도 좋은데…." "그러죠. 아주머니께 몇 개 삶아 달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꼭 어느 지역은 그런 걸 안 한단 말입니다. 지난번 철새 구경 갔을 때 쑥국 끓여 달랬더니 그냥 쑥 가져 가라잖아요." "그랬지요. 그런 집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아주머니, 이거 살짝 데쳐주세요." 흔쾌히 응하니 단골로 삼아도 되겠다. 물이 끓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풋풋한 향기를 머금은 두릅이 접시에 예쁘게 담겨져 있고 초고추장까지 뒤따라 나왔다. 술술 넘어가는 막걸리 한잔을 꼴깍꼴깍 들이켜고 한 점 빠알간 양념에 찍어 씹었다. 같이 간 맛 객은 손톱으로 깐 더덕을 네 쪽으로 나눠 접시에 올려놓는다. 이 또한 신선의 경지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매력이요, 재미다.
자연산을 기준으로 개두릅은 첫 느낌만 쓸 뿐 먹을수록 시원하고 순수한 맛이다. 씹는 맛도 일품이다. 참두릅은 땅두릅과 개두릅의 중간으로 무난하다. 가장 늦게 나서 오래 간다. 땅두릅은 다소 무르며 텁텁하고 떫은맛이 강한데 무치면 해결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나와 일찍 사라지고 마니 서둘러야 한다. 부드러워 이가 성하지 않은 사람도 먹는데 문제가 없다. 각기 맛이 차이가 있지만 산신령이 굳이 한 가지만 고르라면 나는 개두릅(엄나무)을 먹겠다. 역시 개살구, 개똥참외, 개복숭아가 내겐 맞는가 보다. 마침 며칠 추웠다가 비가 내리니 한꺼번에 먹을 생각에 마음은 벌써 산골로 향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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