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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고향 강원도는 이제야 봄입니다. 옮겨 심어 몇 년째 제 빛깔의 꽃을 피워내지 못하던 산수유가 올해는 제법 노오란 눈을 뜨고 봄이 이제야 왔다고 알려줍니다. 밭두렁에도 온갖 잡초들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한여름에는 김을 매주느라 그렇게 밉게 보이던 잡초들도 이런 봄에는 싱그럽고 기특하기 그지없습니다.
꽃 잔디 피다 오랜만에 내려간 고향 집 마당에는 꽃 잔디가 저 혼자 피어 심심한 봄볕을 쬐고 있었습니다. 몇 해 전, 네댓 포기 모종을 사다 심었더니, 그 녀석들이 마당 가로 이어 퍼지면서 이제는 제법 무성한 티를 냅니다. 해마다 먼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려주더니, 올해는 제 땅에서 몇 걸음 떨어진 마당의 자갈 틈새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자랐습니다. 흙도 제대로 없는 돌 틈에서 자란 녀석들이 안쓰러워 조심조심 피해 다녔는데, 글쎄 그 돌 틈의 녀석들이 먼저 꽃을 피웠습니다.
함께 내려간 신 선생이 놀란 소리를 지르며 꽃 잔디 앞에 쪼그리고 앉습니다. "거친 땅에 뿌리내린 식물일수록 먼저 꽃을 피우는 법이지. 얼른 꽃 피우고 씨 맺어 제 자손을 퍼트려야 하거든." 내 말에 여린 꽃송이를 들여다보며 신 선생이 중얼거립니다. "생존의 본능이군요." 그렇습니다. 작은 꽃 한 송이에도 삶의 이치가 담겨 있는 법이지요. 겨우내 매서운 바람에 맞서야 저렇게 곱고 여린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 봄날. 햇볕조차 유난히 따사롭습니다.
밭 귀퉁이에서 제일 먼저 파가 돋아납니다. 주말 얼치기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올해로 육년째입니다. 둘째 해에 파를 심었으니, 녀석들은 오 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 자리에서 어김없이 싹을 틔운 것입니다. 심어놓고 파랗게 돋아난 윗부분을 잘라 양념을 만들고, 김치 담글 때도 썼는데, 아무리 잘라 먹어도 녀석들은 이내 다시 돋아났습니다. 겨울이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가 이른 봄이면 다시 세상에 뾰족뾰족 새 잎을 내밀곤 했습니다.
나는 쑥을 캐내고, 아내는 캐낸 쑥에서 잎을 뜯어냅니다. 어떤 쑥은 얼마나 무성하게 뿌리를 뻗었는지, 파까지 파내야 할 정도입니다. 작년의 묵은 쑥 대궁(대의 방언)에 엉켜 다시 돋아나는 쑥도 있습니다. 뿌리를 캐내면 흙이 한 무더기 달려 나올 정도로 쑥 뿌리는 사방에 뻗어 있습니다. 그냥 두었다가는 파 밭인지 쑥 밭인지 모를 정도가 될 게 뻔합니다. 한참 쑥을 캐다 문득, 이렇게 지천으로 널린 쑥이야말로 어렵던 시절 민중의 삶을 가능하게 했던 귀중한 먹거리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우내 저장해 두었던 먹을거리도 다 떨어진 봄날, 쑥마저 돋아나지 않았다면, 주린 배를 채울 무엇이 있어 궁핍한 우리 조상님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요? 파내도 파내도 다시 돋아나는 쑥의 끈질긴 생명력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삶의 끈기였을 것입니다.
제비꽃도 피고, 원추리도 돋고 아침, 산발치(산의 아랫부분) 묵밭에 가봅니다. 몇 해째 묵고 있는 밭에는 꽃다지 꽃이 한창입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온갖 꽃들이 뒤섞여 있습니다. 양지꽃, 알록제비꽃, 별꽃들이 풀숲에 숨어 여린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야생 달래도 숨어 있습니다.
나는 몸 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숨을 크게 내쉬어 봅니다. 세상의 온갖 잡사에 얽매여 있다, 이렇게 숨 한 번 몰아쉬기 위해 찾아오는 고향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습니다.
원추리는 연한 순을 잘라 나물로 무쳐 먹을 수 있습니다. 나물로 먹는 원추리는 넘나물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까지 잘라 먹어도, 원추리는 잘린 자리에서 다시 잎이 돋고, 꽃대가 나옵니다. 그리고는 크고 고운 꽃을 피워냅니다.
아침상에 무쳐 내 온 원추리는 조금은 달착지근하고 조금은 덤덤하고,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씹는 맛이 제법입니다.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면, 아삭아삭 소리가 마치 봄이 오는 발자국 소리처럼 들립니다. 아침을 먹고, 집 뒤 원추리를 찾아가 봅니다. 순을 잘린 녀석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습니다. 그 모습이 꼭, 자신을 잘라먹은 나를 원망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갑자기 원추리들에게 미안해졌습니다. 꽃 대궁을 길게 뻗어 주황색 꽃을 피워 올리고, 바람결에 몸을 흔들어댈 원추리 꽃을 떠올리자 더 미안해졌습니다. 톡 톡 두드려 보았다. 숲 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투드리면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삼한(三韓) 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신동엽 시인의 <원추리>라는 시가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한 송이 꽃에도 역사가 있음을, 시인의 맑은 눈은 찾아낼 줄 압니다. 나는 그저 원추리 순을 잘라 먹었을 뿐, 원추리 속에 담겨 있는 역사를 찾아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저 입 안 가득 배어 있는 원추리의 향, 봄의 내음을 원추리를 보며 기억할 뿐입니다. 싹 돋은 원추리 곁에는 막 피어나는 진달래와 개나리가 곱습니다. 이 깊디깊은 강원도 산골짝에도 정말 봄이 오기는 온 것입니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해 봅니다. 들이마시는 공기 속으로 풋풋하고 상큼한 봄 향기가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온 몸이 공기를 가득 머금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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