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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미래촌생활강좌 제196강 080214(목) : 우리노래/이성원 가수(노래사람)

순수의 메아리 된 우리가락 우리소리

불혹의 나이에 동요음반을 발표한 포크가수 이성원. 흔치 않은 동요 가수로 대중들은 그를 기억하지만 사실은 곽성삼, 김두수와 더불어 1980년대 3대 언더 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는 아티스트다.

덥수룩한 수염에 치렁치렁한 장발은 기인의 향내를 풍기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순응하는 외견일 뿐 실은 맑은 영혼으로 노래하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다.

그는 포크로부터 출발해 국악과 민요, 동요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노래해 왔다. 최근 동요가수로 제법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화려한 주류무대와는 여전히 거리를 두고 그저 자신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돈 안되고 소박한 무대만을 찾아 나서는 별난 사람이다.

그의 동요는 기억 저편에 실종된 어릴 적 추억과 다정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되살려놓는 마력을 지닌 가락이다. 똑같은 동요도 그가 부르면 가슴이 시려온다. 그래서인가 그의 동요가락은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오히려 즐겨 듣고 눈물을 훌쩍인다.

이성원의 노래 가락은 살벌한 생존경쟁사회에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아침 이슬 같은 무균질의 결정체이다.

이성원은 1961년 4월 5일 경남 진해에서 지방지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석곤과 모친 김기연의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당시엔 갖기 어려웠던 전축을 갖춰놓고 재즈 등 흑인 음악을 즐기고 노래자랑대회에서 입상을 했을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 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윤택한 집안의 외아들 이성원이 음악의 달콤함을 일찍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진해 도천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물동이를 지고 가면서 바람에 부대끼는 뒷산 대나무 소리 등 온갖 자연의 소리가 좋았던 이성원. 4학년 때 하모니카를 가르쳐주신 고정엽 선생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부친이 황달과 고혈압으로 일찍 세상을 등지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어머니는 모진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네 자녀를 키웠다. 진해 중학교 때는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업 중에 집으로 쫓겨와 정학까지 먹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만도 기적이었다.

같은 처지의 여동생은 등록금을 내지 못해 졸업장 없는 졸업생이 되었다.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현실에 순응했다. 진해상고 3학년 때 친구 집에서 우연히 접한 통기타소리는 답답한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졸업 후 신문, 우유배달과 가구점 일꾼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우유 배달 중에 어려운 노인이나 아이들을 만나면 우유를 거저 나눠주고 신문 배달 때는 못된 20명의 불량배들과 한판 대결을 벌였을 만큼 정 많고 의협심 넘치는 청년이었지만 일꾼으론 미덥지 못했다.

1981년 해태유업에서 전국의 직원을 대상으로 장기자랑대회를 열자 노래로 1등을 해 상금으로 빚진 우유 값을 갚고 나왔다. 이후 세광전지의 지점에 사무직으로 취직해 1년간 근무했다. 어느 날 ‘합창단을 조직하라’며 본사로 부터 기타가 지급됐다.

독학으로 기타연습을 하고 있던 터라 무엇보다 반가웠다. 그러나 업무 시간에 몰래 회사 공중목욕탕에서 매일 기타를 튕기자 구내매점 주인이 고자질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났다. 이후 음악적 방향도 없이 그저 노래가 부르고 싶은 마음에 카페들을 방랑하며 노래 아르바이트를 했다.

결국 가수가 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DJ 이종환이 운영하는 명동 쉘브르의 노래경연대회에 참가했지만 떨어졌다.

이후 무명 통기타 가수로 소일하다 빚을 내 이화여대 정문 앞에 ‘쉼표’라는 카페를 열었다. 영화사 ‘신씨네’의 신철과 배우 명계남 등 신촌 쪽에서 놀던 특이한 연예인들이 당시 내 카페를 아지트로 삼고 드나들었다.

카페를 작은 공연장으로 삼아 마음껏 노래하며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며 이성원은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당시 김민기, 한대수, 송창식, 양희은 등이 부른 노래 전곡을 ‘파 들어가며’ 연습했다.

하지만 양희은이 불렀던 김민기 곡 <밤뱃노래>속의 전통가락이나 특히 <진주난봉가>의 구수한 우리 가락이 가슴을 파며 스며 들어왔다. ‘내가 무엇을 노래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우리가락을 노래해야 한다는 답을 얻었던 시기였다’고 이성원은 회고한다.

1985년 어느 날 봉은산에 별을 보러 올라갔다 죽을 고비를 넘겼다.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신기하게 움직이던 별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정신을 잃고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코밑의 상처는 그때 입었고 한동안 거동조차 할 수 없었다’고 이성원은 말한다. 기이한 경험은 1집 수록곡 <선인장>의 악상이 갑자기 떠오르며 창작의 물꼬를 터트렸다.

고품격의 우리가락 지킴이

이성원은 1986년 정기적인 개인콘서트를 크리스탈 문화센터에서 열며 자신의 음악빛깔에 덧칠을 해나갔다. 창작곡으로 꾸며진 데뷔음반<문을 열고 나서니-아세아,1987년>은 제작사의 야심에 찬 홍보전략으로 제법 촉망 받는 인기가수의 꿈을 키우게 했다.

그러나 방송국 PD에게 촌지 봉투가 오가는 것을 보자 음악보다 돈이 우선하는 현실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1집은 이성원의 국악적 향내를 철저하게 지워내는 편곡으로 제작된 평범한 앨범이었다.

그는 ‘솔직히 음반을 낸다는 욕심에 상업적으로 타협했다’고 고백한다. 이후 상업적인 음악활동과는 거리를 두며 우리가락을 포크와 접목하는 음악실험에 몰입하며 즉흥 창작 무용곡에도 빠져들었다. 1988년 겨울 평택에서 새벽 산책을 나갔다가 동화처럼 신기한 경험을 했다.

소들이 숨쉴 때마다 내뿜는 하얀 김이 장관을 이루자 만져보고 싶어 다가갔다. 소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나자 돌아서기 섭섭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자 흩어져있던 소들이 신기하게도 스스로 뿔을 들이대거나 혓바닥을 내밀며 몰려들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자 우리 가락은 자연과의 교감이 가능하다는 가슴 뻐근한 감동이 밀려왔다.

신비로운 경험은 더욱 자유로운 음악 날갯짓으로 1989년 첫 국악 가요 발표회로 이어졌다. 2집<나무밑에서-서울음반,1991년>은 자신의 음악색깔을 고스란히 담은 사실상의 데뷔 음반이다. 이정선이 편곡작업을 거들고 김두수는 기타 세션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한편의 시나 다름없는 수록곡 <밭>의 절제된 가사는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심의에 걸렸다. ‘2집 발표 후 골수 팬들이 생겨나 지금까지 묵묵하게 도와주는 후원자가 있다.

올해 발표한 2장의 신보도 그 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말하는 이성원. 수록곡 <보아라 수야><구름타령><밭>은 1980년대를 수놓을 만한 한국적 가락의 정통 포크곡들이다.

오선지의 틀조차 깨기 위해 한 음 한 음 직접 기타 줄을 튕기며 곡을 만드는 그의 창작작업은 독특하기만 하다. 이성원은 2집 발표 후 활기찬 활동으로 국악가요의 영역을 넓혀 나가던 중 1993년 인도의 명상음악과 조우하는 음악적 전환점을 가졌다.

‘제 3세계음악의 폭풍'이라 불리며 미국과 유럽을 발칵 뒤집었던 인도의 세계적 거장 라즈니쉬와 아쉬람 현지 공연에서 인도 라가풍의 명상음악과 우리민요가락의 충돌은 황홀한 불똥을 튀게 했다. 이때부터 이성원은 인도음악에 대한 관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1996년 어느 날. 일본의 한 유명가수가 그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왔다. 우리가락을 배우겠다는 열의가 예뻐 음악을 가르쳐 주었지만 그의 음악을 도용해 음반을 발표해 버렸다. ‘동양의 매력을 내뿜는 새로운 작품’이라며 일본 음악계가 들썩했다.

일본에 초청돼 오사카에서 함께 공연하면서 자신과 우리 음악을 도난 당한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성원은 ‘나는 역사를 바꿀 힘은 없지만 노래로 표현할 힘은 있기에 답답한 패잔병의 유산이 청산될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동요를 부르게 되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사석에서 노래할 땐 언제나 동요를 부른다. <엄마야 누나야> 등이 수록된 1999년 첫 동요음반<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도 어느 조촐한 자리에서 그의 동요를 듣고 감격한 사람들이 강력하게 음반작업을 추진해 맺은 결실이다.

올 초 두 장의 음반을 동시 발표했다. 먼저 3집<동쪽 산에>는 2집 수록곡들을 재해석하고 사물놀이의 신명과 휘모리 장단을 현대적 기법으로 채색한 국악 포크 음반이었다.

그리고 두번 째 동요집<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에 수록된 티없이 맑고 시린 목소리로 들려주는 <클레멘타인>으로 더욱 대중들에게 다가섰다. 최근 그는 수많은 동요공연과 환경운동 팀과 함께 전국을 도는 환경공연을 3개월간 벌였다.

또 5월 부처님 오신날 성북동 길상사에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정태춘, 박은옥과 함께 했던 탈북자를 위한 자선공연과 동부 이촌동 강변교회에서 기독교 신자들을 위해 노래했던 찬송예배 공연은 뜻 깊고 이색적인 자리였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그는 모든 종교인들의 화합을 위해 정성스럽게 노래해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성원은 ‘동요는 내 많은 음악 보따리 중 한 주머니일 뿐’이라며 인도명상음악과 우리 전통가락을 아우르는 작업에 큰 갈증을 드러낸다.

그는 요즘 ‘한국 포크의 정신 김의철 선배와 전통가락을 파고드는 포크 음반작업을 꼭 한번 해보고 싶다’며 고 품격의 한국가락을 꿈꾼다. 잊혀져 가는 동요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불어넣는 가난한 노래꾼 이성원은 한국 대중가요를 살찌우게 할 또 하나의 희망이 아닐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말레이시아 공식 초청 국내 1호 가수가 된 동요포크가수 이성원

통기타 동요로 말레이지아 꿈의 무대에 서다

지난해 말 한국 대중 가수로는 처음으로 김수철이 UN본부의 기념식 무대에 초청됐다. 86 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한일 월드컵 등을 통해 국악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온 그가 ‘전자기타 산조’라는 대중 음악 어법으로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국악의 세계를 선보여 "한국 대중음악의 또 다른 지평을 외국에 알렸다"는 호평을 이끌어 냈다.

그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은 지난 1월 말. 이번에는 국악을 통기타에 담은 이성원의 공연이 동남아에서 열렸다.

‘80년대 3대 언더그라운드 포크 가수’로 불리는 이성원은 말레이시아 왕실이 지원하는 국제문화재단 SGM의 공식 초청으로 수도 콸라룸프르의 유일한 예술극장 이스타나 부타야에서 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 동안 두 차례공연을 가졌다. 한국의 대중가수가 공식 초청을 받고 말레이시아 최고의 무대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류 열풍의 주역 안재욱이나 국민가수 조용필에 비한다면 차라리 무명에 가까운 이성원이 아시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국제적 문화재단 SGM(Soka Gakkai Malaysia)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말레이시아 최고의 예술극장 '이스타나 부타야'는 클래식과 세계 유수의 뮤지컬 그리고 품격 높은 3세계 문화공연을 주로 소개, 우리의 세종문화회관과 비슷한 위상의 공연장이다. 현지의 대중음악인들조차 "이 무대에 한번 서 보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할 만큼 꿈의 무대이다.


타국서 인정 받은 언더 포크 가수

비록 이성원이 김두수, 곽성삼과 더불어 소위 80년대 3대 언더포크가수로 가요 마니아들의 추앙을 받고 동요 포크 가수로서 대중의 사랑을 제법 받고 있긴 하지만 '말레이시아 최고의 무대에 초청 받은 한국대중가수 1호'로 기록된 것은 의외다.

하지만 SGM관계자들은 "국적이 분명치 않는 저급 대중음악보다는 아시아 각 국의 고유의 문화와 정신을 존중하고 나아가 아시아의 문화교류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한국의 유명가수들 보다 국악을 모던포크라는 대중음악어법에 담아온 이성원의 가락이 진정한 한국대중음악으로 받아들여 진 것이다.

외롭게 한국 포크의 명맥?이어오며 돈과 인기와는 거리가 멀었던 노래꾼 이성원은 오히려 외국에서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은 박수를 보내지만 한편으론 부끄러운 우리 대중가요계의 자화상을 보는 듯 씁쓸하기만 하다.

금년 들어 말레이시아의 첫 외국인 초청 공연으로 기록된 "Korea Youth Recorder Concert". 이성원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 58명으로 구성된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과 함께 초청을 받았다.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은 몇 년 전부터 민간문화사절단으로 스위스, 헝가리, 태국, 일본등 유럽과 아시아를 돌며 한국의 문화를 알려온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의 공로 덕분이다. 이들의 명성을 전해들은 SGM문화재단 관계자들이 말레이시아 문화부 장관의 허락을 얻어낸 것.

1년 전부터 이 공연을 추진해온 합주단의 지휘자 이재만씨는 이성원 음악의 열렬한 지원자. 그는 "이성원의 음악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또한 그의 동요는 어린이보다 어른들이 다시 한번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기에 말레이시아 공연을 추진하면서 그의 음악을 소개했었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작년에 이성원이 두 번째 동요 음반을 작업할 때 이루어졌다. 이성원의 노래를 접하고 반했던 지휘자 이재만씨가 그의 녹음실로 찾아가 리코더 연주를 해주면서 두 사람은 서로 팬이 되었다.

이후 서로가 공연을 할 때마다 특별 게스트로 초청을 하면서 음악적인 연결고리를 이어왔다. 이성원은 "작년의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의 양평, 수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공연부터 올해 건국대에서 치른 정기연주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여를 해왔다"고 밝힌다.


폭우 속 감동의 무대

이스타나 부타야의 1천 5백석은 두 차례 공연 모두 만원사례를 이뤘다.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연령의 현지 관객들이 몰렸다. 이례적으로 말레이시아 국영방송인 TV3에서 이들의 공연 안내방송을 몇 주전부터 홍보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첫 날 궂은 날씨에 비까지 억수처럼 쏟아졌다. 공연장에 도착한 이성원은 차에서 내린 곳부터 공연장까지 20여m 길에서 현지인들이 우산을 받쳐들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감동했다.

"초청한 공연단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 숲을 만들어준 현지인들 사이를 지나면서 너무도 정성스런 대접과 친절함에 감격스러웠다"고 이성원은 감회에 젖는다. 공연을 앞두고 대기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 현지 아가씨 몇 명이 문밖에서 호기심 가득한 모습으로 기웃거렸다. 연습을 멈추고 사인을 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무릎을 끓고 노래를 경청하는 모습에 이성원이 오히려 민망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한국 전통가락에 기초한 이성원의 맑은 목소리와 통기타 가락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까바바이"라는 말레이시아 말로 인사를 건네 친근감을 안긴 그는 30여분동안 '군밤타령'과 창작곡' 보아라 수야' 그리고 '휘모리''등 개량 민요와 즉흥곡 '원 리틀 인디언' 등을 불렀다.

현지 관객들은 싱겁게 불러본 즉흥곡들을 특히 좋아했다. "중국계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군밤타령'을 부를 때는 나중에 함께 따라 불러 너무 기분이 좋았다. 우리 가락은 세계적으로 통하는 음악임을 처음 느꼈다"

공연 후 이성원은 앵콜 세례를 받아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오블라다 오블라디' 등 그들에게 친숙한 외국 히트 팝송을 들려주었다. 흥겨운 싱어롱 한마당처럼 모든 관객들이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성원과 지휘자 이재만은 1천 여명의 사인 공세를 받았다. 새로운 한국 가락에 감동한 모든 관객들이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장사진을 이룬 것이다. 20여분 간 사인공세가 지속될 만큼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국내로 이어진 감동의 물결

SGM관계자들은 "올 해 첫 이벤트로 꾸며진 무대가 너무도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한국 가수로는 이성원씨가 처음인데 너무 음악이 훌륭해 다시 한번 초청하고 싶다"며 만족감을 전해왔다. 실제로 SGM문화재단 고위관계자들은 공항까지 이례적으로 따라와 극진한 환송을 했다.

이성원은 "어제 저녁의 공연을 하루만에 사진첩으로 만들어 전해주는 정성인 인상적이었다“며 “우리 노래를 너무 좋아해 마치 한국에서 공연을 하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편안했다"고 말했다. 이성원은 SGM측으로부터 재 초청 의사뿐 아니라 인근 브루나이 왕국의 초청 의사까지 전달받고 귀국했다. 그는 한국대중음악을 말레이시아에 전파하는 민간 음악전도사 역할을 한 것이다.

귀국 후 이성원은 곧바로 KBS 제1 FM의 신년 첫 국악공연 무대 <새해에 열어보는 국악신세계>무대에 초청 받았다. 공연장인 호암아트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그의 국악포크와 동요. 민요 가락에 매료되며 사인공세와 함께 "음반을 꼭 사서 듣겠다"며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이 무대에 선 이성원은 특별히 긴장하고 있었다. 존경하는 선배 포크가수 김의철씨가 참관을 왔기 때문. 양희은의 스승으로 1970년대의 명 포크곡 ‘저 하늘에 구름따라’를 지은 그는 공연 후 이성원을 만나 "프로다운 좋은 공연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포크의 감동을 남겨달라"며 격려했다.

어린 시절부터 김의철의 음악세계와 순수한 정신을 존경해온 이성원은 "오늘 한국 포크의 정신인 김의철 선생님과 만나 음악적 교감을 나누니 더없이 행복하다. 금년엔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삼청동의 한 식당에 자리한 이성원은 김의철곡 '저하늘에 구름따라'를 즉흥적으로 김의철과 함께 불렀다.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의 멋진 화음이 식당에 울려 퍼지자 시끌벅적하던 식당은 어느덧 적막감이 감돌았다. 노래가 끝나자 손님들은 힘찬 박수로 답례를 했다. 상상하지 못한 즉흥적인 무대였다. 이성원은 "김의철 선배님과 함께 음악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을 전하자 한국 가락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온 김의철은 "우리의 포크정신을 잃지 않은 이성원씨 같은 후배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음악을 남겨야 한다"고 격려했다.

세계 최초로 클래식 포크를 발표했던 김의철은 어둡고 저항적인 포크 곡들로 군부정권의 요주의 감시를 받고 암울한 1970-80년대를 살아야 했던 비운의 포크가수이다.

그의 노래는 이 땅에서보다는 독일과 미국 등 외국에서 오히려 환영을 받았었다. 이성원 또한 국내에서는 음악 능력에 걸맞지 않는 푸대접을 받아오다 이번에 말레이시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니 닮은 꼴 가수들인 셈이다.

과연 이 땅에서 진지하게 우리의 가락을 노래하는 것은 대중가수에겐 천형일까! 포크의 정신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묵묵히 걸어 온 두 사람의 만남을 보며, 외국 곡을 표절한 히트곡이 판치는 작금의 가요계에서 진정한 우리 포크 가락의 르네상스를 꿈꿔보는 것은 성급한 기대일까.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성하의 여름도 제법 기세가꺾여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네요.

이곳 딱정뜨락에는저녁이면 벌써 가을 풀벌레소리가 요란하답니다.

그러고보니 8월도 어느덧중반을 넘어서는데 아뿔싸...제 블러그

들여다보니 이달에 하나의 포스팅도 올리지 못했군요.ㅠㅠ

8월말이면 딱정을 접는지라 착잡한 마음에 일손이 잡히지 않아 거의 컴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러다...저도 슬그머니 님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잊혀지는 건 아닌지....

그동안 딱정벌레를기억하고 사랑해주시던 분들이 소문을 듣고 딱정 문닫기전에 다녀가신다며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작은 존재이나마 애정으로 기억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엊그제는 일산의 친구들이찾아 왔습니다.

마침 문화예술 계간지 "뚜껑"의창간호발행을 앞두고 딱정벌레 취재를 오신 문화발전소 황현호 소장님과 일산에서 활동하시는

유효광 시인,그리고 손광운 변호사 오미숙(시인)부부,

나비박사인 생태연구소 정영운 소장님 등이 먼길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반가운 분을 모시고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네요.

얼마전 파주로 이사를 온 가수 이성원 님과 함께 방문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얼쑤~~이렇게 좋을 수가...한바탕 멋진 굿판을 예감하며 반가운

마음에 근처의 자작나무 김문규 선생 가족을 불렀습니다.


둥글게 모여 앉아 기타 튜닝하며 호흡을 고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주하고 선창하며 함께 따라 부르니

딱정벌레 (12현기타) 가수 이성원 님 (일렉기타)

이성원 님의 유연하고 거침없는 일렉기타연주에 정말 감탄했다.


이성원 님과 자작나무 김문규 선생(Martin 6현기타) ....두 분은 예전에 명동 청개구리 공연에서 잠깐이나마 비공식적(?) 호흡을 맞춘 적 있다한다.


때론 진지하게, 때론 흐뭇한 감흥으로 귀기울이는 모습들.

(좌로부터 황현호 소장님.오미숙 작가님.정영운 소장님)


음악의 힘인듯 싶다. 이성원 님과는 공연장 등에서 몇번 눈인사

나눈 사이지만 함께 연주하고 노래부르는 동안 어느새

마음과 마음 하나되어 교감한다.



많은 곡을 불렀다.
바람과 나(한대수 곡) 하얀 나비(김정호 곡) 찔레꽃(이연실 곡)
그리고 타복네 같은 구전음악들과 빈대떡신사, 번지없는 주막 등의
옛노래까지...
특히 최희준의 "옛이야기"를 탁월한 이성원 的 가락으로 풀어내는데
모두 넋을 잃고 감동 감동....


하얀웃음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할까?
처음 맞춰본 연주와 노래였지만 기막힌 호흡에 스스로들 만족한
표정인 듯...
(저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릅니다.^^*)

프로필


1979년 통기타(포크) 연주와 노래로 음악의 밭고랑에 첫 씨앗을 뿌림 이성원
1986년 2월 서울 크리스탈 문화센터 <두 발을 땅에 딛고> 콘서트
1986년 5월 서울 크리스탈 문화센타 <이성원-수요 콘서트>
1987년 10월 자작음반 1집 <문을 열고 나서니> 출반-아세아 레코드
1987년 11월 대전 세레나데음악실 <문을 열고 나서니> 포크콘서트
1988년 5월 서울 울림터예술극장 <숲속의 꿩 한 마리> 라이브콘서트
1989년 1월 서울 월간 객석예음홀 <국악가요발표회>
1990년 10월 서울 문예회관대극장 <이승의 못다 핀 꽃의 비나리제> 무용음악 작곡, 연주
1991년 4월 서울문예회관대극장 '91현대 춤작가전 <민둥산의 외침> 음악, 작곡, 연주, 소리
1992년 3월 서울 학전소극장 열린 춤판 무용음악 <회상> 즉흥연주 소리
1992년 9월 자작음반 2집 <나무 밑에서> 출반-서울음반
1993년 2월 서울창무예술원극장 <누가 그대에게 돌을 던지랴> 무용음악 작곡, 연주
1993년 7월 마산 <개구리 때울음을 호박잎에 쌈 싸 묵고> 공연
1994년 4월 군항제 기념 <국악대공연> 출연
1994년 4월 고성 교육청 주관 <청소년 어울마당> 출연
1994년 6월 제2회 마산만 살리기 운동 <새물맞이굿> 공연
1994년 9월 창원 KBS-TV <일요초대석> 출연
1994년 11월 진해 시민회관 소극장 <이성원의 노래이야기 콘서트>
1995년 11월 '95도파니 무대예술제 <이성원의 노래이야기> 공연
1995년 12월 KBS창원홀에서 <'95 송년음악회>
1996년 10월 96'도파니 무대예술제 <이성원의 노래이야기> 공연
1996년 10월 MBC-TV <샘이 깊은 물> 출연
1997년 3월 KBS-TV <국악한마당> 출연
1997년 5월 KBS-TV <열린음악회> 출연
1997년 5월 PBS-TV <여기 이사람> 출연
1998년 5월 이춘호 데깔꼬아니전 <꿈> 공연
1998년 12월 과천 시민회관 <정신대할머니, 양심수를 위한 밤 이야기> 공연
1998년 12월 씨어터제로 개관공연 <언플러그의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1999년 1월 KBS 2TV <문화탐험, 오늘의 현장> 방송출연
1999년 2월 이성원이 노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옛동요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출반-굿뮤직
1999년 2월 26일 삼청동 재즈라이브 '끌레' 공연예정
1999년 2월 27일 음반매장 라이브 콘서트 영풍문고 '뮤직월드' 공연예정
1996년 일본공연
1996년 8월 동경 세카가야 미랑홀에서 이성원 콘서트
나가노 야츠가다끼(山) 재즈 페스티발 공연
동경 클럽 Q에서 동경 비빔밤클럽팀과 공연
1996년 10월 사이따마현에서 동경비빔밥클럼과 LIVE 콘서트
시네마현 페스티발 참가 공연
1996년 11월 나끼즈끼현 재일동포를 위한 가을 콘서트
오오사까 야외공연장
교또 다끄다끄 라이브하우스 공연


명동 청개구리 공연실황 (2003년 8월)

(이성원-이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