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2) 잿더미 서울-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서울 시가지
서울은 6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건물은 손꼽을 정도다. 근대화 과정에서 개발 바람으로 헐린 건물도 많다. 하지만 서울의 모습을 송두리째 뒤바꾼 것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한강다리가 끊어져 서울을 떠나기도 어렵게 된 나는 신당동 친척집 지하실에 숨어지내며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읽었다
어둠 속 독서에 지쳐 후암동에 있는 은사댁을 다녀오기 위해 남산에 오른 1950년 7월 16일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당시 울창한 솔밭이었던 남산을 오르려면 오솔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폭이 너무 좁아 차량은 다닐 수 없었다.
지금의 해방촌 언덕을 지나 남산 능선에 오른 순간 요란한 비행기 굉음에 놀라 뒤돌아보았더니 남쪽 하늘이 미군 폭격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때 1시간 가까이 지켜본 폭격장면은 평생 가장 무서웠던 체험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날 폭격으로 용산 일대가 완전히 파괴됐다. 폭격의 이유는 북한군에 이용당하고 있던 용산 철도시설과 화폐를 찍어내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공장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에 남아 있는 시민들에게 서울을 사수한다는 거짓방송을 내보면서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피란을 가버린 정부는 화폐를 찍어내는 시설은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났다. 이를 접수한 북한군이 마구 화폐를 찍어내면서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한 화폐공장 폭격 때문에 인근 지역이 큰 피해를 본 것이다. 피해지역은 이촌동에서 후암동.원효로를 지나 마포구 도화동.공덕동에 이르렀다.
일제시대 대표적 건물의 하나였던 용산역사, 철도국, 용산.마포구청 등이 이날 파괴됐다. 이날의 대폭격 외에도 북한에 점령된 석달과 인천상륙작전, 1.4후퇴를 거치면서 서울은 수많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남대문과 동대문, 그리고 경복궁과 창덕궁의 문화재가 일부라도 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데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주일대표부 공사는 김용주였다.
그는 50년 9월 도쿄(東京)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설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인천상륙에 앞서 서울을 전면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다. 김공사는 맥아더 장군을 만나 서울에 대한 폭격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맥아더 장군에게 서울문화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배석한 하키 참모장에게는 덕수궁과 경복궁.창덕궁.남대문 등을 지도에 표시해가며 4대문 안 도심을 대략 반월형으로 그려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탐탁지 않게 대꾸하는 참모장과는 달리 맥아더 장군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전해진다. 많지않은 서울의 문화재와 사적들이 그나마 전화(戰禍)를 피해 지금까지 남아있는 데는 이런 작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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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01 20:24 입력 / 2003.09.02 08: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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