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영화관도 거실도 ‘지금은 고려시대’ | ||||
2009 02/10 위클리경향 811호 | ||||
<쌍화점> <천추태후> 인기몰이… 고려인의 가치관과 역동성 ‘문화콘텐츠로 부활’
'고려시대는 현대와 닮은꼴이어서 매력적?’ 스크린과 TV브라운관에서 고려시대의 부활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개봉한 영화 <쌍화점>(감독 유하)과 올 1월 3일 첫방송한 KBS 2TV <천추태후>(연출 신창석)는 모두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다. <쌍화점>은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 시대를 배경으로, 원나라 배척운동을 전개한 왕과 그의 호위부대인 건륭위 소속 미소년 무사 간의 동성애와 질투라는 원초적 감정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또 <천추태후>는 고려 제7대 왕 목종의 어머니로 12년 동안 섭정했던 왕건의 손녀 천추태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 개봉한 <쌍화점>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임에도 한 달이 채 안 된 1월 28일 현재까지 전국적으로 362만3216명의 관객이 들면서 흥행순항 중이고, <천추태후>도 20% 안팎의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사회 제도 등 남녀평등의 시대 물론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등장이 처음은 아니다. 2001년 9월 개봉한 영화 <무사>도 고려 우왕 1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또 TV사극으로는 2000년 KBS 1TV <태조왕건>이 크게 히트한 이래 2003년 KBS 1TV <무인시대>, 2005년 MBC <신돈>이 맥을 이었다. 특히 <태조 왕건>의 흥행 성공은 조선조 일색인 TV 역사드라마의 흐름을 고조선과 삼국시대까지 망라하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근래 역사드라마의 대세를 이루는 것은 단연 고려시대다. 왜일까. 역사학자들은 유교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가 여러 면에서 현대인의 가치관과 비슷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했고 성(性)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외세(중국)에 대해서도 조선에 비해 훨씬 독립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 자녀의 성(姓)을 바꿀 수 있는 민법 개정, 아들·딸 구분 없는 재산 상속 등 한국 사회가 어렵게 한 가지씩 얻어낸 일도 고려 사회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풍습이었던 것이다. <광종의 제국>(푸른역사) 등 다수의 고려사 관련 서적을 펴낸 역사학자 김창영(고려대 강사)씨는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높아 재산 분배에서도 아들과 딸을 차별하거나 장자에게 더 주거나 하지 않았고, 집안의 대도 꼭 아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딸이나 외손자·외손녀를 통해 잇는다는 개념이 공존했으며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처가살이’는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다가 조선 후기 중국식 종법제도 또는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시집살이’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성(姓)도 아버지의 성뿐 아니라 어머니의 성이나 할머니의 성도 따를 수 있었다. 천추태후의 경우만 해도 왕건의 손녀지만 할머니의 성을 따라 ‘황보’씨(氏)였다. 또 제사도 반드시 장자가 지내는 게 아니라 자식들이 번갈아 지냈다. 여러모로 평등한 사회였던 것이다. 또 당시는 자유연애가 가능해 결혼이 자유로웠던 것은 물론이고, 남녀를 불문하고 재혼도 제한 없이 가능했다. 때문에 남편인 경종이 죽은 후 외척 김치양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은 천추태후를 정사(正史)에서는 가부장제의 도덕률을 유린한 탕녀로 기록했지만 이는 철저히 유학자의 시각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게 사학자들의 견해다.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남존여비, 정절, 일부종사, 수절 등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작지만 강한 나라, 외교적 위상 높아 사학자인 박종기 국민대 부총장은 “천추태후가 음탕하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고 실제로 음탕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며 “그보다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한 여인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영화 <쌍화점>의 모티브가 된 동성애에 대한 고려사회의 시각은 어떠했을까. 박종기 부총장은 “동성애와 관련한 문헌은 없으나, 이와 유사한 용어로 남색(男色·남자 사이의 성행위)이라는 용어가 <고려사>에 나온다”며 “공민왕이 자제위 소속원과 남색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초기 목종 때 유행간이라는 사람이 목종의 남색 대상이었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당시 동성애에 대한 시각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부총장은 또 “정사(正史)에 기록돼 있다고 해서 실제 공민왕이 동성애를 했다고 확언할 수도 없다”며 “1451년 편찬한 <고려사> 기록이 조선왕조 건국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한 측면이 많은 탓에 기록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는 어려움이 있다”고 덧붙였다. 사학자들에 따르면 고려시대는 정치적으로 실용적인 외교를 추구했다. 황제국 제체를 운영하면서도 강대국에 대해서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실리적으로 사대의 예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조와 같은 문화적 종속은 거의 없었다. 특히 고조선과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은 고려 초의 기개는 대단했다. <천추태후>를 연출 중인 KBS 신창석 PD는 “고려시대 천추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만든 것은 이 시대가 거란과 3차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기 때문”이라며 “많은 한국인이 우리나라가 늘 강대국에 눌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고려는 작지만 강한 나라로 외교적 위상과 문화적 자긍심이 높았으며 천추태후가 직접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호령할 정도로 여성의 권익이 지금의 21세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고 연출 배경을 소개했다. 사학자 김창영씨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중국문화에 젖지 않은 우리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다”며 “팔관회는 고구려부터 내려온 것으로 단순한 불교행사가 아니라 우리 전통이 불교와 결합한 행사이고 연등회도 우리 전통의 정월대보름행사와 불교가 결합한 행사였다”고 설명했다. 외국 문물이 자유롭게 들어온 해상무역국가였기 때문에 사고방식도 유연했다. 고려시대의 이 같은 역동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평등한 가치관은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하고 있다. <쌍화점>을 연출한 유하 감독도 “조선시대 사극의 한국적 절제, 정적인 느낌과 대척점에 있는 굉장히 다이내믹하고 탐미주의적이고 역동적이고, 사극을 하고 싶었는데 고려시대가 그랬다”며 “고려시대는 충렬왕이 신하에게 내용이 저속한 속요를 지어 부르도록 시키거나, 자신이 직접 속요를 부르기도 했을 만큼 자유로운 시대였다”고 고려시대의 매력을 설명했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에 비해 사료가 많지 않아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이런 여백은 문화콘텐츠 생산자들에게는 어려운 점인 동시에 큰 장점이다. 이 점은 향후 고려시대뿐 아니라 삼국시대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다룬 문화콘텐츠가 더 많이 개발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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