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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 치악산

[2월의 산] 강원 원주 치악산

  • 입력 : 2011.02.10 07:00

이 순간… 새가 부러우랴, 신선이 부러우랴

치악산을 대표하는 기암인 입석대.
치악산(雉岳山·1288m)은 전설의 산이다. 산 이름부터 그렇다. 붉은 단풍이 아름다워 붉을 적(赤) 자를 이름으로 썼던 '적악산'은 '선비의 은혜를 입은 꿩이 머리가 깨져나가도록 종을 울려 뱀에 감긴 선비를 살려냈다'는 꿩의 보은 설화가 생겨난 뒤 꿩 치(雉) 자를 이름으로 바꾸었다. 구룡사, 국향사, 배너미재, 쥐너미재 같은 산속 절과 고갯마루들에도 그럴듯한 전설이 전하고, 그래서인지 치악산 상봉 비로봉(飛盧峰) 정상에 선 3기의 돌탑도 전설 같은 얘기로 들린다.

'전설의 산' 치악은 겨울의 산이기도 하다. 비로봉에서 남대봉(南臺峰·1181.5m)에 이르는 10㎞ 길이 능선은 남북으로 거대한 장성을 형성하며 겨울 북서풍을 그대로 받는다. 그런 자연적인 영향 때문에 눈꽃이 피는 날이 많고, 깊은 눈과 매서운 바람이 뒤섞이면서 겨울 산의 정수를 보여준다.

비로봉 눈꽃을 기대하며 들어선 황골은 얼음창고처럼 차갑고 북풍한설이 매섭게 불어댔다. 그래도 등산인들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줄지어 산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 머릿속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겨울을 실컷 만끽하겠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으리라.

"저게 입석이에요. 선바위란 뜻일 거예요. 이제부터 힘 좀 들 거예요. 주능선까지 제법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올라야 해요."

원주 여성산악인 구찬옥(47)씨와 박지수(47)씨의 안내를 받으며 입석사에 다가서자 대웅전 왼쪽 능선 마루에 입석대(立石臺)가 삐죽 솟아 있다. 기암과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광도 멋들어지지만 입석대 마루에서 바라보는 골 바깥 풍광이 매혹적이다. V자 골 바깥으로 펼쳐진 원주는 넓디넓은 벌판을 이룬 채 따스한 햇볕을 받고 있었다.

칼날 같은 골바람은 산등성이에서 험악스럽게 몰아치는 바람과 부딪치면서 한층 요란스러워지고, 눈은 점점 깊어진다. 급경사 사면 길을 거슬러 능선 위에 올라서자 능선 너머 삼봉(三峰·1072.6m)은 파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있다. 겨울 산이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설산과 설릉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그 위로 파란 하늘이 멋진 배경이 돼주기 때문이리라.

새가 된들 이보다 더 높이 솟아올라 산야를 내려다볼 수 있을까. 원주 여성산악인 구찬옥씨와 박지수씨가 치악산 비로봉 정상에 올라 조망을 즐기고 있다.
주능선 삼거리(입석사 1.2㎞, 비로봉 1.3㎞, 남대봉 8.5㎞)에 올라서자 시루를 뒤집어놓은 듯한 모습의 비로봉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바람에 날린 눈이 허리까지 차오르는 설릉을 따라 무명봉에 올라서자 비로봉이 코앞이다.

미끄러운 눈길 따라 올라선 비로봉 정상은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몇몇 등산객은 눈보라에 놀라 산 아래로 허겁지겁 뛰어 내려가는데 몇몇 산꾼은 푹 뒤집어쓴 모자 틈으로 산야를 훑어보고 있다.

치악은 원주 벌판을 가로지르고 부곡을 감싸 안은 채 활처럼 휘며 남대봉을 향해 뻗어나가고 그 뒤로 수많은 산봉을 일으켜 세워놓고 있었다. 치악은 눈꽃 대신 모진 바람으로 맞아주었지만 그 덕에 우리가 숨 쉬는 따뜻한 인간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겨울 나그네들은 북풍한설에서 따뜻한 온기를 얻고 산을 내려섰다.

산행안내 2월 14일부터 시작되는 치악산국립공원 산불예방 기간에 개방되는 등산로는 구룡사 기점 사다리병창 코스와 계곡 코스, 황골 코스, 그리고 성남탐방지원센터 기점 상원사~남대봉 코스 네 가닥이다. 황골 코스는 원주 시내에서 접근도 쉽게 할 수 있고 치악산 정상 비로봉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코스다. 황골탐방지원센터(원주 소초면 흥양리)에서 비로봉 정상까지는 약 4.1㎞이지만, 버스정류장에서 황골탐방지원센터까지 1.5㎞가 더해지기 때문에 산행 길이는 5.5㎞에 이른다. 편도 약 3시간, 왕복 5시간. ☆☆☆(난이도 ☆ 5개 기준).

정상에서는 구룡사로 내려설 수도 있다. 사다리병창 능선길이 가파르긴 해도 조망이 뛰어나 바로 옆길인 계곡 코스에 비해 선호하는 등산인이 많은 편이다. 비로봉~사다리병창~세렴폭포 갈림목~구룡사~구룡사탐방지원센터 산행은 3시간 정도 걸린다. ☆☆☆

구룡사 원점회귀 산행의 경우, 대개 조망과 경치가 뛰어난 사다리병창 코스를 등로로 삼고, 계곡길을 따라 내려선다. 왕복 11.5㎞. 7~8시간 소요. ☆☆☆☆ 단, 동절기(11월 1일~2월 28일)에는 세렴폭포 통제소에서 오후 1시까지만 비로봉 산행을 허용한다.

구룡탐방안내소에서 산행을 시작할 경우 구룡사 문화재관람료를 내야 한다. 성인 2000원. 주차료는 중소형 승용차 기준 1일 최고 6000원.

가는길 황골 입구는 원주역에서 82번 시내버스 이용. 1100원. 태창운수 (033)734-9680.

구룡사 입구 주차장에서 원주행(원주역 경유) 41번 시내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40분, 1100원.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영동선(1688-4700), 동서울종합터미널(02-446-8000), 인천버스종합터미널(032-430-7114), 대전동부시외버스터미널(042-624-4451), 청주여객터미널(1688-4321), 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1688-9969), 대구북부시외버스터미널(053-357-1851)에서도 원주행 노선버스가 운행한다.

승용차: 영동고속도로 문막 IC→원주 방면(42번 국도)→두 번째 삼거리에서 우회전→흥업-관설 우회도로(자동차전용도로)→자동차전용도로 끝지점→ 원주 방향→KT 사거리→우회전→효성백년가약아파트 사거리→치악산 방향 우회전→행구동 저수지 삼거리→좌회전→황골 입구→1.5㎞→황골탐방지원센터(주차공간이 좁으므로 삼거리 부근에 주차)

영동고속도로 원주 IC→원주 방면(5번 국도)→태장육교→36보병사단→42번 국도→송문사거리→황골삼거리

맛집 황골 입구 삼거리에서 도로를 따라 500m쯤 내려서면 두부 전문 식당이 여러 집 있다. 순두부백반·두부전골·두부구이·두부김치 각 6000원, 모두부 5000원, 닭백숙 3만3000원, 오리백숙 3만5000원. 고향집 (033)731-9911, 황골집 (033)732-8359. 황골은 전통엿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엿 2㎏ 1만4000원, 1㎏ 9000원, 물엿 4kg 2만원, 1kg 1만1000원. 황골전통엿 (033)732-8365, 심씨네 황골엿집 (033)732-4911.

영동고속도로 새말 IC 들머리 부근의 네덜란드 꿩만두(033-342-7888)는 겨울철 별미인 꿩만두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다. 꿩만두국, 꿩찐만두, 꿩군만두 각 6000원. 전원막국수(033-342-5747)와 한일막국수(033-342-6036)는 막국수로 명성이 높다. 막국수 5000원, 돼지고기편육 1만2000원, 모두부·감자전·도토리묵 각 5000원.

여행문의 구룡탐방지원센터 (033)732-5231, 황골탐방지원센터 (033) 732-2780, 성남탐방지원센터 (033)762-5695.

[명산명품 산행로] 치악산 - 금대리~남대봉~비로봉~구룡사 주릉 종주 23km
크리스털 녹용 숲, 그 황홀한 고통에 대하여
▲ 영원사에서 남대봉으로 이어진 오름길. 8부 능선에서 만나는 상고대는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황홀경을 연출한다.


옛날 한 스님이 원주 적악산(赤岳山)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꿩 두 마리가 구렁이에게 잡혀 먹힐 지경에 처한 걸 구해주었다. 폐사가 된 구룡사에 도착해 잠이 든 스님이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떠 보니 구렁이가 몸을 휘감고 있었다. 구렁이가 “네가 내 밥을 살려주었으니 너라도 잡아먹어야겠다”고 하자 스님은 “그리하여 네가 배부르다면 이 몸 아깝지 않다. 잡아먹어라”고 했다. 그러자 구렁이는 “네가 승려가 아니었다면 이미 잡아먹었을 것이다. 오늘 밤이 새기 전에 종소리를 듣게 해 준다면 나는 환생할 수 있을 터이니, 살려주겠다”고 했다. 스님은 일단 풀려났으나 막막했다.

구룡사는 폐사되어 종이 없고 산길 30리를 걸어야 상원사에 닿기 때문에 빨리 가도 날이 밝기 전에 닿을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은 인연에 따른다는 생각으로 스님은 상원사로 향했다. 새벽이 걷히기 직전 포기하려는 찰나, 멀리서 종소리가 뎅~ 뎅~ 하고 울렸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분명 종소리였고, 구렁이는 소원대로 허물을 벗고 환생했다. 상원사에 닿은 스님이 발견한 건 죽은 꿩 두 마리였다. 낮에 구해준 꿩이 몸을 던져 소리를 낸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은혜를 갚은 꿩을 기려 꿩 ‘치(稚)’자를 써 치악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 남대봉 정상 헬기장의 설경. 낮은 산들은 눈이 녹아 갈색이고 치악산 능선 부근에만 상고대가 남아 있다.

영원골을 깨우며 산으로 든다. 언 땅을 아이젠으로 깨워가며 오르는 왁자지껄한 무리는 기자들과 치악산산악구조대원들이다. 산행에 동행한 이는 서정숙·이숙희·이인후·구찬옥·이광영 대원과 장윤택 부대장, 이광영(클럽8848)씨다. 보통 구조대라고 하면 산악연맹 소속에 암벽등반을 하는 젊은 산꾼 위주로 꾸려지지만 치악산구조대는 다르다. 원주산악연합회 소속이며 대원들도 치악산을 뒷산으로 매일같이 오르는 원주 시민들로 꾸려졌다. 그렇다 보니 연령대도 40~50대가 주를 이룬다.

오늘 구룡사까지 23km를 가야 한다. 먼 길이지만 아무도 속도를 내지 않는다. 시작은 항상 천천히 자연스럽게 몸이 풀리도록 해야 한다. 영원사에서 구룡사까지 하루에 가는 건 어쩌면 산꾼의 과한 욕심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치악의 가파른 산세와 영하 십 몇도까지 떨어진다는 일기예보를 감안하면 오늘 산행은 일종의 모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렌다. 바싹 선 저 험상궂은 능선과 꼭대기의 흰 눈, 마주치는 사람 한 명 없는 외진 길, 악을 쓰고 덤비는 힘 좋은 바람에 설렌다. 산꾼에게 이처럼 잘 차려진 밥상이 어디 있겠는가.

기대된다. 어둠 속을 내려올, 산에 취한 자들의 조용한 발자국 소리와 통성명을 나눌 때와는 바뀌어 있을 그들의 사이. 달궜다 식었다를 반복한 근육의 부드러운 피로, 도시의 묵은 매연을 벗겨내 싱싱해진 폐, 땀내 절은 등산복……. 이때 같이 산행한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술을 곁들인 다음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이불 속에 들어가는 게다. 아마 뭉친 근육이 서서히 풀어지며 몸이 노곤해지리라. 그리곤 맑은 피로감을 이불 삼아 달디단 잠 속으로 스르르 빠져드는 게다. 산행 후에 오는 이런 기분 좋은 노곤함이 기대된다.

▲ 1 치악산 능선의 환상적인 상고대. 구찬옥씨가 감탄을 금치 못한다. 2 꽁꽁 얼은 영원골을 오르는 서정숙씨. 치악산 산악구조대원들이 산행에 동행했다. 3 상고대로 치장한 남대봉 부근의 능선. 마치 크리스털로 된 녹용 같다.

영원사는 신라 문무왕 때 세워진 절이나 세월의 공백으로 고찰다운 분위기는 없다. 영원골은 눈 대신 얼음이 들어차 있다. 아이젠을 신고 “빠드득 빠드득” 소리를 내며 얼음을 힘주어 밟는다. 점점 가팔라온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오고 조금씩 열이 난다. 사람들의 입김이 담배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재킷을 벗어 넣자 벌거벗은 듯 춥다. 오르막은 은근히 까다롭다. 크고 작은 바위와 흙이 섞여 너덜도 아니고 흙길도 아닌 것이 얼어 있어 발을 조심스럽게 딛는다.

능선이 가까워지자 “캬!”하는 탄성이 난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초라한 몰골의 산이 상고대를 입고 하얗게 변했다. 그 변화가 너무 심해 딴 세상으로 넘어 온 듯 환상적이다. 능선에 가면 눈이 있겠다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얼어붙은 나무 입장에선 고통스러울 게다. 멀리서 보면 멋지지만 가까이서 보면 고통스런 풍경, 사람 사는 세상 같다.

상원사로 간다. 능선 타고 남대봉으로 가는 게 빠르지만 꿩 전설이 담긴 상원사를 두고 갈 순 없다. 1,100m 고지에 자리 잡은 절은 동남쪽으로 트여 있어 볕이 잘 든다. 꿩 전설이 아니어도 임도가 없는 고지의 절이라 귀한 터라는 느낌이 든다. 지금 종은 전설의 그 종은 아니지만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이지만 결국 뿌린 대로 거둔다는 단순한 진리가 배어 있다.

남대봉은 너른 헬기장이라 도시락 까먹고 수다 떨기에 그만이다. 동남쪽으로 부드러운 산 실루엣이 늘어선 게 눈을 사로잡는다. 아스라한 겹침이 보기 좋다. 남대봉 지나 마주치는 전망 좋은 바위, 치마바위다. 저 멀리 신성한 백색 봉우리가 보인다. 비로봉이다. 비로봉이 튀는 건 압도적인 높이와 균형 잡힌 산세, 힘이 넘치는 거친 선 때문이다. 갈색 봉우리들 속에서 흰 눈을 쓴 모습은 신성함까지 풍긴다. 가야 할 곳이 뚜렷하다. 걸음에 가속도가 붙는다.
▲ 입석사 갈림길 지나 헬기장에서 본 비로봉. 돌탑이 솟은 비로봉이 기운 넘친다.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녹용이 천지다. 천국의 오아시스가 따로 없다. 주능선 상고대가 사슴뿔 같다. 그 아래를 지나는 기분이 꽤 괜찮다. 애인 만나러 가는 총각처럼 설레고 배시시 웃음이 난다.

향로봉 어귀에서 밥을 먹는다. 도란도란 사람들 얘기를 듣는다. 치악산 다람쥐란 별명의 서정숙씨는 매일 치악산을 타기로 원주 산꾼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상원사에서 구룡사까지 20km가 넘는 거리를 3시간 만에 주파한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발이 빠르고 이곳에 익숙하다. 조원택 대장의 부인인 구찬옥씨 역시 영원사에서 구룡사까지 4시간대에 주파한 적이 있을 정도로 준족이며 지난해 열린 치악산등산대회에서 1등을 했다.
이인후씨는 제주도에서 원주로 시집와 치악산을 탄 지 30년쯤 되었다. 이숙희씨는 원주 산꾼 전양표씨의 부인으로 설악산 가는 버스 안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한 지 20년쯤 되었다. 이광영씨는 향로봉 아래 행구동에 사는 토박이로 근래에만 세 번이나 출동해 다친 등산객을 구조했다. 양명욱씨는 등산지원센터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5.12b를 등반하는 클라이머다. 장윤택 부대장은 원주에서 개인택시를 하는데 사고가 생기면 생업을 제쳐두고 누구보다 먼저 출동한다.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발 빠르고 치악산에 관해선 모르는 게 없는 전문가로 원주 산꾼들에게 소문났다. 산행은 낯선 사람도 자연스레 알게 하는 친화력이 있다.

▲ 1 향로봉 직전 헬기장을 지난다. 속을 훤히 드러낸 육산의 모양새가 부드럽다. 2 치마바위에서 본 능선의 달콤한 상고대. 멀리 원주시내가 보인다. 3 얼어붙은 세렴폭포. 이후부터 산행은 편안한 임도를 따른다.

향로봉에선 원주 시내가 잘 보인다. 바로 아래 공사를 준비 중인 너른 터는 혁신도시 부지다. 저기가 시청이고 저기가 대학교고 하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거기가 거기 같다. 눈을 사로잡는 건 거칠고 힘 있게 치솟은 비로봉, 저기가 정상이다. 곧은치를 지나자 상고대 없는 갈색의 말라붙은 것들로 빈약한 풍경이다. 속도에 연연하며 비로봉 품으로 파고든다. 약간 트인 데를 지나가노라면 옆에서 누가 얼음송곳으로 얼굴을 푹 찌르는 기분이다. 바람을 피하려 발라클라바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한다. 쓰면 덥고 벗으면 춥다. 몸의 변덕에 행동을 맞춘다.

벌떡 선 비탈이 끝없이 밀려온다. 빙판에 밀리지 않으려 꾹꾹 힘주어 땅을 밟는다. 심장 박동이 점점 커진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퍼질러 앉고 싶다. 쉴 만한 터는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나를 버리고 산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비로봉으로 가는 길이다.
돌탑을 성벽처럼 튼튼히 쌓은 정상에서 산객을 맞는 건 오름이 끝났다는 안도감과 조폭 같은 칼바람이다. 인근 산들을 단숨에 제압하는 높은 경치가 파노라마다. 동쪽으로 강원도의 산마루들이 빽빽하지만 사이좋게 서 있다. 경치 좀 보려 올라서면 기관총 쏘듯 찬바람이 닥달을 해 버티기 어렵다. 돌탑 뒤에 숨어 따뜻한 옷을 껴입는다.

▲ 비로봉 정상의 산경. 고도가 높은 치악산 능선만 흰 눈을 이고 있다.

사다리병창으로 하산한다. 가파른 능선을 계단으로 정비해 놓았으나 방심할 수 없는 구간이다. 평상복에 운동화에 장갑도 없이 올라오는 젊은 남녀가 눈에 띈다. 추위에 손과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배낭도 없이 생수 한 통이 고작이다. 정상까지 올라온 게 놀랍다. 그렇게 지나보내고 한 시간 뒤, 장 부대장과 이광영 대원이 내려온 길을 거슬러 다시 올라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실한 장비의 남녀가 마음에 걸려서다.

결국 구조대는 남녀를 구조해 하산했다. 정상에서 체력이 다한 여자가 119에 구조요청을 했으나 마침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 당황한 이들을, 대원들이 데리고 내려온 것이다. 선행이 선행을 낳는다는 꿩의 전설은 구조대에 의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구룡사에 닿자 깜깜한 밤이 일행의 긴장감을 풀어 놓는다. 크리스털 상고대 숲을 지나온 산객들 가슴에 황홀한 고통의 여운이 남아 있다.

금대리~남대봉~비로봉~구룡사 길, 왜 명품 등산로인가?

“사다리병창으로 올라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제일 좋죠. 올라 갈 때 힘들지만 그만큼 정상에서 보는 경치도 감동적이에요. 너무 일반적인 코스라 생각한다면 비로봉으로 올라 향로봉과 남대봉까지 종주해서 신림이나 금대리로 하산하는 코스를 권합니다.”

구룡계곡에서 태어나 1973년 도립공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국립공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조부부터 3대째 살아온 이상구(63)씨는 치악산이 집이요, 일터다. 치악산의 매력을 묻자 “특별히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는 그의 말에서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이만의 솔직함이 묻어난다. 그가 꼽는 명품코스는 비로봉에서 남대봉까지 주능선을 종주하는 코스다. 기왕이면 상고대가 피는 겨울이나 단풍이 좋은 가을이 최적기라 한다.
원주 토박이인 치악산산악구조대 조원택 대장은 황금코스로 금대리~영원사~남대봉~향로봉~비로봉~구룡사 길을 꼽는다.

“구룡사를 들머리로 시작하는 코스는 너무 흔해요. 영원골이 한적하고 운치 있어 산을 오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치악산의 보석인 상고대를 제대로 보려면 능선을 종주해봐야 합니다. 다만 장거리 산행에 익숙한 베테랑에게 추천합니다.”


[ 미니 인터뷰 ]

치악산사무소 권혁균 소장
“치악산의 정체성을 찾아 공원 역량을 집중하겠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건, 치악산국립공원을 어떻게 관리할 건가, 치악산의 정체성은 뭔가 하는 것들입니다. 치악산은 수도권에서 가까운 편인데도 불구하고 국립공원 중에서 탐방객이 적은 편입니다. 치악산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정체성을 뽑아낸다면 공원의 역량을 집중하기가 더 수월해질 겁니다.”

새로 부임한 권혁균(54) 치악산사무소장은 둘러치거나 형식적인 것 없이 있는 그대로 터놓고 얘기한다. 경북대산악부 출신답게 산꾼 기질이 일을 할 때도 드러난다. 공단 내에서도 추진력 강하기로 손꼽히는 그는 이에 걸맞게 공단 홍보실장과 경주국립공원 초대 소장 등 쉽지 않은 일을 맡아왔다.

이런 그가 고민하는 것은 수도권에서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탐방객이 적은 치악산국립공원을 어떻게 특색 있는 국립공원으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지역민들과 시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횡성 부곡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능선코스와 영원산성 코스의 개방을 검토 중이다.

또한 지난해 국방대학원을 다닌 경험을 살려 인근 부대 장병들에게 국립공원 이용 안내 영상을 제작하여 배포하고 초대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시원하고 적극적인 경북대산악부 OB, 권 소장이 치악산국립공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된다.


[ 산행 길잡이 ]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치지 않도록 준비해야
아침 일찍 나서야 하는 당일산행 23km, 3~4월 경방기간엔 구룡사 원점회귀 강추


▲ 치마바위에서 본 북서쪽 파노라마.

치악산은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친다 하여 치악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산행이 힘들기로 소문났다. 산세가 가파르고 계곡이 깊어서 그런 말이 생긴 게다. 대표적인 산행 코스는 구룡사 원점회귀 코스다. 큰골과 사다리병창을 거쳐 비로봉에 선 다음 계곡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여길 간단한 코스라 생각한 사람들이 산행 후에 “치가 떨리고 악에 받친다”고 얘기한다. 겉으로 보기에 간단해 보이지만 힘들다는 얘기다.

산행이 시작되는 구룡사문화재관람료 매표소에서 정상까지 실주행 거리는 7.6km, 왕복 15km 정도다. 치악산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간단한 코스지만 당일산행으로 15km는 초보에게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또 사다리병창 2.7km 길은 급경사에 계단이 끝없이 늘어서 있어 인내력 테스트에 어울린다. 반면 산행의 노고에 비해 설악산처럼 눈을 확 잡아끄는 비경은 없으므로 투덜대며 하산하는 이들도 간간이 있다.

명품코스인 금대리~남대봉~비로봉~구룡사 코스는 23.4km로 당일산행으론 상당히 긴 편이므로 베테랑 산꾼이 아니고선 무리다. 다만 능선 중간의 곧은치와 입석사 갈림길에서 하산하는 갈림길이 있어 체력과 시간을 안배해 산행을 조절할 수 있다. 국립공원답게 길은 잘 정비되어 있어 길찾기는 쉽다. 비교적 힘든 코스는 영원골에서 주능선으로 이어진 길, 향로봉 오름길, 원통재에서 비로봉으로 이어진 길, 사다리병창 등이다. 영원골을 올라 주능선에 닿으면 바로 남대봉으로 가는 길과 상원사를 들렀다 가는 길을 택할 수 있다.

치악산은 전체적으로는 육산이지만 비로봉과 사다리병창 등 곳곳에 바위가 뒤섞여 있고 오르내림이 심한 편이다. 응달진 곳에는 빙판이 있으므로 3월에도 아이젠을 챙겨야 한다. 가민 콜로라도 300 GPS로 확인한 실주행 거리는 23.4km다. 3월 2일부터 4월 30일까지는 산불조심기간이라 주능선 종주는 통제된다. 그러나 구룡사와 비로봉을 잇는 원점회귀산행은 가능하다.

교통 (지역번호 033)
종주산행은 교통이 문제다. 치악산 종주도 마찬가지다. 금대리에 승용차를 세우고 산행 후 택시로 돌아갈 경우 3만~4만 원 정도 요금이 든다. 구룡사에서 41번 버스를 타고 원주 시내로 나와 택시를 타고 금대리탐방안내소로 갈 경우 1만5,000원 정도 든다. 원주 시내에서 금대리행 버스는 원주역이나 구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21, 22, 23, 24, 25번 버스를 타면 된다. 산행 후에는 구룡사에서 41번 버스를 타고 원주 시내로 간다. 관설동에서 구룡사행 41번 버스는 05:35분부터 21:50분까지 2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버스터미널은 지나지 않으므로 터미널로 가려면 ‘한일주유소’에서 내려 31, 33, 34, 35번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

숙식 (지역번호 033)
금대리 영원사 입구에 숙박업소가 몇 있다. 황토골민박(762-3241), 계곡산장(763-3087), 진선미민박(762-1488), 청운산장(763-5884), 금대장여관(763-6663) 등이다. 구룡사 입구는 숙박업소가 많다. 치악식당(731-8825), 오성상회(731-5601), 물레방아식당(731-8550), 선달상회(732-0628) 등이다. 구룡계곡 진입로에 있는 쌍다리식당(731-1231)의 감자전(5,000원)과 더덕구이(1만5,000원)가 별미다.

▲ 남대봉 부근에 있는 상원사.
볼거리
상원사
상원사는 치악산 비로봉 남쪽 남대봉(1,181m) 기슭에 있는 절로 100평 남짓한 돌바닥 위에 세워져 있다. 절 앞 바위틈에서는 시원한 샘물이 솟아오르고, 그 앞에는 40여m의 벼랑이 있으며 벼랑 끝에는 계수나무 3그루가 서 있다. 치악산의 유래가 된 은혜를 갚은 꿩의 이야기가 이 절에서 생겨났다. 창건은 정확치 않으나 석탑 등의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월간산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이구희 기자
[눈꽃산행] 코스가이드5선 - 치악산
눈꽃 터널 만날 확률 가장 높은 명산
▲ 화려한 눈꽃 풍광을 자랑하는 사다리병창길.

치악산(雉岳山·1,288m)은 원주시 동쪽으로 거대한 장벽처럼 능선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다. 워낙 당당하게 솟구쳐 억세고 힘만 들지 별스런 멋이 없으리라 생각하기 쉬우나 치악산은 계절 따라 다른 멋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흔히 꿩의 보은 설화에 유래해 ‘전설의 산’이자 단풍 빛이 수려한 ‘가을 산’ 정도로 평하지만 겨울 풍광 또한 뛰어나다. 특히 비로봉 북릉은

눈꽃 터널을 만나지 않으면 운이 없다고 할 만큼 겨우내 눈꽃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이는 치악산이 내륙 중부지방에 위치해 대륙성 기후의 특성이 강하며 밤낮의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는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기도 하며 평균 강우량은 1,200mm로서 다우(多雨)지역에 속하는 데다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능선이 멀리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받고 있기 때문이다.

눈꽃 산행으로 가장 인기 높은 코스는 당연히 비로봉 북릉을 따르는 사다리병창 길과 계곡길을 잇는 구룡사 원점회귀 코스다. 사다리병창 코스는 ‘사다리로 이어지는 절벽길’이란 의미답게 철사다리가 수시로 나타나고 가파른 능선길이지만, 눈꽃 터널과 더불어 비로봉~천지봉쪽 겨울 풍광 또한 멋지다. 게다가 당일로 비로봉을 오를 수 있는 최단등로이기도 해 치악산을 찾는 등산인 대부분이 몰리는 코스다.

구룡사 탐방안내소를 출발해 아름드리 거목이 우거진 산책로를 따라 10분쯤 걸으면 구룡사 산문 입구인 원통문(圓通門)이 나오고, 100m 더 들어서면 구룡사 절 앞이다. 여기서 세렴폭포 앞 통제소까지 40분 거리는 신사화를 신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산길이 널찍하고 평탄하게 이어진다.

세렴통제소를 지나면서 산길은 코가 땅바닥에 닿을 듯 가팔라진다. 철다리 건너 갈림목에서 시작되는 사다리병창 길은 초입부터 급경사 사다리다. 거의 전구간 내리막길은 한 군데도 없는, 오로지 오르막 일변도인 길이다. 그래도 하나 하나 분재처럼 아름답게 자란 소나무를 감상하고, 간간이 나타나는 완경사지대에서 숨을 고르고 조망을 즐기며 오르노라면 비로봉까지 3시간 정도면 올라선다.

정상 돌탑을 구경한 뒤 하산은 돌탑을 거쳐 서쪽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10분만 걸으면 비로봉 통제소 안부로 내려서고, 여기서 북쪽으로 계곡길이 나 있다. 별다른 이름은 없고, 계곡으로 난 길이라 하여 계곡길이라고 부른다.


▲ 일망무제의 조망을 선사하는 치악산 정상 비로봉.
계곡길은 바윗덩이들이 깔려 눈에 덮이면 미끄러지기 십상인 구간이다. 경사가 급한 구간이나 계류를 건너야 하는 곳에는 철사다리가 설치돼 있으므로 큰 위험은 없다. 계곡길이 거의 끝날 즈음 길 왼쪽 아래에 높이 15m쯤 되는 기운찬 칠석폭포가 있으며, 그 후 2~3분이면 사다리병창 출발점에 다다른다. 계곡길 하산에는 2시간이면 넉넉하다.

치악산 관리사무소에서는 등산인들의 안전산행을 위해 세렴통제소에서 오후 1시부터 비로봉을 향한 산행을 통제시키고 있지만, 구룡사 입구 탐방안내소를 출발, 되돌아오기까지는 매표소~세렴폭포 1시간, 사다리병창 등행 3시간, 중식 1시간, 계곡길 하산 2시간, 세렴폭포~매표소 1시간 하여 총 8시간은 잡아야 하므로 해가 짧은 겨울철에는 서둘러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또한 사다리병창 길이든 계곡길이든 눈과 얼음으로 빙판진 구간이 많으므로 반드시 아이젠을 착용하고, 등산용 폴을 지참하도록 한다. 구룡사측에서는 문화재 관람료를 2,000원씩 받고 있다.

구룡사 원점회귀 코스가 그나마 가벼운 자세로 오를 수 있는 코스라면 남대봉에서 비로봉까지 잇는 능선 종주 코스는 도전적인 자세로 산행에 나서는 코스다. 치악산 주능선은 치악재에서 남대봉, 향로봉을 경유 주봉인 비로봉에 오른 후 매화산까지 잇는 긴 산행코스지만 치악재~영원골 갈림목 구간과 비로봉~천지봉~매화봉 구간은 산행이 허용되지 않아 실제 산행이 가능한 구간은 남대봉~비로봉 능선이다.

그렇더라도 성남 탐방안내소~남대봉 약 2시간, 남대봉~비로봉 약 4시간, 비로봉~구룡매표소 약 3시간을 합치면 눈길이 잘 뚫린 상황일지라도 10시간 이상 잡아야한다. 산행중 시간이 모자라거나 체력이 떨어지면 고둔치나 입석대 갈림목에서 원주시내 방면으로 하산하도록 한다. 대개 1시간이면 사찰이나 입구까지 내려설 수 있다. 치악산 능선은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많이 쌓여 있을 적이 많으니 장비를 철저히 갖추고 나서야 한다.

교통 ·숙박

원주까지는 각 지역에서 운행하는 고속·직행버스 또는 청량리역에서 1일 16회(07:00~22:40) 운행하는 중앙선 열차 이용(1544-7788). 2시간10분~2시간30분 소요. 요금 무궁화호 6,800원.
원주시내에 위치한 시외버스터미널 앞 버스정류소에서 구룡사와 상원사 입구인 성남행 시내버스가 다니고 있다. 구룡사행은 2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41, 41-2번 시내버스 이용. 30분 소요, 요금 1,100원.
성남행은 06:50(상원사 입구 회차 시각 08:20), 08:50(10:20), 12:20(13:50), 15:20 (16:50), 18:50(20:00) 출발하는 23번 시내버스 이용. 1시간20분 소요(교통시각 문의 태창운수 033-762-4355).

구룡사 입구에는 유스호스텔, 여관, 민박 등의 숙박시설이 많이 들어서 있다. 문의 치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전화 033-732-5231. 성남 일원 민박집 : 매표소 위쪽 치악산민박(전화 033-762-7979) 4인 기준 30,000원, 매표소 아래 소롯길(763-4071) 4인실 기준 50,000원. 산채비빔밥(7,000원) 돌솥밥백반(10,000원).

[치악산 상원사 르포] 꿩의 보은설화 어린 깊은 산속 절집
금대리~영원사~남대봉~상원사~성남리 코스 답사

날 선 바람이 숲을 벤다. 몸서리치는 나뭇잎에 스미는 붉은 빛. 생장을 멈춘 식물이 마지막 열정을 뿜어내고 있다. 만산홍(滿山紅)! 가을의 축제가 한창이다. 요즘 단풍은 우리 땅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것이다. 앞마당의 작은 수풀에도, 공해에 찌든 도로변 가로수에도 단풍은 든다. 그러나 역시 차고 맑은 공기가 빚어낸 높은 산의 단풍빛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 취재팀이 상원사 입구의 자그마한 일주문을 통과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단풍이 화려함을 뽐낼 수 있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색깔을 입기 시작해 2주면 절정에 이르고 곧 그 생을 마감한다. 혹 이즈음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제대로 빛을 내기도 전에 낙엽 되어 뒹굴 운명이다. 생명력 짧고 가냘프기에 단풍의 화사함은 더 애끓는 모양이다.

11월은 낮은 곳의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다. 하지만 단풍의 절정은 곧 끝을 의미한다. 저기 멀리 산으로 눈을 돌려보자. 아래쪽 산자락에는 원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남아 있어도 위쪽은 낙엽이 진 곳이 많다. 특히 해발 1,000m 이상의 고지대는 예외 없이 초겨울 풍경이다.

▲ 상원사 가는 호젓한 산길. 짙은 숲과 계곡이 만들어낸 자연미가 일품이다.
산에서 만나는 1,000m 고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이 높이가 낮은 산과 높은 산이 구분되는 기준이 된다. 산의 높이가 1,000m를 넘어서면 공기부터 다르다. 대도시의 공해도 범접할 수 없어 언제나 청정한 대기를 만날 수 있다. 산 아래와 달리 기온도 낮아 가을철 해질 녘이면 거의 초겨울 날씨다. 그만큼 단풍도 빨리 들고 먼저 지게 된다.

이번 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 치악산 상원사가 목적지다. 상원사의 고도는 약 1,100m로 해발 1,244m인 설악산 봉정암에 비해 낮다. 하지만 부속암자가 아닌 사찰 중에는 상원사의 고도가 가장 높다. 게다가 치악산 이름의 기원이 된 꿩의 보은설화가 전해오는 곳이라 유난히 관심을 끈다.

사찰은 산중 인간의 거처 가운데 가장 유서 깊고 수도 많다. 이처럼 절이 산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래도 절에 대한 탄압이 저잣거리보다는 미치기 어려워 산속에 사찰이 많이 남게 됐다는 추정이다. 산은 또한 속세의 간섭을 멀리 할 수 있어 수도와 공부를 위해서도 좋은 장소다. 산과 절의 밀접한 관계는 이렇게 오랜 전통을 지녔다.

단풍 시작하기 전후가 가장 호젓해

상원사(上院寺) 가는 길은 푸르렀다. 한 달 앞서 가는 산행이라지만, 기대했던 단풍에 대한 환상은 산산이 깨졌다. 하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단풍이 짙으면 산사 가는 길에서 느껴 보려던 고즈넉함 대신 인파에 시달릴테니 말이다. 오히려 이렇게 단풍 들기 전과 후가 조용하고 한적해 걷기 좋다.

▲ 낙엽이 수북한 것을 보면 분명 가을인데 숲은 푸르기만하다. 남대봉으로 오르는 산길의 설익은 가을 분위기.

산행은 금대리에서 시작했다. 보통 상원사로 오르는 이들은 성남리에서 출발한다. 대중교통이 편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산행거리가 짧기 때문이다. 성남매표소에서 상원사까지는 3시간이면 여유 있게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산사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 짧게 잡을 수는 없는 일. 취재팀은 영원사에서 남대봉 줄기를 넘어 상원사로 이어지는 코스를 잡았다.

출발이 조금 늦었다. 그래도 오름길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이 좋은 가을의 하루를 만끽하려면 여유가 필요하다. 어느덧 짙어진 바위색과 계곡빛에 눈길이 머문다. 바람 따라 그네를 타는 나뭇잎이 경쾌한 마찰음을 빚어낸다. 역시 성큼 다가온 가을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템포를 조금 늦추면 평소에 스쳐지나가던 것들이 하나 둘 정겹게 말을 걸어온다.

금대리 자동차야영장부터 걷는다. 흙이 깔린 산길은 어느새 거친 포장으로 바뀐다.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역시 호젓하다. 이제 상류에 남은 영원사밖에 없다. 주중이라 그런지 절을 오가는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포장도로도 이렇게 오붓한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지만 하산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상원사로 출발한 이들이라면 이즈음 금대리에 도착할 시간이다. 교통이 좋지 않아 금대리 코스가 인기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한적할 줄은 몰랐다.

▲ 영원사 입구에서 본 대웅전 현판과 지붕.

포장도로 끝의 영원사에 닿는다. 절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보인다. 잠시 망설이다가 대웅전을 향해 발을 옮긴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이번 기회에 둘러보기로 한다. 가파른 산자락을 깎아 만든 평지에 웅장한 크기의 대웅전이 서 있다. 건물 앞 공터에서 보는 금대리쪽 조망이 멋지다. 잔잔한 산줄기들이 서로 겹치며 만들어내는 원근감에 한 폭의 동양화가 펼쳐진다.

영원사 입구에서 다리를 건너 숲으로 접어든다. 하늘을 가리는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간다. 길 옆에서 얼음처럼 찬 계곡물이 졸졸대며 속삭인다. 조금씩 좁아지며 깊어지는 계곡은 그 끝을 짐작키 어렵다. 사실 영원사 계곡은 수려함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단아하게 풍기는 그윽한 자연미가 더 매혹적이다.

치악산 이름의 유래, 꿩의 보은설화

▲ 영원사 계곡의 절벽 옆으로 난 철다리. 심오한 계곡미가 눈길을 끈다.
양쪽으로 수직 절벽이 형성된 좁은 계곡을 통과한다. 철다리가 놓여 있지만 갑자기 물이 물어나면 통과하기 어려운 장소다. 영원사 계곡에서는 이런 내밀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을 자주 보게 된다. 물줄기가 잦아들 즈음 커다란 바위가 계곡 양옆에 기둥처럼 서 있다. 이 바위는 가파른 산길의 초입을 의미하는 이정표 역할을 한다.

크고 작은 돌이 쌓인 급경사는 거의 1km 가까이 이어진다. 잔인하게 가파른 길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진을 뺀다. 하지만 이 고빗사위를 넘지 않으면 상원사로 갈 수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전진한다. 온몸이 땀에 젖어들 즈음 남대봉 능선 갈림길에 앉는다.

폐부를 찌르는 얼음장 같은 바람에 기침이 터져나온다. 높은 산에서 겨울을 만난 것이다. 웃옷을 꺼내 입고 초콜릿으로 허기를 달랜다. 이제 길은 상원사를 향해 아래로 흐른다. 산죽이 우거진 산자락을 헤치고 잠시 내려서니 금대봉 갈림길에 이른다. 왼쪽 사면을 오르면 금대봉으로 연결되고 직진하면 곧이어 상원사다.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지형도에 금대봉이라 표기되어 있는 봉우리는 사실 망경봉(望景峰·1,181m)이다. 실제 금대봉은 망경봉 남쪽 1.5km 지점에 솟아 있는 1,187m봉(지형도 상에 시명봉으로 표기)다. 하지만 많은 지형도와 등산안내도, 심지어 이정표와 정상의 팻말에도 망경봉을 남대봉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제 옛 이름은 거의 사라져 버린 거나 진배없다.

조망이 볼 것 없는 남대봉은 생략하기로 하고 갈림길을 지나쳐 상원사 입구로 내달았다. 잠시 후 왼쪽으로 아담한 일주문이 보인다. 그 뒤로 육중한 산줄기가 감싸안은 우묵한 곳에 상원사가 자리하고 있다. 꿩의 보은 설화가 전해오는 바로 곳이다. 그 유명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상원사에서는 한번쯤 그 전설이 되새기게 된다.

▲ 산죽밭을 헤치며 상원사로 향하고 있는 취재팀.

옛날에 한 나그네가 과거를 보러 가는 위해 치악산 기슭을 지나던 중 구렁이에게 잡혀 먹힐 뻔한 꿩을 구해주게 된다. 그 날 밤 나그네는 외딴 민가에서 하룻밤 지내다가 남편의 복수를 하기 위해 나타난 암쿠렁이의 습격을 받게 된다. 구렁이는 날이 밝기 전 상원사의 종이 세 번 울리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제안을 한다. 살기를 포기하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리던 나그네는 세 번의 기적 같은 종소리를 듣게 된다. 구렁이는 약속을 지켰고, 날이 밝아 종루를 찾아가보니 꿩 세 마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나그네에게 입은 은혜를 갚은 꿩의 이 이야기는 치악산의 이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치악산은 원래 단풍이 뛰어나다 하여 붉을 ‘赤’ 자가 들아간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리던 곳인데, 보은 설화가 전해진 이후 꿩 ‘雉’ 자를 써서 치악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상원사 범종각 옆에는 치악산과 상원사에 얽힌 설화를 전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람 사는 모습 묻어나는 상원사 계곡

상원사 대웅전 앞에 서면 치악산 남부 일대가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산 자락에서 툭 튀어나온 넓은 암반 위 절집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은 독특하기 이를 데 없다. 날씨가 좋으면 남쪽으로 신림뿐만 아니라 제천, 영월, 충주 일원의 산과 들이 가마득히 펼쳐진다. 산자락이 단풍에 물들거나 설화가 만발하면 이곳에서 느끼는 조망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상원사는 치악산 남부 일대에서는 가장 조망이 좋은 장소다.

▲ 치악산 남부 일대를 조망에 최고의 장소인 상원사 대웅전 앞뜰.

일주문 근처의 샘터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내리막길을 따라 하산을 시작했다. 상원사에서 성남리 매표소까지는 빠듯하게 잡아 약 2시간 거리. 구름이 적지 않아 온종일 늦은 오후 같은 분위기가 계속됐는데, 이러다 밤이 될 모양이다. 쌍룡수를 스쳐지나 계속된 계단길에서 속도를 낸다. 성남매표소에서 금대분소로 돌아가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차편을 얻어타려면 퇴근시간 전에 상단 주차장에 닿아야 한다.

널찍하게 잘 조성된 계단길은 경사도 완만해 영원사 계곡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코스라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원사까지는 등산객과 함께 신자들의 왕래가 잦기 때문에 길이 더 좋았다. 계단은 걷기 적당한 높이로, 둥근 나무를 촘촘히 세워 박고 중간에 흙을 채워 세심하게 마무리해 두었다.

▲ 상원사 계곡의 너럭바위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백은식씨.
깔끔한 계단길이 끝나자 길은 계곡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계곡은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늘이 짙었다. 게다가 이리 저리 물을 건너면서 맞게 되는 서늘한 바람에 흐르던 땀이 쑥 들어간다. 하류로 내려가니 수량이 늘어나며 계곡 곳곳에 작은 폭포들이 얼굴을 내민다. 낙엽이 둥둥 떠다니는 물가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마지막 철다리를 건너 조금 내려서니 갑자기 시야가 확 터지면서 널찍한 공터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아래로는 계곡과 나란히 하는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포장과 비포장이 교차되는 이 길을 따라 2.5km를 더 내려가면 성남매표소에 닿는다. 시간이 제법 걸리는 구간이다. 취재팀은 다행스럽게 차를 얻어타고 이 지루한 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성남매표소까지 길을 따르는 사이 골짜기 양옆으로 민박집과 찻집이 제법 많았다. 한강변에서 본 듯한 근사한 별장도 눈에 뜬다. 산사는 결코 속세와 분리된 신선의 세계가 아니다. 사람도 있고 자연도 있고 부처의 마음도 있는 장소다. 그러니 그곳에 가는 길에서 완벽한 자연의 호젓함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겠다. 사람 사는 모습이 묻어나는, 하지만 너무 번잡하지 않은 길이면 충분하다. 바로 그런 곳이 상원사 가는 길이다.

# 산행길잡이

성남매표소~상원사 코스가 비교적 유순해
영원사 계곡의 내밀한 자연미도 멋진 볼거리

상원사로 가려면 보통 성남매표소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1시간은 도로를 걷고, 다시 2시간은 산길을 따라 오르게 되는데, 전체적으로 길 상태가 좋고 평탄한 편이다. 막판에 40분 가량 계단길이 나오는데, 그리 급한 편이 아니고 잘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는 않다. 상원사 밑 삼거리에서 100m쯤 아래 샘터에서 물을 구할 수 있고, 경내에도 탐방객을 위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두었다.

취재팀의 답사 경로인 영원사를 통해 산을 넘을 생각이라면 약간 힘을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주능선에 닿기 전 막판 1km 구간의 급경사가 보통 벅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대리매표소를 기준으로 하면 상원사까지 시간은 거의 비슷하게 걸린다. 다만 버스를 이용할 경우 금대계곡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들어가는 시간을 감안해야 한다. 식수는 영원사나 상원사에서 구할 수 있고 총 산행시간은 5~6시간 정도 걸린다.

# 교통

치악산행 교통편은 원주가 기점이 된다. 금대리까지는 원주시 장양동을 출발, 고속버스터미널과 원주역을 거쳐 신림까지 운행하는 21~25번 시내버스 이용, 금대리 입구에서 하차해 매표소까지 도보로 이동하면 30분쯤 걸린다.

성남리는 원주 자양동 종점서 1일 5회(07:20, 09:25, 12:25, 15:25, 18:55) 출발하는 성남행 21번 태창운수 시내버스 이용. 성남에서 원주행 버스는 1일 5회(08:30, 10:30, 14:30, 16:30, 20:00) 출발. 약 50분 소요, 요금 600원. 연송정 버스종점에서 매표소까지는 약 1.2km 거리. 또는 원주에서 수시 운행하는 신림행 시내버스나 시외버스를 이용해 신림으로 간 다음 여기서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경유 영동고속도로 강릉 방면으로 진입한다. 원주 직전 만종 분기점에서 대구 방면 중앙고속도로를 탄 뒤, 신림 나들목에서 빠져나온다. 금대리로 가려면 신림을 거쳐 원주 방면(5번 도로)으로 진행하다 금대계곡 입구에서 우회전해 끝까지가면 된다.

성남매표소는 신림 나들목에서 영월쪽으로 우회전해 1km쯤 진행하면 왼쪽으로 치악산 상원사 입구가 보인다. 이 갈림길에서 좌회전한 뒤 끝까지 가면 성남매표소가 나온다.

# 숙박(지역번호 033)

성남매표소 일대에 민박집과 식당 등이 산재해 있다. 치악산민박(762-7979), 소롯길(763-4071), 봉이민박(762-3391) 등. 성남매표소 전화 762-5695.

금대리 일원의 민박집들은 대개 음식점을 겸해 운영하고 있다. 금대장여관(763-6663~4), 청솔가든(763-8960), 치악산장(762-4338) 등. 치악산국립공원 금대분소 전화 763-5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