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 폭의 벽화로 다가온 담쟁이덩굴

벽은 나에게 사랑이에요
[포토에세이] 한 폭의 벽화로 다가온 담쟁이덩굴
김현(dasolsori) 기자
ⓒ 김현
난 담쟁이덩굴을 무척 좋아한다. 여리디 여린 몸에서 수많은 줄기들을 뽑아 하늘로 오르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삶의 생동감은 물론 그 근성을 볼 수 있어서다.

'지금상춘등(地錦常春藤)'이라고 불리기도 한 담쟁이는 바위나 나무줄기, 돌담이나 높다란 벽을 타고 올라간다. 여름엔 초록의 시원함을 선사하다가 가을이면 촘촘히 비단을 수놓듯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한 폭의 벽화를 그리기도 한다.

담쟁이덩굴은 어혈을 풀어주거나 관절에도 효험이 있어 한약재로 쓰이기도 하지만, 담쟁이덩굴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효용성보다는 그의 의지력 때문이다.

▲ 여백
ⓒ 김현
담쟁이는 홀로 서지 못한다. 어린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스스로 서질 못하고 평생을 누군가에게 기대이며 산다는 것은 굴욕이나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담쟁이덩굴을 보면서 누구도 굴욕이나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그의 삶의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쟁이는 자체로 떳떳함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세상에 태어날 때 마른 땅을 아장아장 걷다가 홀로 설 수 없음을 인식할 때쯤 담쟁이는 삶을 함께할 동무를 찾는다. 그의 동무는 바위이거나 돌담이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들이다.

▲ 낮은 삶도 내 삶의 하나인데....
ⓒ 김현
그와 함께 할 동무들은 음지에서 묵묵히 자신의 위치를 찾아 서 있는 것들이다. 그가 함께하는 것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꽃이나 푸른 용태를 자랑하는 아름드리나무가 아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바위, 쓰러질 듯한 담벼락, 무표정하게 세상에 알몸 드러내놓고 서 있는 건물의 벽, 아님 세상살이 다 살고 고목이 되어가는 나무이다. 담쟁이덩굴은 그들을 감싸 안고 품으며 오른다. 외롭고 쓸쓸한 자들에게 가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손을 잡고 살아간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공존의 모습을 평화롭게 유지해 간다.

▲ 무얼까? 그가 그린 것은.
ⓒ 김현
또 담쟁이덩굴은 생명이 없는 것에 자신의 몸을 주어 생명의 것으로 만든다. 그렇다고 담쟁이 스스로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몸을 주어 서로 생명을 주는 삶을 담쟁이는 살고 있는 것이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을 보고 있으면 창조성에 놀라게 된다. 담쟁이덩쿨은 스스로 몸짓으로 화가가 되기도 하고, 조각가가 되기도 한다. 그가 그리고 만든 것들은 살아서 움직인다. 그래서 때론 고구려의 벽화에 나오는 그림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담쟁이는 채움과 비움의 미학을 발휘할 줄도 안다. 비단 실로 한 땀 한 땀 온 벽면을 채우기도 하고, 조선의 그림처럼 여백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하기까지 온 정성을 다한다. 작은 일에도 크게 상심하고 좌절하는 우리와 다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담쟁이덩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삶의 형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한다.

▲ 어디까지 오르려나...
ⓒ 김현
나에겐
벽이 사랑이에요.

그림자 같은 사랑을 위하여
숨결 한 올 한 올
수놓고 있으면
허공은 나를 품은 담이 된답니다.

겨우내 참았던 슬픔
푸른 이슬로 뚜욱뚝 키우다
가을이 되면 내 사랑은
이렇게 위로 위로 올라간답니다.

그러나 위로 가는 것만이 내 사랑은 아니에요.
때론 상상의 무지개를 풀어
허공의 벽에 삶의 흔적들을 남기고
질기게 살아온 내 발자국
빈 여유를 만들기도 한답니다.

벽은
나에게 사랑이랍니다.

때론 허공을 넘기도 하지만
내 사랑은 여전히 담벼락이기에
남몰래 숨결 한 올 한 올
뿌리며 꿈을 부른답니다.

- 졸시 '담쟁이덩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