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를 가다.
사진/다큐 2009/07/22 11:40 해를그리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였던 벌교를 찾게 되었다. 소설을 막 읽었을 때의 감동이나 잔상들은 잊혀진지 오래다. 그 기억을 되새기고자 10권이나 되는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쉽게 선택한 것이 청소년을 위한 만화 태백산맥을 읽는 것이었다. 그렇게 간략하게 소설의 줄거리를 되새긴 후 벌교를 다녀왔다.
장마기간이라 태풍이 온다 했고 남도지방은 비바람이 몰아칠거라 기상청은 예보했다. 하지만 역시나 기상청의 예보는 무색해지고 벌교는 간혹 잔비가 내리기는 했지만 남도 특유의 끈끈하고 무덥다고 할까 그런 날씨였다.
* 박스속에 나오는 안내문은 태백산맥 문학관(http://tbsm.boseong.go.kr/)의 내용을 참조했다.



벌교에는 재래시장과 4일 9일에 5일장이 선다. 가는 날이 9일 장날이었다.


태백산맥 문학관
태백산맥 문학관(http://tbsm.boseong.go.kr/)은 소설『태백산맥』을 통해 벌교를 찾는 방문객들에게 보다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하여 2008년 11월 개관하였다.


소화의 집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 태백산맥(1권 17쪽)에 나오는 무당 소화네 집의 모습이다. 당시의 무당집은 실제로 제각으로 들어서는 울 안의 앞터에 있었다. 집 둘레로는 낮춤한 토담이 둘러져 있었고, 뒤로는 풍성한 대나무 숲이 집을 보듬듯 하고 있었다.
뒤란으로 도는 길목의 장독대 옆에는 감나무 도 한 그루 서 있는, 소설에서 그려진 소화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담 한 그런 집이었다. 그런데 1988년 무렵 태풍에 집이 쓰러졌고, 토담의 일부와 장독대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밭으로 변했다.
그 후 주차장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소화의 집은 아예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을 2008년에 보성군이 복원하였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 집의 신당에서 정참봉의 손자 정하섭과 무당 월녀의 딸 소화가 애틋한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길고도 아픈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로 복원한 집은 너무나 새집이어서 애틋한 무엇인가를 느끼기에는 뭔가 거리감이 있다.

현부자네 집
중도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제석산 자락에 우뚝 세워진 이 집과 제각은 본래 박씨 문중의 소유이다. 이 집의 대문과 안채를 보면 한옥을 기본 틀로 삼았으되 곳곳에 일본식을 가미한 색다른 양식의 건물로, 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꽤 흥미로운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현부자네 집으로 묘사되었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태백산맥 1권 14쪽)」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처음 등장하는 집이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와 이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지게 된다.

현부자집 건물은 한옥에 일본식이 가미된 색다른 형태로 대문 위에 누각이 설치되어 있다. 그 당시 누각에 올라서면 순천만으로 들어오는 배들이 내려다 보였다 한다.


작가 조정래가 어린시절 소설가의 꿈을 키웠던 집이다. 당시에는 초가지붕이었지만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뀌었고, 처마 끝을 이어 방을 한 칸 더 들였을 뿐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작가는 이 집에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까지 살았었다. 당시 벌교상업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었던 아버지(시조시인 조종현)가 채점한 시험지를 뒤집고 접어서 만들어준 문집에 자작 동시와 동화를 썼던 것도 이 집에서다.
어린시절 여순사건과 6․25를 겪으면서 살육과 전쟁의 공포에 질렸던 소년이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평온을 느끼며 작가로서 풍요로운 정서를 갖추게 해주었다는 곳이 벌교이고, 이 집이다.

회정리 교회
회정리 1구의 교회는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김형모 목사와 신도들의 성력으로 회정리 672번지에 건립된 60평의 석조 예배당이다. 소설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그려진다.
학교를 그만두게 된 이지숙이 야학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 이 사 팔......” 모두의 목소리가 조화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지숙은 그 울림이 슬픔인 듯 서러움인 듯 가슴을 적셔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난이란 육신을 배고프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다. (태백산맥 4권 100쪽)」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의 일이다.

회정리교회는 지금은 어린이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집안 소유의 집이다. 안채의 대문 옆에 딸린 아랫채에서 초등학생이었던 작가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는 것은 작은 흥미를 일으킨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볽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겄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태백산맥 1권 141쪽)」
사랑채, 겹안채, 창고 자리, 장독대, 돌담 등 그 모든 형태와 규모들이 대지주의 생활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특히 안채 오른쪽 앞부분 귀퉁이에 있는 돼지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대주주라 하더라도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려고 돼지를 길렀음을 알 수 있다. 생활의 알뜰함과 환경오염을 막고자 했던 살아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 집에서도 오른쪽으로 고읍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 자리를 무심코 잡은 게 아님을 보여준다.



파란대문. 저 대문을 두드리면 누군가 옛사람이 나올 것 같다.





돼지우리가 있던 흔적
횡갯다리(홍교)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놓은 다리, 우리말큰사전․한글학회 지음)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ꡐ뗏목다리ꡑ로써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범우는 홍교를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 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가지에 붙어있는 하나씩의 잎사귀인 셈이었다. (태백산맥 1권 257쪽)」

중도방죽
작가는 소설에서 간척지의 방죽을 쌓던 때, 그 어렵고 뼈 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恨)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태백산맥 4권 306쪽)」
들판을 한스럽게 바라보면서 방 노인이 자신에게 했던 얘기를 되새겨가며 이지숙은 일부러 방죽을 걸어 선수머리까지 갔다가 되짚어 돌아온다.

방죽 오른쪽이 순천만이고 왼쪽이 간척지다.


소설에서 염상구를 가장 인상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곳이 이 철다리다.「세상이 다 알게 친일을 했던 자들이 무슨 명목을 붙여서든지 애국의 탈을 만들어 쓰려고 급급한 판에 염상구 정도의 이력 변조는 아주 양심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태백산맥 1권 189쪽)」 철교 아래 선창에서 물건을 훔쳐내다 들켜 일본 선원을 찔러 죽이고 도망쳤다가 해방과 함께 벌교로 돌아와서는 용감하게 일본놈을 처치한 독립투사로 변신한 염상구. 그는 장터거리 주먹패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땅벌이라는 깡패 왕초의 제의에 희한한 결투를 벌인다.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내리는지 담력을 겨루어 여기서 지는 자는 영원히 벌교바닥을 뜨기로 하고. 「철교의 교각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그들은 중앙 교각 위에 서 있었다. 기차가 “뙈액~” 기적을 울리며 검은 괴물처럼 철교로 진입했다. 그 순간 기차와 그들과의 거리는 교각 네 개의 간격으로 좁혀졌다...... (태백산맥 1권 188쪽)」


별교 특산 음식
여행의 재미중 빠질 수 없는 것이 그곳의 특산 음식이다. 전라도 지방이야 워낙 음식맛이 좋기로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벌교는 꼬막과 짬뚱어로 유명하다.

고막부침

참고막

새고막
짱뚱어라는 이름의 유래는 짱뚱어는 동면을 하는 물고기인데 겨울이 지나고나도 3-4월이 되어서나 잠에서 깨어난다고 잠이 많아서 짱뚱어가 되었다고 벌교를 안내해주시는 분이 말하셨다. 짱뚱어는 갯벌에 사는데 동작이 무척 빨라 짱뚱어를 잡으려면 홀치기낚시로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잡는단다. 그러면서 강조하는 것이 짱뚱어는 힘이 좋기 때문에 남자가 먹으면 틀림없이 효험이 있다고 남자는 꼭 먹어야 한단다. 그게 무슨 말일까?

짬뚱어 사진을 찍으려는데 잠시도 가만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짱뚱어탕


우리가 흔히 보게 되는 조정래작가의 사진은 위 사진들 중 맨 오른쪽 사진이다.
내가 익숙한 사진도 제일 오른쪽 사진이다. 그래서 조정래작가가 워낙에 나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태백산맥문학관에 전시된 위 사진에서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위 사진 중 왼쪽 사진이 83년도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이 89년도 모습이다.
6년의 시간동안 폭삭 늙어 버렸다.
청년 조정래가 중늙은이 조정래로 된 것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 모든 생명은 시간이 흐르면 늙어가고 그리고 죽는다.
그러기에 시간이 흐르면서 늙어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늙어도 너무 늙어버렸다.
그 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작가의 열정을 불사른 때문일까?
소설 태백산맥이 <현대문학>에 연재되면서 작가 조정래는 국보법 논쟁의 태풍의 핵이 되었다.
조선일보는 월간조선에 특집 기획기사를 쓰는 등 연일 소설 태백산맥이 이적 표현물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소설 태백산맥은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았다.
또 그 기간동안 우익단체들로부터 수많은 협박을 받았다.

위 글은 조정래작가가 작성해 놓은 유언장이다. 수시로 걸려드는 협박 전화에 생명의 위협을 오랫동안 느꼈고 언제 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미리 유언장을 작성했다.
헤아릴 수 없는 광주민중의 피를 재물 삼아 정권을 잡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국보법적용을 위한 재판 그리고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빨갱이로 여론몰이, 늦은 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우익단체들의 협박 등등이 한 인간을 짧은 시간에 저렇게 폭삭 늙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저들로 인해 피폐해지는 한 영혼을 힘들이지 않고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저런 일이 오래전 야만의 시대에 벌어진 과거의 일이 아니다.
국보법은 여전히 살아있고 인간의 사상과 표현을 검열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그 때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작가의 작품조차 저러한 탄압과 위협을 받는데 일개 시민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얼마전 우리는 인터넷에서 미네르바라는 논객이 자신이 쓴 글로 인하여 검찰의 표적수사를 당하고 결국은 무혐의로 풀려나는 것을 보았다. 결과는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그 기간동안 국가권력 기관을 상대로 하는 일개 시민의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알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특정인을 사법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국가 권력기관에 대한 두려움으로 스스로 의식을 검열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는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구속되어지고 있다. 또 이런 저런 법들을 만들어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더 이상의 것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헌법에 보장한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만이라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보안법은 철폐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