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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코무덤

'베어진 코 영수증' 들어보셨나요?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1)
김영조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지난여름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과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여행은 주로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일본 땅 구석구석에 다니며 한반도와 관련된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이번부터는 답사한 곳을 기록하여 많은 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글은 그 첫 회로 일본 교토시의 ‘코무덤’을 찾아 지금 국내외에서 ‘귀무덤’으로 잘못 전해지고 이것이 다시 확대, 재생산되는 현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파헤치는 글을 올립니다. 각 꼭지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의 열띤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윤옥· 김영조 두 사람이 자료, 문헌, 사진 등을 정리한 “쉬운 글쓰기”를 통해 여러분을 뵙고자 합니다. 많이 읽어주시고 고민도 즐거움도 모두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

* ‘톺아보기’는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살피다”의 토박이말입니다.

[글쓴이]
* 이윤옥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 김영조 (pine0826@gmail.com)(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 이 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참고될 만한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위 누리편지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이 필요하신 분은 꼭 미리 알려주십시오.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이 알려졌듯이 일본의 교토하면 으레 단골로 소개되는 곳이 금각사, 용안사, 청수사 등의 절과 천만궁, 야사카신사 등의 신사 그리고 33간당(三十三間堂,산쥬산겐도)의 불상이나 철학의 거리 등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여행 책자라면 빠짐없이 소개되고 있다. 말도 안통하고 지리도 어두운 관광객들은 아예 여행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나서거나 나름대로 배낭여행을 한답시고 여러 책자를 사놓고 여행코스를 짜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책자에 소개된 곳 말고는 가 볼만한 곳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봉분 위에 얹은 만행의 현장 교토 코무덤 © 김영조

교토는 794년부터 400년간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서울이었기에 많은 유물 유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목조건축물인 33간당은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항상 구경꾼들로 붐빈다. 1,001구의 목조 천수관음입상은 하나하나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각 모습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불교미술을 감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호평 받는 곳이다.

그런데 그 가까운 곳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신으로 받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있고, 그 신사에서 길을 건너면 놀이터 옆에 정유재란 또 하나의 비극, ‘코무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경꾼들의 인기코스 33간당을 뒤로하고 코무덤을 찾아가는 날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 땡볕으로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 했다. 어른 걸음으로 33간당에서 백발자국이나 될까 말까 한 곳이었지만 일행 중 한 명은 몹시 힘든 듯 발걸음이 뒤처졌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만 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코무덤이 바로 정유재란 때 우리 조상의 코를 베어다 묻어 원혼이 깃든 무덤이 아니던가? 놀이터 옆에 초라하게 자리 잡아 찾기도 어려운 코무덤. 그러나 코무덤은 들어가 참배할 수도 없게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로 붐비는 33간당과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이곳은 우리 일행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아 그저 적막강산일 뿐이다.

아아!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무덤 위로 따가운 7월의 태양만이 쏟아질 뿐 근처는 그저 주택가로 꽃을 사서 바칠 수도, 음료수 하나 살 만한 가게조차 없다. 어찌 이곳의 원혼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오? 후손된 우리가 과연 이렇게 코무덤을 방치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가슴이 아려올 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코무덤 앞에 서서 비명횡사하신 조상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그런데 코를 묻은 둥그런 봉분 위에는 무거운 돌 기념탑이 올려져있다. 진정한 사죄의 무덤이라면 감히 봉분 위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눌러 놓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은 또 한 번 천근만근이다. 조선의 무덤은 물론이요, 일본 천황가의 무덤에도 봉분 위에 돌덩어리를 내리누르는 만행은 없지 않은가! 지난 2005년 10월 20일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북간대첩비’를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이 비는 정문부 장군이 3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병 2만 8천을 무찌른 전공비인데 지난 100년 동안 일본 군신을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뒤편에 방치돼 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480킬로그램인 이 비에 무려 1톤의 머릿돌을 얹어놓았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이 슬픈 코무덤에도 비석이랍시고 돌덩어리를 눌러 놓았으니 만행은 또 다른 만행을 낳는가?

더욱이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쿄토시의 코무덤 안내판이다. 초등학생 책상만한 크기의 싸구려 철판에 흰색 페인트를 덧바른 판대기에는 ‘귀무덤’이라고 쓰고 가로 안에 ‘코무덤’이라고 써놓았다. 딴에는 친절히 한답시고 일본어 설명 밑에 한글로 번역을 해두었으나 코무덤이면 코무덤, 귀무덤이면 귀무덤이지 귀무덤하고 괄호 처리한 코무덤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교토시는 귀무덤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한다.

원래는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의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학자의 역사왜곡을 교토시가 용인해준 꼴이다. 그래도 양심에 걸렸는지 귀무덤하고 괄호치고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런 식이라면 대체 이 무덤 속에 있는 것이 귀란 말인가? 코란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이 무덤은 코무덤이다”를 외친 이가 있다. 그는 바로『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학민사)를 쓴 고 조중화 씨이다. 역사학자도 아닌 평범한 약사 신분인 그가 평생을 바쳐 오사카성 천수각,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구석구석을 수소문 끝에 찾아다니며 밝혀낸 코무덤의 진실에 대하여 우리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는 정유재란 당시 풍신수길의 부하로부터 받은 ‘코 영수증’과 풍신수길이 해당 부대장에게 보낸 감사장을 결정적인 증거로 내놓는다.
▲ 교토시청이 세운 안내 팻말에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쓰 고 멋쩍은지 가로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고 써놓았다. © 김영조

수많은 문헌과 자료 속에는 풍신수길의 코베기 명령에서부터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날라다 묻은 기록까지 완벽한 증거품이 있다. 그 자료 속에는 어느 한 곳에도 귀라는 말은 없으며 코를 베었다는 기록뿐이다. 따라서 그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은 귀가 아니라 분명한 코라고 조중화 씨는 밝히고 있으며 일본 측 문헌에도 모두 코무덤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일어난다. 지난 8월 20일 자 중앙일보에는 <타국서 400년 조선의 넋, 이제 한 푸시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지난 13일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이사장 한양원)가 그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14일 자 연합뉴스엔 <“만행 사과하고파”…‘귀무덤’ 지킨 日노인>이란 기사가 보인다. 기사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왜군들이 조선인 12만 6천여 명의 귀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와 묻어놓은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이다”라고 썼다.

그런가 하면 2007년 10월 1일 자 연합뉴스 기사엔 <임진왜란 귀무덤 400년 만에 안장>이란 제목으로 경남 사천시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 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 6천 명의 넋을 달랬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행사는 코무덤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온 것인데 17년 만에야 제대로 안치하고 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코무덤이 아니고 귀무덤이다. 이 자리에는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 기사를 보면 가키누마 스님은 이제 다 되었다는 뜻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어야 하며, 일본 쪽 가키누마 스님은 뭐가 다 되었다고 했는지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 넘어간 한국에 문제가 있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의 이런 보도 자세가 오늘날 한국인들로 하여금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이 아닌가?
▲ 코무덤 길 건너편에는 임진왜란의 원흉 풍신수길을 받드는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있다. © 김영조

한 시인은 ‘코무덤’이란 제목의 시에서 “코무덤 귀무덤 그게 그 말인데...”라는 말을 썼다. 그게 그 말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일본인의 역사왜곡을 두둔해주는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중화 씨가 생전에 애타게 부르짖었던 코무덤이 아무 보람도 없이 귀무덤으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아직도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귀무덤으로 둔갑시켜버렸는데 억울한 조상의 원혼을 달래주지도 못하면서 일본인들의 추악한 모습을 따라해야 하는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무슨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우선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보자. 한국인들이 코무덤을 자주 드나들고 교토여행을 안내하는 여행사들이 부지런히 코무덤을 안내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내 굴지의 여행 상품을 눈 씻고 봐도 코무덤 코스는 없다. 그저 놀이동산이나 거대한 건물, 그리고 대형 쇼핑몰들의 순례이다. 물론 그들 기업이 사업상 성공을 목표로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64돌을 맞는 광복절이다. 그러나 해방을 맞은 지 벌써 64돌이건만 일본에 의한 그리고 일본을 무심코 따라하는 한국인들에 의한 역사왜곡은 진행형이다. 우리가 적어도 정유재란 때 억울하게 죽고 코를 빼앗긴 선조의 후손이라면 최소한 코무덤을 계단이 부서질 만큼 드나들어 일본인들이 절대 역사왜곡을 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당시의 만행을 뉘우치고 코무덤을 한국으로 돌려주도록 해야 하며,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는 일에 나서게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귀무덤이 아닌 코무덤으로 반드시 부르도록 해야 하며 마음으로라도 코무덤에 꽃을 바쳐야 할 것이다.

풍신수길이 보낸 '코 감사장'…"소금에 절여 보내라"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2)
김영조
▲ 코 1,551개를 확실히 받았다는 코영수증 © 조중화

[번역]
받은 코의 수 1,551개 확실히 받았습니다.

1597년 9월13일

하야가와 나가마사

나베시마 가쓰시게 귀하


▲ 코영수증(왼쪽에는 3,369개를, 오른쪽엔 3,000개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조중화

400여 년 전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 땅에서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 중 “코 베기 명령”의 꼼짝없는 증거품이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베어진 코 영수증이다. 이렇게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선 현지에서 수집된 코는 7명의 관리가 소금에 절여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냈으며 이때 풍신수길은 소금에 절인 코를 손수 세어본 뒤 일일이 해당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 코감사장(풍신수길이 코를 보낸 부하 장수에게 보냈다.) © 조중화

[번역]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269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나가모리 나쓰가마사이에, 이시다미쓰나리, 마에다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1597년 9월 13일

풍신수길

시마쓰다다도요 귀하

수십 장의 코 영수증과 이에 대한 풍신수길의 감사장을 세상에 밝힌 사람은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1996, 학민사≫를 쓴 조중화 씨이다. 그는 오사카성 천수각에 보관된 코 영수증을 비롯하여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땅 곳곳을 누비며 그들만이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했다.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전쟁에 참가한 병사뿐만 아니라 부녀자들 목숨까지 앗아서 코를 베어 간 전대미문의 잔학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토의 코무덤을 지시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바로 풍신수길이란 자다. 그는 코만 베라 한 것이 아니다.

"굶주린 일본군이 식량징발을 위해 산에 숨어 있던 조선인과 전투를 했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눈과 코가 많이 나왔다“(御兵具衆 山より被参候 目鼻も数多い候。海南)"

위 글을 통해 심한 경우에는 눈알도 서슴없이 도려낸 것이 풍신수길 부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1597년 10월3일 시마쓰부대에 종군한 승려 멘고렌조보(面高連長坊)의 ≪高麗日記≫에 실린 글이다. 산으로 숨은 조선인들을 뒤쫓아 가서 숨겨놓은 식량을 내어놓으라며 선량한 사람을 죽여 코를 베고 눈알을 뽑은 것이다.

임진왜란의 명분이 명나라 정복이라면 정유재란은 한반도 남쪽 절반의 점령이 목적이었다고 일본역사는 말하고 있는데 이미 오랜 기간 전쟁에 따른 손실과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대부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건너왔지만 좀처럼 작전 개시를 안 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보내고 있자 풍신수길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597년 6월 15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코베기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라도에 가서 식량을 확보하고 여러 성을 공격한 뒤 충청도로 들어가서 사병 1명당 한 되(升)씩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이렇게 베어진 코는 풍신수길에게 전해졌는데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코베기는 1597년 8월 15일부터 두 달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남원성 전투에서 베어진 코가 교토시 방광사 앞에 묻힌 것이며, 그 숫자는 3,276개라고 조중화 씨는 밝혔다.(베어진 코 숫자는 <3편> 참조)

또한, 이때 베어진 코는 일개 장수들이 자신들의 전쟁공로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빼돌릴 수 없는 것이며 교토시에 있는 것은 귀무덤이 아니라 명백한 코무덤임을 조중화 씨는 강조한다. 그러면서 특히 한국인들이 자꾸 완화된 표현인 <귀무덤>이라 부르고 있음을 질책하고 있다.

알려진 풍신수길의 잔학성 -소실 죽이기-

소금에 절여 보내온 코를 일일이 손수 세었다는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어디가 끝일까? 잠시 풍신수길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보자.

그는 6살 때 하급무사 출신 아버지가 죽자 재혼해버린 어머니 손에 의해 2년 뒤 광명사란 절에 맡겨진다. 그러나 거친 성격으로 이 절에서 쫓겨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결국 15살에 가출하여 거리를 배회하다 당시 권력자인 오다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 권력에의 야욕을 불태운다.

풍신수길은 24살에 결혼하여 부인 외에 데리고 논 여자가 200명이 넘었다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한 이후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일본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몸소 경험한 인물로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풍신수길은 교토와 사카이에 사는 반반한 처녀와 과부를 끌어와 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중 한 여자가 몸이 안 좋아 친정으로 보내졌다. 여자는 자유의 몸이 된 줄 알고 병이 낫자 중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를 안 풍신수길은 질투와 복수심으로 이 여자와 남편을 잡아다가 허리 아래를 흙속에 생매장하여 굶어 죽게 한 뒤 목을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와 유모, 친정어머니를 불태워 죽였다고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28세의 조카 히데츠구를 죽이는 장면은 가히 망나니가 날뛰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53살에 얻은 아들이 3살 만에 죽자 풍신수길은 다시는 자식이 안 태어날 것으로 단정하고 성급히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풍신수길이 57살 되던 해 소실 몸에서 다시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조카에게 심복들과 함께 할복자살을 하도록 명했다. 이어 조카며느리를 포함한 히데츠구 일가와 처첩 4남 1녀의 자식 등 39명을 히데츠구의 목이 내걸린 무덤 앞으로 끌고 가 5시간 동안 처참하게 죽인 뒤 “반역을 꾀한 짐승무덤 <惡逆畜生塚>”이라는 팻말을 내거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다.

이러한 인간말종 풍신수길을 두고 교토 코무덤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가증스러운 글이 쓰여 있다.

“1597년 풍신수길은 일본 장병에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중략) 장병이 적의 목을 베어야 하나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냈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 지었다.”1597년 9월 28일 (조중화씨 번역)

▲ 코무덤 앞 한쪽에 세워둔 비석 (비석엔 풍신수길이 불쌍히 여겨 공양하고 코무덤이라 하였다고 쓰였다) ©김영조

이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相國寺) 주지 쇼다이에 의해 쓰인 것으로 풍신수길을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스런 장군”으로 왜곡한다. 또 조선인의 코를 벤 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라 일본군 병사의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벌어진 양 거짓표현하고 있다. 풍신수길의 잔인성으로 볼 때 코무덤이야말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장군의 “영원한 힘의 과시”로 남기고 싶은 그릇된 욕망일 뿐 결코 비명횡사한 조선인을 안타까이 여기고 한 짓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풍신수길 심복조차도 “코무덤”이라 밝힌 무덤이 어째서 “귀무덤”이 되었는가?

명백히 상국사 주지 쇼다이는 “코무덤”이라 밝혀두었는데 이것이 “귀무덤”이 된 까닭은 풍신수길 뒤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의 23살 브레인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잔인하다. 귀무덤으로 완화해서 부르자!”라고 한데서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한 교토시 표지판만 잘 살펴봐도 본래 이 무덤이 귀무덤인지 코무덤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둘은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귀베기로 왜곡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왜곡은 정유재란의 코베기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엄마 저게 뭐야?”…“저게 조선인 코란다”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3)
김영조

▲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운반하는 수레길가에는 수많은 사람이 나와서 구경했다고 한다. © 이무성

1997년은 풍신수길이 교토에 통한의 “코무덤”을 만든 지 400주년 되는 해였다. 그 400주년을 맞아 교토 코무덤 앞에서는 추도식이 열렸다. 이어서 임진왜란과 코무덤을 연구한 전문가들이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 이날의 토론회를 일본어판으로 엮은 한 권의 책이 1998년 발간된《수길·귀무덤·400년(秀吉·耳塚·四百年), 김홍규 편저, 일본 웅산각 , 1998(사진)》이다.

책 제목이 “耳塚” 곧 귀무덤으로 표기되어 있어 참으로 유감스럽지만 이 책에는 누키이(關井正之)씨를 비롯한 일본인 3명과 박용철 씨를 비롯한 3명의 한국인이 각각 임진왜란과 풍신수길 그리고 <코무덤>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우리는 이미 코무덤(2편)에서처럼 풍신수길이 정유재란의 전공(戰功)으로 베어 간 조선인의 코무덤을 귀무덤 으로 잘못 부르고 있는 것을 지적하며 한평생 <무덤>의 진실을 밝히려고 전력투구한 재야사학자 고 조중화씨의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를 소개한 바 있다.

교토시 코무덤 조성 400주년 학술토론회를 토대로 엮은 책 《秀吉·耳塚·四百年》에서 <코무덤>을 다룬 한일 학자들의 핵심 주제는,

“1) 귀무덤이냐? / 코무덤이냐?
2) 묻힌 코(귀)는 몇 개냐?”가 중심이었다.

▲ 임진왜란 400년 학술회의를 정리한 책 <수길·이총·400년>(왼쪽)교토 미미즈카 400년 학술토론회 사진, 아쉽게도 귀무덤이다. ©雄山閣出版(株)

그리고 토론회에서 연구자들의 주장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대체로 다음 부분에서는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1) 풍신수길이 “코베기 명령”을 내린 것은 정유재란 때이며 조선인의 코를 베어와 묻은 이 유는 후세에 자랑하기 위한 것이다.

2) 처음에 코를 묻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잔혹을 빌미로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귀무덤>으로 바꿔 부르자 한데서부터 <귀무덤>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 학술토론회 이전에도 메이지 시대에 이미 도쿄대학 호시노 박사가 그의 논문에서 《교토 코무덤은 귀무덤이 아니라 코무덤이다》라고 명확히 밝혔으며 나카오히로시 씨 역시 <코무덤>의 결정적인 1급 사료인 깃가와가 문서(吉川家文書)와 나베지마가 문서(鍋島家文書)에서 <코영수증>은 있어도 <귀영수증>은 없다며 <코무덤>임을 단정하고 있다.

또 결정적인 증거는 교토시에서 세운 <코무덤> 안내판이다.

▲ 1979년 교툐시에서 세운 안내판, "耳塚(귀무덤)"으로 표기(위)2009년 교토시에서 고쳐 세운 안내판, 가로 안에는 "鼻塚"(아래)2009년 9월 현재 사천 조명군총 옆에 잘못 세워진 "耳塚" 위령비 © 김영조

교토시 <코무덤>안내판에는 에도시대 학자 하야시라잔이 “너무 잔학하다.”라며 완곡한 표현인 <귀무덤>으로 하자 해서 이때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그 유래를 분명히 적고 있다. 이것은 하야시라잔의 주장 이전에는 “코무덤”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다. 또 하야시라잔의 말을 따라 이후 “耳塚” 곧 “귀무덤”으로 써놓았던 것을 교토시가 코무덤의 왜곡을 인정한 것인지 2009년 7월 19일 현재는 귀무덤(코무덤)으로 바꿔놓았다. 곧 “코무덤”을 추가해 넣은 것이다.

물론 풍신수길의 코베기는 그의 주군 오다노부나가에게서 배운 솜씨이다. 오다노부나가는 남녀 2,000명을 죽이고 신체에서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신장기(信長記)》에 있다고 나카오씨는 말하고 있다. 풍신수길이 오다노부나가 휘하에 있을 때 이미 코베기를 잘하여 우수한 장수로 뽑힌 적이 있으며 임진왜란 직후 일본의 기독교박해 때인 1596년엔 26명의 성인(聖人) 순교 때에도 코를 베게 한 사실이 있다.

또 토론회에서 금병동씨는《본산풍전전수안정부자전공각서(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라는 책의 내용을 들어 풍신수길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말고 죽이고 여자는 물론 갓 태어난 어린이까지 남기지 말고 죽여서 그 코를 베라”라고 했다면서 금수보다 못한 일본군의 행위에 치를 떨었다.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구 분

내 용

근거자료

베기 명령

1597년6월14일 풍신수길은 대마도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하여 우끼다와 소서행장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도록 명령함.

<귀베기 명령은 없었음>

《朝鮮の役》

영수증

깃가와, 나베지마 등 1급 사료에서 코영수증 많이 나옴. <귀 영수증은 단 1장도 없음>

《吉川家文書》

풍신수길의

코베기 전력

풍신수길은 오다노부나가 아래서 코베기 명수였으며 천주교 박해 때도 순교자들의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 밖에도 사람의 코를 벤 사실이 많음.

《信長記》

《義演准后日記》

코를 묻었으면 코무덤이요, 귀를 묻었으면 귀무덤이다. 이 문제는 잔학성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위의 정리된 자료를 종합해보건대 풍신수길의 의도적 코베기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코무덤>을 <귀무덤>이라 부르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베어진 코는 조선에서 일본에 어떻게 운반되었을까? 베어진 코는 일단 배편으로 나고야까지 보내졌고 나고야에서는 오사카까지 다시 배편으로 그리고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길가에는 개선장군처럼 큰 수레에 싣고 지나가는 조선인의 베어진 코를 보려고 입추의 여지없이 사람들이 나와 구경했다고 《朝鮮倭寇史》를 들어 금병동씨는 전하고 있다.

자, 그러면 또 하나의 쟁점인 베어진 코의 수에 대한 견해를 보자.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 나카오히로시 교수는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코무덤에 대해 접근하고 있는데 그는 코베기 기간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로 보고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시각은 조중화 씨의 “코베기가 정유재란 때의 만행”이라는 주장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토시 코무덤에 묻혀진 코 숫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로 다르다.


나카오히로시

31,477개다.

세계인권문제연구센터장

금병동

10만 개 이상이다.

조선대강사

호시노박사

5만 개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도쿄대교수

조중화

3,276개

재야사학자

박삼중스님

126,000개

스님

김문길

126,000개

부산외대교수

왜 이렇게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코 숫자가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는 베어진 코가 한군데 모아져 정확히 관리되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예로 일본 곳곳에 “귀무덤” 또는 “코무덤”이라는 것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풍신수길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진 교토시 코무덤 외의 것으로써 조선출병 왜군들이 귀국 후 자신의 전공(戰功)을 과시하려고 빼돌려 묻거나 거짓무덤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조선에서 베어진 코 숫자가 서로 다르게 주장되고 있는 것은 후세에 기록하는 사람들의 부풀리기 내지는 착오 등 여러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군감끼리 한반도 전선 허위보고를 놓고 벌어진 고소고발사건(우스기시사, 臼杵市史, 참조)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죽은 사람 수와 코 영수증의 허위문서 작성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교토시 코무덤에 묻힌 정확한 코 숫자는 앞으로 더 정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 코를 베어가면 풍신수길이 코 숫자를 확인했다. ©이무성

어쩌면 이 부분은 오래도록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어진 코 숫자를 근거 없이 부풀려서는 안 되며 또한 숫자도 중요하지만 교토 <코무덤>에 묻힌 것이 과연 <귀>냐 <코>냐의 문제이다. 분명히 교토시에 있는 무덤은 코무덤이라는 문헌이 뒷받침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이 무덤에 대한 코냐 귀냐의 논쟁은 막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풍신수길이 이 무덤을 만든 이유를 따져본다면 우리는 하야시라잔의 주장을 따라 <귀무덤>이란 완화된 이름으로 불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일본이 원하는 바를 스스로 용인해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통한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끝난 지 400년이 넘었다. 그리고 1997년엔 400주년 추도식과 학술토론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인 <코무덤>에 대해서는 아직도 왜곡투성이인 채 한 술 더 떠 우리 스스로 역사 기록에도 없는 <귀무덤:이총,미미즈카>라는 용어를 만들어 계속 쓰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아니하랴!

[학술토론회에서 나온 코무덤 관련 자료들]

1. 吉野甚五左衛門覺書
2. 征韓錄
3. 淸正行狀
4. 朝鮮の役
5. 朝鮮物語
6. 木村又蔵覺書
7. 淸正朝鮮記
8. 淸正高麗陣覺書
9. 本山豊前守安政父子戰功覺書
10. 朝鮮征伐記
11. 武家事記
12. 和漢三才圖會
13. 征韓記畧
14. 島津家高麗軍秘錄
15. 中外經緯傳
16. 高山公實錄
17. 鍋島直茂譜
18. 黒田家譜
19. 元親記
20. 吉川家文書
21. 加藤家伝淸正公行狀
22. 面高連長坊高麗日記
23. 朝鮮倭寇史
24. 耳塚修營供養碑文
25. 日用集
26. 梵舜日記
27. 山城名勝志
28. 山州名蹟志
29. 本朝通鑑
30. 朝鮮軍記大全
31. 左傳
32. 二六新報
33. 齊藤實文書
34. 近世日本國民史
35. 文祿慶長の役
36. 信長記
37. 義演准后日記
38. 鼻請取狀
39. 豊臣秀吉譜
40. 看羊錄
41. 朝鮮日日記
42. 使行錄
43. 見聞別錄
44. 扶桑錄
45. 御沙汰書
46. 西遊草


<제4부> 통한의 코무덤 마지막 편이 기다립니다.


"교토시는 '코무덤', 사천시는 '耳塚(이총)' 통탄할 일"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4)
김영조
▲ 풍신수길의 잔학성을 드러내는 교토 풍신수길 신사 옆의 조선인 코무덤, 봉분 위에 돌비석을 올려놓은 만행으로 원혼들은 신음한다. © 김영조























분명히 우리는 보았다. 일본 교토 코무덤 앞에 세워진 교토시의 설명판에 “귀무덤(코무덤)”이라고 쓰인 것을 말이다. 일본 안에서의 경과를 보면 “코무덤 ⇒ 귀무덤 ⇒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바뀌어온 것이다. 원래는 “코무덤”이었지만 그것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유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데서 귀무덤 왜곡이 시작되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던 것이 2009년 7월 현재는 교토시 스스로 "코무덤"을 써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엔 아직 코무덤이 없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64돌 전후의 언론도 모두 귀무덤이라고 했다. 통한의 역사를 접어 둔 채 호칭문제를 비롯한 코무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재일교포들은 책을 펴고 학술토론회까지 열었다. 그 열의와 지대한 관심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든다. 이분들은 “귀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모임까지 갖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임 이름부터 코무덤이 아니다. 하야시라잔이 잔인해서 바꾸자 한 귀무덤 명칭을 100%로 수용해주고 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코무덤 모임”은 아닌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귀무덤”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따지면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다. 풍신수길의 명령은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수길.귀무덤.400년》이란 책 96쪽에서 일본인 나카오히로시(仲尾宏)교수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곱씹어 볼 말이다.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는 한자로 “耳塚”(이총) 이라 쓴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죽은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의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코끼리만 하다면 그 옆에 별로 시선을 끌지 못할 작은 크기의 “耳塚”이 있고 그 앞 표지판에는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 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군청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 1979년 교토시에서 세운 안내판, "耳塚" 곧 귀무덤으로 표기(위) / 2009년 7월 교토시에서 고쳐 세운 안내판 가로 안에 "鼻塚 표기 / 2009년 9월 현재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잘못 세워진"耳塚" 위령비(오른쪽) ©김영조

표지판이란 그 기념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만일 이 기념비가 한일간의 문제인 경우에는 일본의 시각이 아닌 우리 조선인의 정신과 철학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우선 이 표지판의 왜곡부분을 보자.

1. 풍신수길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랐다.
→ 풍신수길은 분명히 코를 베라 명했다
2.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이라 칭했다.
→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너무 잔인하다며 <귀무덤>으로 부르자고 해서 이때부터 이렇게 불리었으므로 초기에는 “코무덤”이었다.
3. 귀무덤이냐 코무덤이냐는 <잔학성>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한데도 귀든 코든 무슨 문제 냐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표지판의 시각은 현재 한국인이 갖는 <한일간의 역사인식 부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표지판을 보면 이 글을 왜, 누구를 위해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혹시 일본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것은 아닌지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은 정유재란 때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조선병사뿐만 아니라 생후 부녀자, 갓 태어난 아기까지 가차없이 죽여 그 코를 베게하였다. 그리하여 소금통에 절여 오사까로 보낸 뒤 교토까지는 육로로 베어진 코를 실어 나르며 자신의 전공 (戰功)을 자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교토시에 커다란 코무덤을 만들어 봉분 위에는 수십 톤 무게의 돌덩어리를 눌러 놓았다.죄 없는 조선인의 영혼들은 지금도 먼 이역땅에서 쓸쓸히 귀향 할 날만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 뒤 400여 년이 넘었다. 어떻게 하든 이 통한의 코무덤 주인공들의 귀국을 서둘러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못해 우선 안타까운 마음으로 코무덤의 흙 한 줌을 파다가 이곳에 묻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풍신수길의 잔학성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토 코무덤을 반드시 이곳에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 길만이 풍신수길이 죽어서도 공적을 자랑하려는 저의를 깨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코무덤 비석은 슬픔의 징표로만 잠시 세워두는 바이다. 삼가 숨진 영령들에게 깊이 가슴 조아리며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야 하는 현실이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한다.

역사의 현장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어찌 실감할 것이던가!

왜곡된 “귀무덤” 비석에 대해 사천시문화원 원장에게 전화로 질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도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며 사천문화원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전화를 끊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코무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짧다. 가해자인 일본에는 수십 편의 논문과 책을 발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의 코무덤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는데. 국내 학자 중에는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유일하게 코무덤의 일부를 다룬 책≪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를 내고 있다.

이 책은, <코무덤>을 다루고는 있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교토시의 코무덤이 아니라 일개 깃대잡이 병사가 베어진 코를 빼돌려 조성했다는 오카야마 코무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약간 다루는 교토시 무덤은 아쉽게도 “귀무덤”으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에는 코무덤이라는 이름의 무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물론 그런 무덤도 조선인과 관계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이번 글의 초점은 임진,정유재란의 원흉 풍신수길의 명령에 의해 자행된 <교토시> 소재 코무덤 이야기이며 이 무덤에 대한 "코베기 명령, 시기, 관리된 코영수증, 묻은 장소와 시기” 가 확실한 사료를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코를 베어가면 풍신수길이 코 숫자를 확인했다 © 이무성

지금 교토 코무덤 속에서는 무지막지한 돌비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조선인의 원혼이 괴로워하고 있다. 분명히 귀가 아닌 코를 잘리고도 귀로 둔갑하여 한 번 더 억울한 원혼이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흙 일부를 모셔와 안치하고 비를 세운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살풀이춤을 춘들 통한의 원혼이 모두 용서하고 편안히 잠들을 수 있을 것인가?

왜곡된 코무덤을 밝히려고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발로 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의 지은이 고 조중화 씨의 부인 하선자 씨는 아직도 “귀무덤”인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편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정유재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겨레는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 왜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에 전쟁준비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은 죄. 그 죄 탓에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전쟁의 후유증인 코무덤!

일본인조차도 잔인하니까 완화된 말인 <귀무덤>으로 부르자는 것을 우리 스스로 완화하다 못해 물러터진 <귀무덤>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는 행위다.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일본에 힘을 실어 주는 짓이다. 이제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언론들은 코무덤의 진실을 밝혀주고 정부는 지방 문화원에 이 무덤과 비문을 맡기지 말고 직접 관리해야 한다.

과거의 굴절 되고 왜곡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바로잡지 않은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서도 교토시 코무덤은 절대 귀무덤으로 불려서는 안 되며 기록과 문헌이 증명하듯 코무덤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더 나아가 흙 한 줌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400년 아니라 4천 년이 흘렀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국민으로 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일본 교토시 표지판을 코무덤 곧 비총(鼻塚,하나즈카)으로 바로잡도록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인에게 이러한 커다란 죄악을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사죄해야 옳으며 한국정부는 외로운 영혼들이 영구히 귀국하여 영면할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이후 우리 입에서 더는 <귀무덤>이란 말은 영구히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코무덤이다.

* 그동안 <통한의 코무덤> 1,2,3,4 편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어서, 제2부로 이어집니다. 제2부는,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술하다"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앞에서 감동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

로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1.『다시쓰는 임진왜란사』조중화,학민사,1996
2.『바로잡은 임진왜란사』조중화, 삶과 꿈,1998
3.『秀吉,耳塚,四百年』 김홍규, 일본 웅산각, 1998
4.『남원과 정유재란』 최규진, 신영출판사, 1997
5.『간양록, 조선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김찬순 옮김, 2006
6.『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 혜안 1995
7. 『교토 다이부츠덴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요 귀무덤은 아니다』 호시노 박사 논문 <四溟大師와 護國佛敎의 理念>, 四溟大師硏究論叢刊行委員會 [編], 玉蓮禪院, 2000
8.『사명대사와 호국불교의 이념』 玉蓮禪院, 2000
9.『임진왜란 종군기』 케이넨 저, 신용태 역주. 경서원 1997
10.『太閤征韓秘錄』 松本愛重, 成歡社, 1894
11.『亂中雜錄』, 趙慶男. 民族文化推進會, 1977.

*가는 방법
JR교토역 시영버스 100번, 206번, 208번 타고 산쥬산겐도(33간당)에서 내려
도요쿠니(풍신수길 신사)신사 쪽으로 50미터쯤 걸어가다 왼쪽 소공원 끝에 있다.

▲ 코무덤 가는 길 © 이무성

[글쓴이]
* 이윤옥 (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 김영조 (
sol119@empal.com)(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