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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물음에 인솔교사로 보이는 듯한 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어 아이의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저기 저 사람은 왜 하늘색 옷을 입었냐, 저 아저씨가 손에 든 부채는 왜 이렇게 크냐"등등. 교사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쉬잇"하고 손을 입에 가져다 댄다. 2007년 6월 27일 오전. 경기도 구리시 소재의 동구릉,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기신제 준비가 한창이다. 노랑, 빨강, 하늘, 남보라. 형형색색의 옷을 갖춰 입은 이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아름다운 색은 소리와 어울려 울려 퍼지고
잠시 후 나발, 나각, 태평소, 소금, 운라, 용고, 장구 등 각종 악기가 장중한 왕릉의 침묵을 깨뜨린다. 동구릉의 정문부터 태조 이성계가 잠들어 있는 건원릉까지의 어가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색과 소리가 태양의 프리즘을 통과해 몸으로 빨려든다. 취타대가 앞을 서고 노부꾼이 그 뒤를, 마지막으로 초헌관(제향 때 첫 잔을 올리는 일을 맡은 제관)이 서서히 행렬을 따른다. 느리게 걷는 듯하지만 살짝살짝 감아올리는 발길에 운율감이 따라 오른다. 기신제는 역대 제왕과 왕후에 대한 의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국가의식의 규정인 오례의 중 길례(吉禮)에 해당한다고 한다. 조선 초에는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매월 초하루와 보름, 정초, 한식, 단오, 추석, 동지, 그믐 등에 왕과 왕세자가 직접 능에서 제례를 행했고 이후 경복궁 소재 문소전에서 불교식 제사의식인 기신제를 지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뒤 궁이 아닌 산릉에서 기신제를 거행했다고 한다.
그 중 종친회의 연락과는 무관하게 동구릉을 찾았다는 이종희(62)씨는 "꼭 종친이라서가 아니라 역사의 위인을 만나다는 기분으로 건원릉을 찾았다"고 한다.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제사잖아요. 사실 우리나라에서 어깨에 힘준다는 집안들 보면 얼마나 복잡하고 화려하게 하는데요. 거기에 비하면 여기는 간략하게 하는 거지요." 제사는 살아있는 이들의 축제
"우리 민족의 경우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남은 이들이 모여 여러 날 불을 밝힙니다. 또 상여를 함께 메고 가는 길을 밝혀주죠. 제사 때 여러 친척들이 모여 웃고 즐기는 것도 그 연장선상입니다. 죽음을 승화시킨 일종의 축제죠." 또한 왕릉 기신제가 있을 때 열리던 어가 행렬의 경우 "단순히 왕실의 위엄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다양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해주기도 했다"며 "기신제에 올리는 음식도 떡과 다식으로 기본적인 모양만 갖췄을 뿐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실제 제례가 끝나고 많은 이들이 음식이 궁금한 듯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대개는 "이게 다야?"하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아홉 가지의 떡과 색을 낸 다식 뿐 육류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가 없었던 것.
집례자의 구령에 모든 절차가 끝난 시간은 오후 한 시경. 한창 배시계가 울려댈 시간. 이후 참석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간소한 도시락이었다. 얼마 전 있었던 왕릉에서의 음식조리(취사행위가 금지된 왕릉 안에서 취사도구를 이용해 음식을 조리해 문화재청장 등에게 식사를 대접한 일) 후폭풍(?)의 영향이 아니냐며 여기저기서 농담을 던진다. 실은 거의 모든 왕릉제례에서는 간편한 도시락을 선호한다고 한다. 밥을 먹고 돌아서는 길.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휙 하고 불어오자 "허허, 임금님께서 현신(現身)하셨나 보네"라는 너털웃음이 들린다. 유려하고 동시에 장중했지만, 소박하고 차분한 건원릉의 기신제는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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