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09.10 00:37 / 수정 : 2007.09.10 02:16
- 천년 고도(古都) 경주에서 ‘세계문화엑스포 2007’이 10월 26일까지 열린다. 보문단지에서는 ‘황룡사 9층탑의 환생’을 주제로 매일 밤 멀티미디어쇼도 진행된다.
신라시대 경주의 ‘명동’에 위치한 황룡사는 경주의 상징이기도 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창건됐다. 진흥왕이 새롭게 궁을 지으려던 곳에 누런 용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절로 만들었다. 그 100년 뒤, 선덕여왕은 재위 14년 때(서기 645년) 황룡사9층탑을 세웠다. 황룡사와 황룡사탑은 이 도시의 ‘랜드마크’였다.
신라 최고의 사찰 황룡사. 한데 지난 1970년대 말 황룡사 발굴 때 출토된 유물 한 점은 지금껏 고고학계에서 ‘해석 불명’으로 남아 있다. 이 사찰 회랑 외곽에서 남근이 나온 것이다. 짙은 회색의 활석으로 만든 이 남근은 길이 8.7㎝, 귀두 최대 직경 5.3㎝로 음경 부분이 부러진 상태였지만, 사실적으로 조각됐다. 함께 나온 유물이나 발굴 정황을 종합할 때 통일신라 초기(서기 7세기 말~8세기 초) 것으로 추정됐다. 신라 제 1의 사찰에서 왜 남근이 필요했을까? 성적 유희를 위해 제작했다고 보기엔 약간 크다. 물론 ‘사용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점잖은 국가 사찰에서 남근이 어떤 ‘상징성’을 띠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 ▲ 통일신라시대 초기(서기 7세기 말~8세기 초) 돌로 만든 남근. 황룡사 동쪽 담장 바깥배수로에서 나왔다. 실물 크기로 극(極)사실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용 흔적’이 뚜렷하다.아래쪽은 /신형준 기자
- 반면 1996년 여름,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나온 활석제 남근(서기 7세기 말~8세기 초)은 ‘사용 흔적’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당시 발굴을 했던 이은석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은 “이 남근도 음경이 부러진 상태로 발굴됐는데, 부러진 곳의 색깔과 손을 많이 탄 부분의 색깔이 완전히 달랐다”며 “한참 사용하다가 음경 부분이 부러지자 요즘 말로 치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비례미나 귀두의 곡선 부분,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극(極)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크기도 귀두 최대 직경 4.8㎝로 실제 크기와 거의 같았다. 남은 음경 길이는 7.9㎝였다. 자연을 모방, 혹은 복제하듯 만든 사실적 조각상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전통으로 볼 때 지극히 이례적인 유물이었다.
- ▲ 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나온 남근(왼쪽)과 황룡사 담장 바깥배수로에서 나온 남근을 비교한 사진이다. /신형준 기자
- 이 남근이 나온 배수로는 경주 도심의 하수구로, 오수나 빗물이 황룡사 영역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경주 도심의 어느 여염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경주 안압지 발굴 때 나온 목제 남근은 자위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귀두 양쪽에 달린, 여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혹’ 때문이다. 손을 많이 타 반질반질하다는 것도 그렇고, 안압지가 신라시대 태자가 거주하던 동궁(東宮)으로, 시녀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도 여기에 가세한다. 일부에서는 이 ‘혹’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에도 일종의 성기확대수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사적 증거는 없다. 혹 달린 남근은 서기 전 2세기 중국 한(漢)나라 제후 유승의 묘에서도 청동으로 만든 게 나온 적이 있다.
김종대 중앙대교수(민속학)는 그러나 “신라의 남근은 실제 유희용이라기보다는 아들 낳기, 혹은 풍요를 바라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했다. 신라시대(통일신라 포함) 남근은 지금까지 5~6점 정도 출토됐으며,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각각 한 두 점 정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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