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문화역사탐방

서울문화사학회 4월 답사모임

서울문화사학회 4월 답사모임

▣ 사 업 명 : 제215회 유적답사(강동구일대)

▣ 일 자 : 2008년 4월 26일 (토요일)

▣ 시 각 : 오전 9시 30분

▣ 모임장소 : 지하철 8호선 암사역 ④번 출구

매표소앞

▣ 참 가 비 : 10,000원

▣ 지 참 물 : 간소복, 도시락 지참

♧ 연락처 : ☎ 762-0155 / Fax 762-0118

※ 답사안내 : 김덕영(서울북촌문화센터 강사)

※ 답사코스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답 사 코 스 ◈

암사동 선사주거지(岩寺洞 先史住居地,

사적 제267호)

강동구 암사동 155번지 일대에 위치한 암사동 선사주거지 일원은 오래 전부터 ‘바위절’이라고 불리우던 곳이다. 88서울올림픽 개최에 따른 <서울고도 민족문화유적 종합 복원 계획>에 따라, 사적 267호로 지정되어, 신석기 시대 움집 다섯 채가 복원되었으며, 선사유적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한국대학박물관협회 연합 발굴(1967년)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집중 발굴(1971-1975년, 1984년)의 결과, 서로 다른 3개의 문화층에서 20기에 가까운 움집터, 빗살무늬토기, 돌도끼, 돌살촉, 연돌 등 석기류가 많이 나왔다. 최하층은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문화층, 중간층은 무문계토기와 빗살무늬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빗살무늬계에서 무문계에 걸친 과도기적 양상을, 최상층은 백제 시대의 문화층으로 보인다.

그 중 빗살무늬토기문화층은 우리나라 중서부 지방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 이씨 광릉부원군파 묘역

(서울유형문화재 제90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산 12-4 번지 일대에 위치한, 조선 전기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倍, 1422-1495)와 그 후손의 묘 등 모두 11기의 묘가 있다.

이극배의 묘는 1495년 조성되어 부인 경주 최씨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묘비, 상석, 석등, 문인석 2구, 무인석 2구가 있으며, 신도비는 명필가로 유명한 예조판서 신종호(申從濩)가 찬(撰)하였다.

바위절터

강동구 암사동 산1-1번지에 위치한 바위절터 표석은 암사정수센터 취수장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 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며, 강가 바위에 위치하여 ‘바위절’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 9개의 절이 있어 ‘구암사’라고 불리웠으며, 그 중 백중사(伯仲寺)라는 암자가 조선 초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을, 조선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으로 알 수 있다.

암사동이라는 지명은 이 절(바위절)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바위절’이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중기 현종 8년(1667년)에 이 곳에 구암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구암서원터

강동구 암사동 산1-1번지에 위치한 구암서원은 조선 중기 현종 8년(1667), 옛 ‘바위절’ 터에 세워진 서원이다. 이 서원은 구천면 최초의 서원으로 이 지역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유교적인 학식과 교양을 쌓아 과거에 응시하고 관료로 입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배출된 구천면 유생들은, 둔촌 이집(李集)을 향사하고, 숙종 때 구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집(1314-1387), 이양중, 어윤겸(1559-1625), 임숙영(1576-1623), 정선근(?-1504) 등이 배향되고 노론의 색목이 강하였다. 유생들은 구암서원 건립을 중심으로 향약을 조직, 유교적 마을 공동체를 조직하였다.

구암서원은 1871년 고종 때, 서원철폐와 함께 사라지고, 1898년 세운 유허비만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날 구암정을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유창 신도비(劉敞 神道碑)와 그 묘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호)

강동구 상일동 190번지에 있다. 조선 초기 문신 유창(1352-1420)의 신도비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태화(太和)이다. 17세에 생원시에 합격, 20세에 대과에 올랐다.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오르고, 성균관 대사성 산기상시(散騎常侍), 중추원 부사를 지냈고, 옥성군(玉城君)에 봉해졌다.

1397년 이후 대부분 문한직(文翰職)에 종사하여, 성균관 대사성, 직수문전(直修文殿)을 시작으로 문형(文衡) 6번, 예문관 충편수관(充編修官), 제학 대제학 2번, 보문각(寶文閣) 학사제학 4번, 대제학 4번, 대사성 2번을 지냈고, 1416년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420년 12월 9일 69세로 사망하자, 의정부 영의정에 추존되고 문희(文僖)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