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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미래촌강좌 제241강 080804(월) : 농촌에 사는 것/ 김민숙 선생(홍천에서 영농)

김민숙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Chicago Art Institute에서 사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현재는 강원도 홍천 두메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 정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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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아니

강원도 심심 산골에 위치한 내 영토의 영주로 당당히 홀로서기를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나의 꽃잔디 정원









우리집 정원엔 지금 꽃잔디가 한창입니다.
해마다 꽃잔디를 늘려가서 이제는 우리집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 같아요.
꽃잔디는 4월 말부터 피기 시작했는데 철쭉은 이제서야 양지바른 곳만
조금씩 피기 시작했어요.
꽃잔디와 철쭉이 합창을 할 때면 이 산골이 정말 요란하답니다.

우리 아들은 나보고 “엄마는 farmer가 아니라 gardener 같다”고 하는데
농사보다는 정원 가꾸는 일에 더 관심이 가는게 사실이예요.
근본적으로 나는 내 땅을 캔버스라 생각하고 이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꽃과 나무를 심고, 조각을 하듯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서 연못도 만들고 동산도 만들고,

계곡 상류에서 물을 끌어다 폭포도 만들고 작은 개울과 연못에 물이 흐르게 하지요.

곳곳에 산책로도 만들지요. 남의 땅을 안밟고 내가 만든 내 땅의 산책로만 걸어도

한시간가량 산책을 할 수 있답니다.
그리곤 이곳 저곳에 정자나 그늘막을 만들고 정원용 소품들로 디테일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가꾸는 일이 참 재미 있답니다.

바람이 불면 나의 정원엔 아름다운 풍경소리가 여기 저기서 울려퍼지는데
우리나라 절의 풍경소리와 일본 절의 풍경소리, 서양의 풍경소리들이 여기 저기서
아름다운 화음으로 들려옵니다.

꽃잔디가 한창인 나의 정원에 바람이 불면 어떤 향수보다도 코를 즐겁게 해주는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져오지요. 장미 향기 비슷한 것 같아요.

나의 정원은 눈과 귀와 코를 동시에 즐겁게 해주지만 사진으로는 눈으로 보이는 것 밖엔
전할 수가 없군요.

















-채마밭 전경-


무식이 용감이라고 의욕만 앞서 농사 일을 너무 크게 벌렸나 봅니다.


팔기위한 농산물들은 병충해 피해를 막기 위해어쩔 수 없이 농약으로 범벅 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농촌 현장에서 알게 된 후 기왕 농사꾼으로 살기로 했으니 내 먹거리는 될 수 있는 한 내가 만들어 먹자고

결심하고 금년 처음으로 대규모(내 능력에 비해서는) 채마밭을 만들었읍니다.

계곡집 앞의 1000평쯤 되는, 이 마을에서 제일 비싼 문전옥답에 약 500평 정도의 채마밭을 일궜지요.


-더덕밭-


-옥수수밭-


그동안 우리 관리인이 화학비료로만 농사짓던 땅이라 내 농사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퇴비만 5톤 트럭 3차, 105만원어치를 들어부었읍니다.

우리 마을 이장이 땅심이 좋아야 작물들이 병충해에 잘 견딘다고 해서지요.


우리 동네에 은퇴 후 들어와 살려고 400평쯤 땅을 사서 콘테이너 집을 들여놓고

열심히 농사실습을 하고 있는 연대교수가 있읍니다.

우리 마을 이장의 코치로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는데 그 이장 말이 그 집 농산물들이

얼마나 맛있는지 자기는 그 집 농산물만 얻어먹는다고 해요.

그 교수는 퇴비를 두 차나 뿌리고 일체 농약을 안친데요.

그래서 나도 한 번 해보려고 농사를 시작한 겁니다.


-미니 밤호박이 그물망을 타고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릴겁니다-


강원도 땅은 돌이 많아 예전에 우리 집에 가구 배달을 왔던 운전수가“이 마을 땅은 돌맹이에

흙이 좀 섞였네” 라고 할 정도로 돌이 많아 그 많은 돌을 골라내기 위해 하루 35만원하는 포크레인을

사흘간 쓰고, 땅을 뒤집고 골을 나란히 파주는 경운기인가 하는 기계를 하루 쓰고,

비료를 골고루 뿌려주는 기계도 반나절 빌리고, 검은 비닐 덮는 일에, 미니 밤호박이 타고 올라갈

하우스 파이프 세우고 그물망을 씌우는 일 등 일이 끝도 없이 많더군요.

씨앗과 모종을 사서 뿌리고 아줌마들 동원해 풀을 뽑고 나서 계산해보니 농사비용이

300만원이 들었더라구요.

경제성을 따지자면 미친 짓이지요.

이곳에 땅을 갖고 있는 승진행도 저따라서 하느라 100만원쯤 들었을 거예요.

그나마 무념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인건비는 저보다 덜 들었을거구요.

농사 첫해라 땅 고르는 포크레인 작업에 돈이 많이 들었지요.

금년에 퇴비를 많이 뿌렸으니 내년에는 안뿌려도 될른지 모르겠어요.


-감자꽃도 참 예쁘답니다-

모종 심을 둔덕에 검은 비닐 몇 고랑 덮는데 내가 비닐을 끌고 가면 아들과 동네 일꾼
한명이 양쪽에서 따라오며 흙이나 돌로 비닐을 눌러주는 일을 하는데 반나절이나 걸렸어요.
그런데 이웃의 전문 농사꾼네 일하는 걸 보니 5천평쯤 되는 땅에 검은 비닐 씌우는 일을

한 사람이 하루 만에 다하더라구요.

이러니 텃밭으로 경쟁력이 있겠어요?


-한가지 작물만 대량으로 재배하는이웃집 밭. 혼자서 하루만에 검은
비닐을 다 씌우더군요-

이 집이 그 넓은 밭에 제초제를 뿌리면벌레들이 새까맣게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

팔각정 아래 우리 나무밭으로 엑소더스를 하는거예요.

그리곤 나무를 타고 올라가 순긱간에 나뭇잎을 갉아먹어 벌거숭이 나무로 만들곤 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집에서 제초제를 뿌려도 피난 오는 벌레도 별로 없어요.

해마다 땅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뿌려대니 이제는 벌레도 거의 없어졌나봐요.

나는 처음에는 모르고 그 밭의 배추도 따먹고 오이도 따 먹었는데

이제는 거들떠도 안 봐요.


-상추가 넘처나는 우리 채마밭-


내가 본격적으로 먹거리 자경을 시도한 것은 서울 갈 때 시외버스를 타고가다 만난

옆자리 할아버지 때문이예요.

산골의 시외버스는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아주 정겨운 분위기랍니다.
승객이 탈 때마다 기사아저씨는 어르신 건강은 어떠신지 물어보고

아저씨들에겐 금년 농사안부를 묻고 아주머니들에겐 시집간 딸 안부까지 물어봐요.

온통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같아요.

가다가 아무데서나 내려주고 아무데서나 태워주는데

노인들 한 발이라도 덜 걷게 하려는 배려지요.


-이웃집 밭과 달리 철저하게 소량 다품종 생산을 하는 전통적인 나의 채마밭.

환경론자들이적극 권하는 농사법이지요-

그런 시외버스 옆자리 할아버지가 저더러 김치는 담가먹는가 물어보는 거예요.

담굴 줄 몰라서 사먹는다고 하니까 시골에 살면 웬만하면 직접 배추농사지어 담가먹으라는 거예요.
40년 넘게 배추농사를 지었지만 팔 배추와 우리 식구 먹을 배추농사를 따로 짓는다면서요.
“도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배추 잎에 구멍이 나면 안사요. 그러니 약을 안칠 수가 없어요.” 하더군요.

밭에서 수확할 때도 약을 듬뿍 쳐야 가는 동안 시들지 않고 싱싱해 보인다고도 했어요.


김장했을 때 배추가 물러 오래 저장할 수 없는 것도 많은데 이건 90일 배추나 120일 배추씨를

화학비료를 잔뜩 줘서 60일만에 속성으로 키웠기 때문이래요.

120일을 기다리면 그만큼 손해니까요.

그래서 허우대는 멀쩡하나 속이 부실한 물컹이 배추가 되는 거라고 했어요.

90일이나 120일을 제대로 기다려 수확한 배추로 담은 김치는 몇 년이 가도 무르지 않는데요.


-토마토 밭-


-방울 토마토가 열렸어요-


정작 농사를 지어보니 농약을 안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겠더라구요.

열무는 잎이 나면서부터 벌레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구멍이 수도 없이 많이 나 있는거예요.

동네 노인들은 딱하다는 듯 빨리 농약을 치라고 성화를 하지요.

배추도 마찬가지예요.

팔 것도 아니니까 그냥 버텨보기로 했어요.

중간에 파를 듬성 듬성 심었어요. 혹시 벌레가 파를 싫어하지 않을까 해서요.


-벌레먹은 배추. 살충제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지요.-


-벌레먹은 열무 잎. 그냥두면 뿌리에서 무가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라는군요.-


시중에서 파는 파에는 농약을 많이 친다고 해서 파를 많이 심었는데

우리 파에는 아직까진 병충해 피해가 없어요.

상추 종류도 병충해 피해 없이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더라구요.

매일 싱싱한 쌈채소로 떡을 치고 있지요.





사실 한 가족의 채소 공급에는 5 내지 10평의 채마밭이면 족해서 대부분의 주말 농장들이

이 규모로 땅을 분양 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500평씩이나 벌린 것은 기왕 농사짓는 거

아는 사람들과 나눠먹자는 생각이었어요.

특히 표고버섯농장을 하니까 표고 배송할 때 친환경 채소들을

서비스로 끼워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 고냉지의 청정한 공기와 깨끗한 물로만 재배되는 생 표고버섯이예요. -


그동안 표고버섯을 4킬로 한 상자씩으로 주문 받았었는데

(농협 규격 박스도 4킬로 박스라서) 생각해보니 요즘은 대부분 핵가족이라

한꺼번에 4킬로는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2킬로나 3킬로 주문도 받으려고 해요.

나머지는 우리 밭의 잉여 농산물을 얹어서 보내려구요.

봄에는 날씨가 추워 표고가 그렇게 안자라더니 요즘은 아주 왕성하게 자라서

미쳐 소화를 못시킨 표고가 냉장실에 싸여가고 있답니다.

이것을 농협에 출하시키느니아는분들께 싸게나누는게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요즘 먹거리 문제로 시끄러운데 표고버섯은 육류 대용으로 절에서 오래전부터

애용해오던 식재료니까요.

그리고 우리 채마밭에 친환경 채소가 넘쳐나서 이 글을 올려봅니다.



주문은 033)432-3316 으로.(낮에 잠깐씩 밭에 나갈 수도 있으니 문자로 남겨도 돼요)

생표고버섯은 킬로당 1만원, 택배비는 무료. 물론 같이 보내는 채소도 무료.

보내는 채소 내용은그 때 그 때 밭에 넘쳐서 먼저 뽑아야 하는 것들로 보낼겁니다.


우리집 채마밭 작물목록 - 옥수수, 감자, 고추,피망,미니 밤호박, 더덕, 토마토,

각종 상추, 치커리, 양상추, 허브 민트 등.



책 출간 소식 전한다.
작년에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결실도 맺을 수 있어
작은 위안이 되는구나. 그 와중에도 책이 네 권이나 출간됐어.



김영사에서 나온 ‘길 찾아 길 떠나다’는 우리나라 비구니계의 성철스님 격인 인홍스님의
일대기를 취재해서 엮은 책인데 석남사 노스님들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게 되었어.

2년동안 작가와 함께 생전에 인홍스님과 교우했던 기라성 같은 불교계의 큰스님들을
만나서 인홍스님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데,인터뷰를 하다보면 인홍스님 관련 이야기
뿐 아니라 인터뷰 당하는 큰스님들의 평생의 이야기까지 듣게 되는 일이 많아.
그런데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한 권의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의 값진
내용들이었어. 마치 일 대 일 법문을 듣는 것 같은 귀한 시간들이었지.

사진 찍는 사람으로선 평소에 접근 할 수 없는 곳도 들어갈 수 있고 촬영이 금지된 곳도
허락 혹은 요청으로 마음껏 찍을 수 있으니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몰라.
사진 위주의 책이 아니라 책에서는 사진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지만
나는 내 사진을 많이 건져서 너무나 좋았어. 이 사진들로 나는 제2의 창조작업을 통해
한 단계 upgrade된 내 작품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해.

‘나의 행자시절’은 작가 박원자씨가 해인사의 월간지 ‘해인’에 12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세 권의 책으로 엮은 건데 연재할 때는 사진 없이 글만 실었던
기사라서 책으로 엮으면서 사진의 필요성을 느껴서 나에게 관련 사진을 부탁한 것이었어.

그래서 그동안 내가 찍어온 절 사진들 중에서 고르기도 하고 부족한 사진들은 작가와
함께 다니면서 보충 촬영을 해서 싣기도 했어. 옛날에 흑백사진으로 찍었던 것과
칼라 슬라이드로 찍은 것 중에 정작 좋은 사진들이 많았는데 내가 두메산골에 살다보니
그 필름들을 디지털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 여의치 않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것
중에서 고르느라 미흡한 점도 많은 것 같아.

두 책 다 신문과 TV, 인터넷에서 관심 있게 다뤄져서인지 작년에 나온 인홍스님 책은
5쇄를 찍었고, 이달 초에 출간된 따끈 따끈한 신간인 ‘행자시절’은 세 권짜리인데도
바로 2쇄에 들어갔어.

나는 2월 25일에 미국 가서 한 달 후에 돌아올 거야. 원래는 2-3개월 있으려고 했는데
비행기값 추가료가 만만치 않아 추가비용이 없는 한 달 짜리로 다녀오려고 해.

25년 전에 졸업한 학교에 가서 다시 공부나 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1월에 시작하는
학기의 중간이라 이번에는 그냥 이 과목 저 과목 되는대로 청강이나 하면서
미술관이 딸린 학교인지 학교에 딸린 미술관인지 모르지만 세계 5대 미술관중의
하나인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젊은 날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가야산 호랑이 - 부드러운 남자일 때도 있어요.(2005,12...

무섭기만한 가야산 호랑이라구요?

때로는 부드러운 남자일 때도 있답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특히나.


20여년전 원택스님의 부탁으로 주명덕씨와

성철 큰스님의 사진을 처음 찍을 때의 풍경이 생각납니다.

주명덕씨가 폴라로이드 즉석 카메라로 큰스님의 얼굴에 바짝 다가가

클로즈업 사진을 찍어서는 큰스님께 드립니다.

그냥 흰 사각형 빳빳한 종이일 뿐이었는데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는동안

큰스님 얼굴이 점점 명료하게 떠오르니 큰스님 눈이 휘둥그래 지십니다.

“ 어! 이거 참 신기하네. 아이들 찍어주면 참 좋아하겠구마”

“이게 올메나 하노?”

“10만원쯤 합니다” 주명덕씨가 대답하니

“원택아, 당장 하나 사도고, 아이들 찍어주구로”하시더니,

“내도 한분 찍어보자” 하신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 카메라로 그 장면들을 스케치 했던 나는

나중에 그 사진들로 다섯 커트짜리 만화같은 사진을 만들었습니다.

고바우 만화는 네 커트 그림으로 재미있는 상황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으로 사진만화를 시도해 본 것입니다.

그 장면이 너무 재미있어서.

호랑이는 커녕 꼭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큰스님의 인간미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일련의 사진들은 지금 국립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그중 두 번째 사진(큰스님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계신 사진)은

나중에 원택스님이 쓰신 “나의 시봉일기”라는 책의 표지사진으로 쓰이기도 했지요.

성철스님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직접 찍으신 사진은 그냥 앞산 사진이라서

내가 나중에 원택스님 얼굴을 폴라로이드로 찍은 후 그 사진을 원택스님이 들고 있게 하고 찍어서는

다섯 번째 장면으로 만든 것입니다.

마치 성철 스님이 찍은 사진이 원택스님 얼굴인 것 처럼...


지금도 기억에 남는 성철 큰스님의 첫 인상은 깨끗한 피부였습니다.

불교에 입문도 하기 전의 나인지라 불교계에서의 큰스님의 위상도 모른채

막연히 도인이라고만 알고 있어 “도를 닦으면

나이가 들어도 피부가 늙지 않나보다”하고 감탄했었습니다.

복숭아빛의 맑고 탱탱한 피부에 뺨은 꼭 겨울철 썰매를 지치고 코를 훌쩍거리며

집에 들어오는 개구쟁이들의 빠알간 뺨 같았습니다.


큰스님이 계시는 염화실 앞 마당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웬 남자가 맨바닥에서

염화실을 향해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천배를 해야 만나뵐 수 있는 분이란 것도 모른채 그곳에 간 나에게

그 학생이 넌지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서울서 왔는데요?”

“서울 어디서요?”

“우리집에서요.”

“그런데 삼천배도 안했는데 큰스님이 앉으라 서라 여기봐라 저기봐라

가사장삼을 입어라 벗어라하는데도 그렇게 다 응해주시는 거예요?” 한다

그 학생이 하도 심각하게 말을 하고 또 나는 곧이 곧대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듣던 주명덕씨가 선문답처럼 한마디 거든다.

“내가 큰스님 사진을 찍는 것도 영광이지만 큰스님이 나에게 사진 찍히시는 것도 영광이다”고 하니

기가 막힌지 사라져 버린다.

말문을 막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그리고는 7년쯤 후 금강굴에서 큰스님의 마지막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다.

백련암 염화실 공사를 하느라 큰스님이 잠시 피난을 오셔서 금강굴에 계셨는데

마침 포행을 나가시니 이 기회에 큰스님 사진을 찍어두라고 불필스님이 권하셨다.

맨바닥에 삼배를 올리고 카메라를 드니 “누고?”하시며 버럭 소리치신다.

불필스님이 얼른 나서며 “해인지 기자인데요” 하시니 가만히 계셔서 몇 커트를 재빨리 찍었다.

많이 여위셨고 얼굴 피부도 노인의 피부였고 부축을 해야했다.

그리고 한달 후 퇴설당에서 열반하셨으니 내가 찍은 사진이 큰스님의 마지막 사진이 된 것이었다.

이 슬라이드 필름들을 해인지에서 큰스님 사진 특집을 한다며 빌려 갔는데 돌려 받지를 못했다.

아마도 해인지가 잘 보관 하고 있겠거니 하고 있다



사진으로 표현한 만다라 (2006,2/26)

사진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탈피하면 훨씬 다양한 내용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

20세기들어 모든 예술분야는 각기 자기분야의 예술의 의미와 새로운 가능성을 재탐구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과 유럽의 순수예술사진의 절반정도가 전통사진기법이상을 수용,

발전시켜나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80년대 초반을 이러한 뉴 웨이브의 전위부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보내고 난 후 동양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자유로운 서양의 표현방법으로 시각화하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는 형이상학적인 초현실 세계에도 사진으로의 접근이 가능하리라 믿고

불교를 테마로 정신세계 혹은 마음의 세계에의 접근을 시도해 본 것이다.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다양한 테크닉의 수용과 상상의 자유를 마음껏 활용,

눈에 의한 즉흥적인 사진 뿐 아니라

두뇌를 활용하는 생각하는 사진의 영역에 이르는 수단으로 삼고 싶었다.

퍼스널 컴퓨터나 컴퓨터 그래픽이 보금되기 전인 거의 20년 전에

이루어진 작업들로 암실에서 작게 인화한 사진들을 일일이 붙이는 수작업으로한 것들이라

컴퓨터를 이용해 한장으로 뽑을 수 있는 지금의 시선으로 본다면 어설픈 구석도 보일 것이다.

아래 사진의 제목은 '참선 - 좁은 마음을 활짝 여는 일' 이다.



아! 한암스님,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나? (2005,12/12)

아! 한암스님!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나?


나는 한암 스님을 모른다.

생전에 뵌적도 없고 그분이 초대 종정이었다는 사실도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겐 별 의미가 있을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분과 전생부터 상당한 인연이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첫 인연은 20년전 지장암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였다.

서울서 오후에 출발하여 시외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지장암에 도착했을 때는 밤 10시가 가까웠었다.

동행한 비구스님은 늦은 밤 당연히 큰절인 월정사에 가서 잠자리를 청해야 했건만

조그만 비구니 암자인 지장암으로 향했다.


“스님 계십니까?”

“뉘시오? 이 밤중에...”

“저 돈옵니다” 하니 안에서 노비구니 스님이 나오셔서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시더니

이내 반색을 하시며 비구스님의 두 손을 잡고 반기셨다.

손을 만져보다 엄지밖에 없는 연비한 오른손을 붙들고는

“이리안해도 중노릇 할 수 있는데... 우째 연비까지 하셨노...”하시며 안쓰러워 하시는 것이

꼭 엄마나 외할머니가 자식의 연비한 손을 붙들고 하는 말 같이 들렸다.


한암스님 열반사진이 내 손에...


늦가을 쯤이라 오대산 일대는 추위가 성큼 와 있었는데 3평남짓 돼보이는 좁은 단칸방에는

고추가 반은 차지해 있고 공양주인 듯한 노보살이 한 분 더 계셔서 스님과 방을 함께 쓰고 있었다.

고추를 윗목에 밀어 놓고 겨우 끼어 앉아 두 분의 회포 푸는 광경을 지켜 보는데

스님이 나를 사진작가라고 소개를 하자

이 암자의 주지이기도한 혜종 노스님이 다락으로 올라가시더니

손바닥만한 빛바랜 옛사진 한 장을 갖고 오셨다.


“이 사진이 한암스님 열반하신 직 후 찍은 사진인데 월정사에 가면 이걸 커다랗게 만들어

걸어놨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나도 하나 크게 해서 걸어놓고 싶어 빌려왔다오.

서울가면 허바허바라는 사진관에서 크게 맹글어 준다고 하던데

사진작가도 그런걸 할 수 있남요?”하신다.

“해드리겠다”고 하니 아이처럼 기뻐하시며

“이 사진을 크게 맹글어 주면 내가 가마솥에 엿을 고아 드리리다” 하신다.

그러시더니 “부탁하는 김에 한가지만 더 합시다.

상원사에 가면 문수보살님이 계신데 그 사진도 한 장 찍어서 크게 만들어 줄 수 있겠소?”


혜종스님은 거의 자정이 될 때까지 한암스님에 대한 이야기만 하셨다.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상원사에 불을 지르러 왔던 군인으로

그 때 한암스님이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법당에 앉아

나는 부처님 제자로써 법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해야 할 사람이고

당신은 군인으로써 상관의 명령에 따라야하니 우리 각자 자신의 임무에 충실합시다.

어서 불을 지르시오.” 라고 하자 차마 법당에 불을 지르지는 못하고

법당 문짝만 떼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고 했다.

그 군인이 종전 후 경남의 한 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다가 한암스님을 뵈러 왔는데

마침 한암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시고 차를 다 드시고는 가사 장삼을 수하시더니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고는 앉은 자세로 열반에 드셨다고 했다.


그날 혜종스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상원사를 불지르라고 명령을 내렸던 최고 책임자에 대한 후일담이다.

이 사람이 비행도중 실종되어 한 때는 월북했다는 소문도 돌았었는데

몇 년 후 월정사 뒷산에서 그 사람의 계급만큼의 별이 달린 모자와 혁대와 뼈만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한암스님 이야기에 팔려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 암자에는 방이 하나 밖에 없어 비구 스님에겐 낡은 다우다 이불 하나를 내주시며

쌀광에서 주무시게 하고는 나에겐 깨끗한 고급이불을 내주셨다.

“이 이불은 10여년전 저 스님이 덮던 거라우. 내가 버리지 않고 다락에 잘 넣어 두었었지.

부잣집 도령이었는데 유학공부한다고 절에 왔다가 중이 되고 말았다우”

우리는 말리던 고추를 윗목으로 더 밀어놓고 세사람이 겨우 누울 스페이스를 마련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상원사까지 걸어서 갔다.

“어젯밤에 혜종스님이 왜 한암스님 이야기를 줄곧 하신 줄 압니까?” 하고는 씨익 웃는다.

“지장암에 있다가 처음 상원사엘 가는데 가는 길이 너무나 익숙한 거예요.

상원사에 도착하니 스님들이 하나도 없어 웬 일인가 했더니

그날이 한암스님 기일이라 모두 큰절에 갔다는 거예요.”

스님은 나에게 한암스님 부도도 보여주었다.

상원사에 들러 문수보살 사진을 찍고 중대에서 점심공양을 하고 적멸보궁까지 갔다.


나는 보름안에 해다 드리겠다고 약속 해놓고 한 달만에 찾아 갔다.

아예 액자까지 맞추고 나니 무거워서 시외버스로 갈 수 없어 남편의 차로 가느라 늦어진 것이다.

혜종스님은 그 귀한 사진을 가지고 가서 함흥차사니 걱정이 되어 매일 동구밖을 내다 봤다고 하셨다.


20년만에 지장암에 가니 혜종스님은 열반하시고

지장암은 이젠 단칸방 암자가 아니라 제법 규모가 갖춰진 절이 돼있었고

승진행과 나는 다실과 침실이 창호문으로 구분되고 욕실이 딸린 호텔같은 요사채에서 편안히 머물다왔다. 옛 암자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비구스님이 잤던 쌀광만

그 자리에 조금 넓혀 물건보관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다.


한암스님 편지를 보다


주명덕씨와 통도사 극락암에 갔던 10여년전,

근대 선지식 경봉스님을 모셨던 이 암자 주지 명정스님이 주명덕씨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나에겐 극락암이 초행길이고 명정스님도 초면인지라 꾸벅 인사만 하고

분이 말씀을 나누시도록 자리를 피해 카메라를 들고 건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명정스님이 “보살님 잠깐 대청으로 오시지요. 보여드릴께 있습니다”

대청에서 기다리니 명정스님이 낡은 왕골 고리짝 같은 것을 들고 나오셨다.

“이걸 보고 계십시오” 그리고는 뜰에 있는 주명덕씨에게로 갔다.

고리짝 윗 뚜껑을 들어올리니 편지가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웬 편지들인가 하고 하나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우표는 일제시대 우표로 소화 년도가 찍혀있고

발신자 이름은 한암스님이었다. 한암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들이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당시의 내 지식으로 알 수 있는 이름은 효봉스님, 한용운 스님, 만공스님, 경허스님

정도 였다. 당대의 선지식들이 주고 받은 편지들이 고리짝에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소화 우표딱지와 함께....

이 고리짝 편지들을 추려 최근에 명정스님이 “산사에서 부친 편지”라는 책으로 편찬해 냈다.

나는 그 편지들 중에서 한암스님 것만 골라 필체를 보고 내용을 읽어보고 감격스러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아직도 명정스님이 친한 주명덕씨에게가 아니라

왜 초면인 나에게만 그 귀중한 고리짝을 내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암스님의 가사장삼을 보다


유성 싸이언스 팍에서 엑스포가 열리던 해,

나는 월간 해인의 ‘호계삼소“라는 스님탐방기사의 사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달 불교계의 비중있는 스님들을 인터뷰하는데 작가와 함께 가서

산 법문같은 말씀도 듣고 사진도 찍는 아주 즐겁고 보람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달에는 엑스포 기간중이라 엑스포 대회장에서 불교신자들을 위해 예불과 포교를 담당하게 된

유성 소재 자광사 주지스님을 탐방하기로 작가와 이야기가 되었었다.


그런데 작가가 스님과 약속한 날짜에 내가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날이라 함께 갈 수가 없어서

작가더러(그 때는 승진행이 아니었어요) 혼자서 인터뷰를 하라고 하고는

며칠 후 나도 혼자서 자광사에 찾아갔다.

취재를 하려면 작가는 쓸만한 내용이 나올 때까지 어떤 때는 몇시간이고 함께 대화를 나누지만

사진작가는 원하는 사진이 될 때까지 몇 분이면 끝날 때도 있다.

‘호계삼소’는 4년씩이나 해오던 일이고 단 두 커트의 정형화 된 사진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 릴 이유가 없었다.

삼배를 올리고 차를 한잔 얻어 마시고 촬영을 하려는데

지스님께서 “잠깐 기다리세요. 보여드릴게 있어요.” 하신다.

방을 나가시더니 웬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들고 들어오셨다.

“이것이 한암스님의 가사장삼입니다”하시면서 보자기를 열어보였다.

“당시 한암스님을 따르던 궁중의 상궁들이 큰스님께 지어올린 옷이랍니다.

이 옷을 탄허스님이 갖고 계시다가 저에게 물려주셨지요.”

“대학의 의상학과 교수들이 찾아와 보여달라고 사정해도 안보여주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이 옷을 싸고 있는 보자기만이라도 빌려달라고 하더군요.”

지금 기억에 명주인지 비단인지 참 고급스런 천으로, 펼쳐놓은 싸이즈는 자그마해보여

한암스님 체격이 그리 크시지는 않으셨던가보다 라고 느꼈었지요.


펼친 옷을 다시 접어 보자기에 싸려는데 손님이 오셨다.

이 절의 화주라 했다.

시의원인지, 군위원인지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돈도 많고 불심도 깊어

이 절을 짓는데 이 분들의 도움이 가장 컷다고 했다.

스님은 보물을 몰래보다 들킨 사람처럼 마지못해

“아직 한암스님 가사를 보신적이 없으시죠?”하면서 보자기를 다시 펼쳐보였다.

화주부부는 감탄하면서 황공스런 태도로 한암스님의 가사를 구경했다.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자광사 주지스님은 자기절 화주에게도 안보여주고

전통의상을 연구한다는 학자들의 요청도 거절하면서까지 아끼는 보물을

잠시잠깐 다녀가는 초면의 나에게 왜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 후로도 광주의 어느 태고종 절에 승진행과 함께 취재를 갔을 때도

그 절의 주지 스님이 한암스님의 또 다른 유품을 보여주기도 했다.

왜 스님들은 나를 보면 한암스님과 관련된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할까?

왜 나를 보면 한암스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질까?


20여년전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동양의 심오한 정신세계를 자유로운 서양의 표현방법으로 시각화 해보려고

주명덕씨를 따라 처음으로 해인사엘 갔었다.

장경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웬 스님이 “보살님 공양드시러 오시랍니다.” 한다.

스님을 따라 외인출입금지 팻말을 넘어 들어가니 주명덕씨와 다른 스님들이 함께 있었다.

공양 후 차를 마시고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아까 그 스님이 옆에 와서는

“보살님을 압니다” 한다

“저는 스님을 처음 뵙는데요?. 저를 어디서 보셨나요?” 하니

“어제 만난 사람 오늘 보면 모릅니까?” 한다.

그 스님이 말한 ‘어제’란 전생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이 스님이 바로 지장암에 동행했던 스님이고

나중엔 나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된 나의 mentor(정신적인 지주), 돈오 스님이시다.

그런데 나는 이 스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영혼이 맑았던 그 시절에는 이 스님과는 텔레파시로 통했었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선방과 수도암, 보리암 등 기도처에 주로 계시는 스님을

내가 만나고 싶어도 연락할 길이 없어 간절히 생각을 보내면 전화가 왔다.

"보살님, 텔레파시 보내셨읍니까?" 하고

그러면 나는 당면한 고민을 이야기 하고 스님의 조언을 부탁하면

"몽수경을 외우면서 매일 108배를 하십시요."

"몽수경을 모르는데요. 전화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주기도문은 아십니까?"

"네"

"그러면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108배를 하십시요. 마찬가지니까요.

다음에 서울가면 몽수경을 적어드리지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텔레파시를 보내도 불통이다.

세속에 찌들어 내 영혼이 너무 탁해져 그런가보다.

작년 년말엔 남편의 제자인 그 스님의 고교동창이

"돈오스님이 돌아가셨다면서요?" 하고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 시절 돈오스님을 아주아주 좋아했던 도반, 돈기스님을 최근에 찾았는데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연락처는 모른다고 하셨다.

6-7년전 영국에서 공부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던 스님을 인사동 길거리에서 상봉했다.

그 때까지는 나의 텔레파시가 작동을 했던 모양이다.

안국동 조계사 근처에 볼일을 보고 몹씨 추운 날씨때문에

얼른 지하철로 들어갈 생각만 하며 뛰고 있었는데

인사동 입구에 이르자 공연히 인사동쪽으로 가고 싶어졌다.

볼일도 없는데. 무엇에 끄달리듯 인사동 쪽으로 가다가 수도 약국 근처에 이르자

걸망을 맨 웬 스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계사가 가까워 인사동에서 스님들을 보는 것은 다반사라

아무생각없이 지나치면서 뒤돌아보니 돈오스님이었다.

영국에 계시다는.

스님도 놀라셨다.

건강이 안좋아 단식을 하려고 남해 보리암으로 가는 길에 약을 사러 들르셨다고 했다.

보름쯤 후 단식을 끝내고 나서 떠나시기 전에 다시 만났을 때

"스님 승복을 한 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하니

"물빨래하기 좋은 데도롱으로 된 승복이 두 벌 있읍니다.두 벌 이상은 짐입니다." 며 거절하셨다.

그 전에도 서울 오시면 노자돈 하시라고 아주 적은 돈을 드리면

"고맙게 받겠읍니다" 하시고는 다음 만날 때 그 돈으로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사오셨다.

노자돈을 받는 것은 나에게 복 지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시며.

이런 mentor를 나는 잃어버렸다.

내 영혼이 맑지 못해서.


나의 만다라 ‘열반과 환생’은 이런 경험 후 만든 것이다.






고한 스님들, 행자시절은 어땠을까|세계일보|2008-01-31

◇사진 작가 김민숙씨가 촬영한 미공개 성철 스님 사진. 왼쪽은 성철 스님 상좌 원융 스님이고, 오른쪽은 원택 스님. ‘나의 행자시절’에는 김씨가 찍은 정감어린 옛 사진이 무수히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