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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미래촌편지36- 칼레의 기적

미래촌편지36- 칼레의 기적

*'청년독립기업' 블럭에서 퍼온 글입니다.(동장 김만수)

칼레의 기적을 아시나요?


공은 둥글고 축구 골대의 바도 둥글다. 야구공의 실밥은 108개고, 골프 홀의 지름은 108㎜. 놀이를 만든 이들이 모두 서양 사람이니 원이나 백팔의 의미를 가져다 붙이는 것이 견강부회겠지만 어쨌든 스포츠의 재미가 바로 그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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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은 둥글다 그래서 축구는 더욱 재미있다.


돌고 도는 승부, 승패에 얽힌 수많은 번뇌, 약자와 강자의 뒤바뀜, 그리고 전혀 뜻하지 않은 의외의 결과. 하지만 원인 없는 결과는 결코 없다. 프랑스 ‘칼레’는 아마추어 축구팀. 그러나 제대로 된 팀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주장인 레지나 베크는 장식품 가게의 종업원. 그뿐 아니다. 청소용역회사 직원, 난방기구 수리원, 부두노동자, 정원사, 수도배관 기술자, 하급공무원 등 칼레의 선수들은 다양한 생업에 종사하며 취미로 축구를 즐기는 순수 아마추어였다. 우리 시각에서 보면 조기 축구회 정도의 수준이다.

프랑스컵 결승에 오른 항구도시 노동자들

2000년 5월 7일 프랑스컵 결승전. 그곳에선 82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역사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8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프로팀 ‘낭트’와 우승을 다투게 된 파트너는 프랑스 4부 리그 축구팀 ‘라싱 유니온 FC 칼레’. 일하는 틈틈이 축구를 한 그들이 밥 먹고 축구만 한, 또는 밥을 먹기 위해 축구를 하는 프로팀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그 격전의 장에 당당하게 들어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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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는 도버해협을 끼고 영국과 최단거리(34Km)에 있는 인구 8만 명 정도의 역사적으로 유명한 작은 항구도시.

유명한 조각가인 '오귀스트 로댕'의 걸작품 중 하나인 <칼레의 시민들>의 배경이기도 하다. 더구나 칼레 시는 인구의 절반가량이 연 수입 5만 프랑 이하의 궁핍한 생활을 하는 우울한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칼레는 이 도버해협의 작은 항구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불과 2개월여 전만 해도 인구 7만5천의 외딴 항구도시의 이 아마추어 팀 ‘칼레’는 그 지역에서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칼레’의 홈구장은 좌석이 1,000석도 안 되며 그 구장마저도 비가 올 때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들의 경기는 고작 수백여 명만이 지켜볼 뿐이었다. 이제 ‘전국적인 팀’이 되었고 기적의 팀으로 불린다. 물론 막판까지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그들이 그동안 보여준 노력은 기적 이상의 것이었다.


기껏해야 동네 팀이나 청소년 클럽 팀을 상대했던 ‘칼레’가 주목을 받은 것은 2부 리그의 프로팀 ‘릴’과 ‘칸’을 꺾었을 때.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들의 돌풍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껏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의 다음 상대는 1부 리그 팀이었기 때문이다. 팀원들 역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쟁쟁한 프로팀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만도 꿈같은 일이었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지역주민들도 그들을 열렬히 응원했으며 8강전에서 칼레는 ‘스트라스부르’도 눌렀다.


준결승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축구팀인 ‘보르도’까지 3대1로 쓰러뜨렸다. 열악한 홈구장 시설 때문에 랑스에서 열린 준결승전에는 칼레 전 시민의 절반이 넘는 4만여 시민이 원정응원을 펼쳤다. 경기 승리 후 칼레 시청 광장에는 98년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컵을 따냈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여 ‘칼레’의 승리를 자축했다.

기적 같은 승리에 프랑스 전역이 ‘칼레’ 열풍에 휩싸였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에메 자케 감독은 ‘칼레’ 선수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가 일일 감독을 자처하며 꼼꼼히 작전을 알려주기도 했다.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인 <르몽드>는 프랑스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칼레를 "인간의 얼굴을 한 축구의 수호자"로 극찬하기도 했다.


프랑스 컵 축구대회 82년 만에 처음 결승에 오른 아마추어 팀. 2만개가 넘는 축구팀이 있는 프랑스에서 이들이 결승에 진출한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칼레’는 결승전까지 10경기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드디어 결승전이 열리는 파리 생드니 구장. 프랑스 축구팬들은 ‘칼레’가 전통의 명문 ‘낭트’마저 잡고 우승하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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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vs 낭트

관중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업은 ‘칼레’가 먼저 한골을 터뜨렸다. 전반 34분 슈퍼마켓 창고정리 직원 제롬 듀티트르가 선제골로 기세를 올렸다. 드디어 신화가 완성되는 듯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리오넬 조스팽 총리를 비롯한 7만여 관중은 환호했으며 ‘칼레’의 신화가 예고되는듯했다. 하지만 '칼레의 기적'은 여기까지였다.


후반 5분, ‘낭트’ 미드필더 앙투안 시비에르스키가 동점을 만들었고 종료 직전에는 ‘낭트’ 공격수 알랭 카베글리아가 자신이 얻은 페널티킥에 성공하며 경기를 뒤집었다. (재생 화면을 통해 카베글리아가 얻은 페널티킥 선언이 시뮬레이션 동작에 현혹된 주심의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관중석에서는 야유와 분노의 함성이 메아리쳤고 경기가 끝나자 ‘칼레’ 선수들은 허탈한 듯 경기장에 드러눕거나 몇몇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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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열린 시상식에서 ‘낭트’의 주장 미카엘 랑드루는 ‘칼레’의 주장 레지날 베크의 손을 이끌고 본부석에 올라가 우승컵을 함께 들어 올리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경기를 지켜본 시라크 대통령은 “두 팀 모두 승자다. ‘낭트’는 결과에서 이겼고 ‘칼레’는 정신에서 이겼다”고 말했다. 팀을 이끌고 결승까지 오른 ‘칼레’의 로사노 감독은 “우리 팀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경기에선 졌지만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았다”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모든 사람들이 기다렸던 ‘칼레의 기적’은 그들이 결승에 올랐을 때 이미 이루어졌다. 이날 경기 전 <르 파리지엥>이 18살 이상 1천명에게 여론조사를 한 결과 61%가 ‘칼레’의 승리를 희망했고 이 중 85%는 ‘칼레는 축구의 모든 것을 돈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대답했다. 이들이 기적을 연출하는 동안, 항구 도시 칼레는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듯 활기를 회복하고 이웃 간의 정이 넘치는 따뜻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전년도 우승팀 ‘낭트’를 만나 무릎을 꿇긴 했지만 무에서 유를 이룩한 아마추어의 기상은 프랑스 전체에 진한 감동을 불어넣었다. ‘칼레’는 결승전 승패에 관계없이 모든 이에게 기적의 마음을 심어준 것이었다.


‘섬개구리’ 농구팀과 청소년 축구팀의 투지


우리 스포츠사에도 이런 기적이 있었을까.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한 분교가 있다.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2시간 이상을 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신안군 안좌초등학교 사치분교가 오래 전 칼레와 같은 기적을 일으켰다. 소년체전이 한창 붐을 일으키고 있던 지난 72 사치분교 농구팀이 전남도 대표로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78명뿐인 조그만 섬의 분교 농구팀이 전남도를 대표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 힘든 일. 그런데 그들은 달랑 12명의 선수로 도시의 아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뛰었다. 12명은 이 학교 고학년 중 조금이라도 농구를 할 줄 아는 학생을 선수로 뽑아 만든 숫자. 도시의 웬만한 골목 농구팀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도시에서 제대로 농구를 한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이나 작았던 사치분교의 농구선수들은 그러나 투지로 무장, 화려한 팀들을 무찔렀다.


결승에 올랐을 때는 부상을 입지 않은 선수가 없을 정도로 허약한 팀이 되어 결국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들은 작은 힘으로 우리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사치분교 농구팀의 이야기는 <섬개구리 만세>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또 한 번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그들의 준우승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농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모두 한마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청소년축구. 수업을 듣는 시간보다 축구를 하는 시간이 더 많기는 하지만 남미나 유럽에 비하면 아마추어 팀이나 마찬가지다. 남미청소년 축구팀들이 클럽소속의 프로지망생이지만 한국은 모두 학생. 때문에 한국이 83년 제4회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을 때 세계는 이 팀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한국은 첫 게임에서 스코틀랜드에 0-2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한국의 돌풍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큰 대회 경험이 없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한국은 상대들이 겁먹을 정도로 그리 강하지 않다는 점을 깨닫고 힘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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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


이틀 뒤 멕시코를 꺾은 한국은 오스트레일리아마저 2대 1로 누르고 2승1패를 기록, 스코틀랜드에 이어 조2위로 준준결승에 올랐다. 그러나 8강 상대가 너무 강했다. 전통적인 축구강국 우루과이. 엄청난 고비였다.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의 부지런한 한국축구에 찬사를 보내던 세계의 축구 전문가들도 대부분 한국의 패배를 예상했지만 한국은 벌떼 공격으로 1-1 승부로 가져간 뒤 연장 전반 14분 신연호의 결승골로 거함 우루과이를 무너뜨렸다.


세계 4강. 외신들은 한국팀을 ‘붉은 악마’라고 부르며 그 투혼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모든 국민들의 아침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붉은 악마들의 진군은 베베토와 둥가가 뛴 브라질의 벽에 걸려 멈췄지만 지금도 청소년 축구사에 남아 있는 이변이다.


기적과 이변을 부르는 아마추어리즘


2002년 모기업의 재정이 끊겨 전 직원이 카드를 돌려막으며 버텼던 프로농구 코리아텐더가 서울 삼성을 꺾고 4강에 오른 것이나, 순수 아마추어로 구성된 서울대 야구부가 2004년 199패(1무승부) 끝에 첫 승을 거둔 것은 대단히 인상적이다. 반면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 부어서 최고 선수를 끌어 모으는 스페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 ‘악의 제국’으로 불리는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등은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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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패 뒤 1승을 올린 서울대학교 야구부의 힘찬 파이팅!


투입과 산출이 명확해야 하는 경제학적 시각에서 보면 스포츠처럼 불합리하고 비경제적인 사업도 없다. 돈 많이 썼다고 우승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몸값 비싼 선수가 최고의 활약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약팀이 강팀을 물리치는 비경제적인 현실이 팬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아이러니 같지만 실은 당연한 결과다. 돈 많이 쓴 팀, 스타가 많은 팀이 항상 이긴다면 누가 스포츠를 보겠는가.


이변이 있어 즐거운 스포츠. 그러나 사실 이변은 없다. 스포츠의 프로화로 기량은 발전했지만 정당하고 열심히 싸우는 아마추어리즘은 그만큼 퇴색했다. 승부를 떠나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때로 이변을 일으키고 기적을 낳는 것이니 이변과 기적은 운이 아니라 노력의 당연한 결과물이다.

2009/01/15 16:39 2009/01/15 16: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