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문화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났던 고개 조령은 관리, 계립령(현 하늘재)은 보부상과 우마 통행 잦았던 고개 | ||||||||||||||
백두대간은 기후, 지형, 식생 및 생태 등의 자연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지역, 종교 및 사상 등의 문화사적 측면이 축적되어 있는 거대한 자연·문화복합체계로서, 그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가 백두대간과 도로의 관계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겨레는 자연의 길인 산맥도 길(山經)이라고 했고, 문화의 통로가 되는 도로도 길로 일컬었으며, 궁극적인 마음 상태 역시 길(道)이라는 같은 말을 쓴 사실이다. 그래서 자연과 문화와 마음은 서로 만나고 합치될 수 있는 통합적인 코드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한강과 낙동강 권역, 조령·계립령 통해 결속 일반적으로 산맥을 도로와 상관지어서 그 기능적 측면을 살펴보자면, 산맥은 유역권 범위, 혹은 능선 기준으로 해당 지역의 문화와 기후를 나누는 경계가 되지만, 도로와 고갯길은 산맥을 경계선으로 구분된 지역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경관요소가 된다.
한편으로 도로는 마치 인체의 핏줄처럼 산맥으로 나뉜 지역을 통합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두대간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구분되던 지역은 수많은 고갯길과 도로로 인해 문명과 정보가 전파되고 취락이 발달해 문화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백두대간을 가름하는 유역권으로서의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은 자연환경이 다르고 역사·문화적으로도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나 두 지역은 영남대로를 통해 결속됐다.
조선시대의 도로 중에 가장 중요한 도로는 한양에서 동래를 잇는 간선로인 영남대로인데, 이 영남대로는 백두대간에서 새재(조령), 혹은 하늘재(계립령)를 통과했다. 그래서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여러 역사문화적인 경관이 형성됐다. 조령에는 조선시대 이후로 주흘관을 비롯한 여러 군사적 방어시설이 축조됐으며, 새재와 하늘재 주변 지역인 미륵리, 관음리 등에는 고갯길과 관련한 관음, 사점, 황정, 안말 등의 영하취락(嶺下聚落)이 발달했다. 그리고 하늘재 아래에는 도로와 관련된 교통시설의 유적지가 현재의 미륵사지 부근에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역원시설과 종교시설의 결합은 고려시대 이후 주요 고갯길에 입지하는 사찰이 역원의 역할도 겸해 담당했던 양상을 표현해준다. 조선조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역할 백두대간의 고개를 넘는 영남대로의 경로는 역사적으로 발달과정을 겪었다. 고대의 교통로로서 일찍이 계립령은 156년에, 죽령은 158년에 길이 뚫렸으며, 조령은 조선 초기에 와서야 개척됐다. 삼국시대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 화령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이었으니 인근에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은 한강, 낙동강, 금강의 상류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력이 충돌한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간선교통로 중에서 제1로는 죽령을 통과해 안동을 경유하고 경주에 이르렀으며, 제2로는 계립령을 통과하여 예천에 이르고 안동에서 제1로와 합류했다. 제3로는 역시 계립령을 넘어 문경과 상주를 경유했고, 제4로는 추풍령을 지나 김해로 통했다. 죽령과 계립령을 통과하는 제1로와 제2로는 고려시대에 중요한 도로로 기능했으며, 고려 후기(1361년)에 수십만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선택한 피신길이기도 했고, 조선 초에는 왜의 사신이 상경하는 길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방위상의 문제를 고려해 조령 외의 모든 고갯길을 폐쇄하고자 했으나 계립령은 역사가 길고 통행자가 많아 남겨두기로 했는데, 조령이 관리 및 일반 여행자의 통행이 잦았던 것과 달리 계립령은 보부상과 우마(牛馬)의 통행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제 때 철도 건설 이후 고개 기능 급속 쇠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령은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시됐으며, 많은 관방이 설치됐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령의 관문들이다. 조령 일대는 주흘산ㆍ부봉ㆍ기산ㆍ조령산 등이 이루는 천험의 요충지로서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문경관문을 구축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6월에 설치할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경제사정과 조정 내에서의 논란으로 설치가 지연되다가 그 이듬해에 비로소 조곡관에 중성(中城)을 개설했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중성을 크게 중창하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초곡성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조령산성을 축조했다.
조령 일대에는 조령원(鳥嶺院), 동화원(東華院) 등의 원터와 진터, 군창(軍倉) 터, 신ㆍ구임 경상도 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했다는 교구정지(交龜亭地), 고려 말 공민왕이 거란의 난을 피하기 위한 행궁이 있었다는 어류동(御留洞) 등 사적지가 있다. 그 중에서,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서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했고,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그리고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한 제2관문은 중성, 혹은 조곡관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훼손되어 1978년에 복원했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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