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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이 하나도 없는 점심시간, 밥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다. 나 혼자 먹자고 상 차리기도 그렇고 또 안 먹고 넘어가자니 그것 또한 그렇다. 뭘로 한 끼를 때우고 넘어가나?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고 괜히 이것 저것 반찬 통 뚜껑을 열어본다. 이것도 그다지 당기지 않고 저것도 또 그렇네. 진짜 뭘 먹지? 그럴 때 간단하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커다란 비빔 그릇에 싱싱한 야채를 손으로 뚝뚝 잘라 넣고 참기름 두어 방울 떨어뜨려 밥 한 주걱 푹 떠넣고 쓱쓱 비벼본다. 그 위에 고추장을 얹으면 금상에 첨화가 된다. 그러면 혼자 먹는 밥상이 외롭지도 않고 처량하지도 않다. 한 입 가득 입에 넣고 암팡지게 먹다보면 괜히 살맛이 나기도 한다.
상추밭을 둘러보다가 상추를 솎아주기 시작했다. 아깝다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막 솎아냈다. 빽빽하게 자라서 그런지 상추가 아주 연했다. 지천이면 귀한 줄을 모른다더니 상추가 푸지게 많아서 그냥 쌈 싸 먹기에는 왠지 밋밋하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채전 밭에 상추 솎아 쓱쓱 비벼보자 그래 쌈장을 만들어 보자. 소고기 달달 볶아서 고추장 넣고 버무린 양념 고추장을 만들어 보자. 마침 냉장고 안에는 갈아놓은 소고기가 조금 있었다. 그래서 프라이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살짝 달군 다음에 소고기를 넣고 볶아주기 시작했다. 양파를 넣고 고추장을 넣고 거기에 통깨까지 조금 넣어줬다. 휘휘 저어주다보니 양념 고추장이 복닥복닥 끓기 시작한다. 마치 태고 적의 용암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고추장은 불쑥불쑥 여기저기 터져 오른다. 이제 다 된 거다. 만드는 게 별 거도 아니다. 하지만 해놓고 보면 별 거가 되는 게 또 양념고추장이다.
강화로 이사 온 첫 해에 우리는 강화읍에 있는 작은 빌라에서 일년간 살았다. 말로는 시골생활 적응기간이라고 했지만 사실 강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 없이 이사 왔기 때문에 적응기간이라면 적응기간이기도 했다. 빌라 뒤는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사람들은 산자락을 갈고 엎어서 채전밭을 꾸며 놓았다. 밭둑에는 때때로 꽃이 피었다. 돈냉이꽃이 노랗게 깔깔거리며 피어오르더니 어느 날 보라색 붓꽃이 피어 있었다. 초여름 한낮에는 그리움처럼 하얀 개망초꽃이 무리지어 피어올랐다. 봄이 되자 사람들은 골을 타고 씨를 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곳에는 온갖 것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상추도 있었고 쑥갓도 있었다. 쪽파도 돋았고 시금치도 나왔다. 온갖 것들이 땅을 차고 올라오더니 곧 성성해졌다.
앞집에 살던 상준이 엄마가 어느 날 솎은 애상추를 한 바가지나 갖다 주었다. 다듬을 필요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연한 상추였다. "이거 고추장 넣고 비벼 먹어 봐요. 연해서 먹을 만할 거예요." 애상추를 한 바가지나 받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그냥 고추장 넣고 비벼 먹지 말고 새로운 거로 비벼 먹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침 국거리 소고기가 냉장고 안에 있었다. 그것을 꺼내 곱게 다져서 참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달달 볶았다. 그리고 양파 다진 것을 함께 넣고 조금 더 볶아준 다음에 고추장을 넣고 잘 섞어 주었다. 애들이랑 먹을 거기 때문에 설탕을 좀 넣어서 달달한 맛이 나오게 했다. 그게 다였다. 소고기에 양파를 넣고 볶다가 고추장을 넣고 볶아준 게 다였다. 그런데 고추장맛이 기차게 좋은 거였다. 그날 우리 집 식구들은 배가 불러 씩씩댈 정도로 밥을 비벼 먹었다. 포만감 뒤에 오는 나른함은 행복이었다.
주말이라 딸애가 집에 왔다. 한창 외모에 신경을 쓸 나이인지라 딸애는 뭘 들고 다니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집에 오갈 때면 딸애 손에는 늘 종이가방이 들려 있다. 집에 올 때는 빈 가방이지만 갈 때는 종이가방은 찢어질 듯 볼록하다. 요거 저거 챙긴 밑반찬들 때문에 종이기방은 늘 찢어질 듯 위태롭기만 하다.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포시랍게 자라던 딸애는 대학에 가자 자갈밭의 잡초가 되어 버렸다. 해주는 밥 먹으면서 편히 지내다가 지 입 지가 책임져야 하는 자취생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침은 건너뛰고 점심은 학교 식당에서 먹고 저녁은 밖에서 사먹는 생활의 나날이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밥 해 먹을 때도 있다 했다. 그럴 때를 위해서 밑반찬들을 만들어서 보낸다. 밥반찬 하라고 보낸 밑반찬들을 딸애는 군입거리로 먹을 때가 더 많단다. 오징어채며 마른새우볶음 같은 걸 해주면 군입거리로 먹는단다. '그래, 오징어채 조림 같은 군입거리 말고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거로 만들어 주자. 밥해서 비벼먹을 수 있는 양념고추장을 만들어 주자.' 딸을 위해서 양념고추장을 만들기로 했지만 사실 상추가 쏟아져 나오는 지금 철에는 양념고추장이 꼭 필요하다. 그래서 또 만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찜질방에서 들은 소리가 생각났다. 자녀들을 시집장가 보낸 왕언니들이 농담 삼아 그랬다. "자식들이 손자 데리고 오면 반갑고 좋은데 놀다가 자기들 집에 가면 더 좋아." 두 부부가 조용히 사는 집에 아들 손자 며느리가 오면 반갑고 좋기가 한량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힘이 든단다. 정신이 쏙 빠진단다. 그런데 내가 꼭 그 짝이었다. 딸이 와서 반갑고 좋았지만 챙겨줄 게 많아서 바쁘기도 했던 주말이었다. 그래도 딸아, 집에 자주 와라. 엄마 밥 먹을 때가 좋을 때란다. 잔소리 듣기가 귀찮겠지만 그게 바로 부모의 사랑이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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