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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촌 美來村

미래촌생활강좌 제194강 080204(월) : 다시태어난 인생/류성자 민화화백

민화작가 류성자씨



내 나이는 이제 아홉 살

“병아리가 알을 깨고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심정으로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는 9월9일부터 14일까지 코엑스에서 경향신문사와 (사)환경미술협회가 공동 주최하는 ‘2004 대한민국 환경미술 엑스포’의 민화부문으로 유일하게 출품(개인부스전)하는 류성자 선생(66세).
그는 지난 95년 12월 광진구보건소 지역보건과장으로 퇴직하기까지 25년을 서울시 공무원으로 재직하였다.

퇴직이후부터 자신을 위한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민화인데 벌써 9년이라며 밝게 웃는 류성자 선생. 그리고 그는 당신의 나이는 이제 아홉 살이라고 말한다.
그는 미술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또 퇴직 이전에 민화를 특별히 배운 것도 없었기에 열심히 해보리라 마음을 굳히고 시작했지만 그리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림에 빠져들었고 짧은 시간동안 많은 대회에서 입선을 하여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류성자 선생은 2002년도에 ‘제23회 대한민국 현대 미술대전’에 입선을 비롯하여 올해 ‘제5회 대한민국 여성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하는 등 각종 대회에서 십 여 차례 이상 수상을 하였다. 또 올해 ‘몽골 울란바토르 지나바자스 예술박물관 초청 전시회’에 출품한 것 외 그가 몸담고 있는 도린회에서 개최하는 전시회에 해마다 참가하고 있다.

“도린회는 민화를 좋아하는 도봉구 이웃들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1996년도에 발족했지요.”
도린회는 발족 이후 미국 시카고 등 국내외 초대전도 여러 차례 갖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이다.

“민화는 우리 민중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예전에 왕이 집무를 보던 곳을 보면 항상 왕의 뒤쪽에는 일월도가 그려져 있잖아요?”
민화의 기본색인 오방색,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청색, 백색, 남색, 검정색 그리고 가운데 노랑색을 써 다섯 가지 색을 나타내는 것을 오방색이라고 한다.
“오방색을 이용해 개인의 희망, 행복, 다복 등 모든 소망을 담아 그림을 그려내는데 저는 이 그림을 그릴 때가 너무 행복해요.”
류 선생은 자신의 민화를 통해 그 속에 모든 행복을 담아 표현해 내고 싶다고 한다.

남부시립병원에 재직 중이던 1975년 한국 영나이팅게일상 수상

지금은 민화작가이지만 그의 원래 직업은 간호사였다.
1970년 영등포 보건소에서 지방 간호직으로 공직에 첫 발을 내딛은 류성자 선생.
공직 생활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일을 한 덕분에 그는 1975년 남부시립병원 재직 당시 국립의료원 간호학교가 수여하는 ‘한국 영 나이팅게일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남부시립병원은 행려병자들의 천국이었다.
“응급실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의식 없이 버려진 환자들이 당시만 해도 왜 그리 많았던지...”
그는 행려병자라 해서, 그들을 절대 함부로 다루지 않고 당신의 가족인양 정성껏 씻기고 보살피는 일을 했다. 퇴근까지 미뤄가며 환자뿐만 아니라 병실의 위생에 까지 신경 쓰고 관리한 덕에 그가 근무하는 응급실의 환경이 쾌적해졌다는 평가가 그에게 큰 힘이 되곤 했다.


1980년 청백봉사상을 수상하기까지...

1978년 7월 사무관으로 승진하면서 아동병원 간호과장으로 부임한 그는 그곳에서 또 다시 자신의 능력에 날개를 달았다.
“그곳에 있는 아이들이 결코 남이라는 생각을 안 했어요. 맑게 웃는 그 아이들을 보면 앞으로 이 아이들이 어찌 험한 삶을 살아갈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많이 아팠지요.”
복합장애가 기본인 아이들. 게다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을 직원들과 같이 씻기고 먹이고 안아주고 하다보면 어느새 당신의 아이마냥 흠뻑 정이 들어버렸다고 말하는 류 선생. 그러나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직원들은 물론 아이들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적은 예산, 부족한 인력, 넘쳐나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 상황을 견뎌 냈는지... 그러면서 그는 당시 직원들이 고생 많이 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리고 그는 간호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예 · 결산을 말끔하게 공개하고, 관리해1980년에는 청백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독일병정이 이룬 성과, 공직에서 가장 큰 보람

1983년 서울시 의약과에 근무하면서 부터 그는 서울시의 보건사업과 관련하여 체계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관심분야는 의료부문중 소외계층에 속하는 ‘영세민들의 의료, 건강분야’였다. 그는 영세민들의 의료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국내 보건 의료사 30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하여 서울시보건소에 ‘지역보건과’를 신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1990년 6월 그는 “보건소의 기능 강화 및 활성화를 위한 업무분석”을 리포트로 만들어 결재를 올렸고, 그 결과 5개 보건소에 지역보건과가 신설되게 되었다.
“간호직 공무원으로써 이보다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의료부문에서 거의 소외되는 영세민들이 정부의 보호아래 제대로 된 건강관리를 받게 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저는 가슴 벅참을 느꼈습니다.”
당시 그 일을 추진하면서 얻은 그의 별칭이 ‘독일병정’이라고 한다. 업무와 관련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면 이와 관련 자료를 찾아, 그 당위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상사들이 지어 준 별칭이란다.

1993년 ‘갈고리동장’으로 맹활약

1993년도에는 정부의 여성 동장 임용시책에 따라 그는 간호직 으로는 드물게 쌍문3동의 동장으로 임용되었다.
동장이 된 그는 그곳에서 또 한 번 그의 억척스러움을 발휘, 살기 좋은 동네 만들기에 최선을 다했다.
오전 7시면 출근해, 동네를 한 바퀴 순찰하며 쓰레기를 줍고 주민들에게 적치물을 치워줄 것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싫은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고 그 일을 꾸준히 하였고 그 결과재활용쓰레기를 매각한 대금으로 문패가 없는 주민 7백여명에게 플라스틱으로 된 문패를 달아주는 온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또 해가 지는 오후 7시 이후에는 가로등과 후미진 골목길에 있는 외등, 방범등 등이 제대로 되어있는 지 순찰하는 일로 하루14시간을 근무할 정도였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손에 갈고리를 들고 다니며 물이 잘 안 빠지는 하수구에는 직접 갈고리를 넣어 쓰레기를 모두 끌어내 빗물이 제대로 빠지게 하는 일을 하였다하여 그는 ‘갈고리 동장’ 이라는 또 다른 별칭을 얻었다.
“정말 후회 없이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건 제게 주어진 일이라면 저는 지고는 못 사는 못된(?) 성격 탓에 항상 최선을 다했지요.”

그렇게 다시 95년에 광진보건소 지역보건과장으로 발령받으면서 그는 그곳에서 25년여의 공직생활을 마쳤다.
“당시만 해도 구조조정이나 뭐 그런 건 없을 때였는데 저는 공직에 입문 당시 58세 정년을 이야기했고 그 약속을 지켜 명예퇴직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후배 여러분도 퇴직을 목전에 두고 무언가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미리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퇴직하기 전에 취미생활이던 뭐든 간에 미리 시작을 하고 나오면 퇴직을 해도 본인이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리고 그는 퇴직 이후가 본인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한다.

또 삶의 참다운 모습과 관련하여 그는 이야기한다.
“저는 며느리가 자기도 어머니의 모습을 닮고 싶다고 말할 때가 가장 기쁘고 저의 삶에 보람을 느낍니다.”
누구보다도 가족이 인정해 주는 그런 삶이 가장 좋은 삶이라고 말하는 류 선생은 오늘도 화폭에 자신만의 꿈을 담는다. 작업기간은 수행에 필요한 용맹정진의 기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3-4시간 쉬지 않고 작품을 해도 몸에 무리가 없는 것을 보면 집중이 주는 미학이 얼마나 좋은 건가 말해 주고 싶단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소망 하나. 그는 70세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신만의 작품 전시회를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전시회가 끝나면 십장생, 모란도, 일월도 등 대형 작품을 기관에 기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화폭에 그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