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함께 푸는 실타래

동봉 2009. 1. 30. 22:28

어머니와 함께 푸는 실타래

무병장수를 비는 마음으로 실패를 감다
전희식 (nongju)

"저기 먹꼬? 실타래 아이가?"

컴퓨터 위에 올려 놓은 실타래를 발견하신 어머니가 반색을 하신다. 요즘 실들은 나일론 실이거나 명주실이라서 바늘귀에 꿰려고 실 끝을 손가락으로 부비면 끝이 더 풀어져서꿸수가 없다며 투덜대던 어머니셨다.

"인저 바.(이리 줘 봐.)"

어머니는 굼실굼실 일어 나셨다.

"무명실이라야 춤(침)을 발라 사악 비비면 바늘 실 꿰기 좋지."

▲ 실타래 두 발에 실타래를 걸고 흐뭇해 하시는 어머니
ⓒ 전희식
치매

내가 내려 드린 무명실타래를 만지작거리며 어머니는 흐뭇해 하신다.곧장 두 발에 실타래를 걸고 실 끝을 찾기 시작하셨다.

"바깥 실부텀 풀어야 돼야. 안에 실 붙잡고 풀믄 자꾸 홀치는기라."

실타래를 털털 털어 가지런히 하시더니 금세 바깥 실 끝을 찾아내셨다. 신문 한 장을 돌돌 말더니 실패대도 만드셨다. 실패를 왼손에 쥐고는 익숙한 솜씨로 8자 모양으로 태극을 그리며실를 감기 시작하셨다. 이보다 더 한 치매 치유는 없다는 걸 안다. 평생 익숙했던 물건을 들고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이.

문제는 실타래가 팽팽하도록 두 다리를 쫙 벌려야 하는데 근력이 없으신 어머니 두 다리가 자꾸만 오그라 들어서 실타래가 축축 처지는 것이었다. 나는 슬며시 닥아앉아 모른 척 하고 한마디끼어 들었다.

"어무이. 옛날에는 다 이렇게 다리에다 걸고 실타래 풀었어요?"

"아이라(아니다). 아아들이(애들이) 서로 요-리 조-리 두 손으로 벌리고 잡아 줬지."

"왜요?"

"실타래 잡아 주믄 홍시도 항개 주고 곶감도 항 개 주고 그랙꺼등(그랬거든)."

"어무이 저 한테도 곶감 항 개 줄래요?"

"곶감 오댄노(어디있냐)?"

▲ 실패감기 내가 실패를 감고 어머니는 팽팽하게 실타래를 당겨 잡으셨다.
ⓒ 전희식
실타래

어머니는 나 줄 한 개의 곶감이 없어선지 실타래를 잡으라 하지 않으셨다. 대신 실패를 내게 건네셨다. 그리고는 한쪽 발에 걸린 실타래를 벗겨서는 손으로 잡아당겨 팽팽하게 만드셨다. 나는 눈치를 채고실패를 감기 시작했다. 곧 이어 옛날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그 시절처럼 내가 실타래를 양 손에 활짝 걸치고 어머니가 실패를 감았다.

그랬더니 어머니 입에서 솔솔 실타래 풀리듯 옛날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명주실 잣던 이야기, 뽕 따서 누에 치던 이야기, 목화 심어서 미영실뽑던 이야기 등.

▲ 실 감기 옛날 방식 그대로 재현했다.
ⓒ 전희식
실타래

아뿔싸.

'새노디끌'(고향동네 작은 냇가 구석진 빨래터) 삐뚜름한 바위에서 한 겨울 손빨래 하던 얘기 끝에 숨겨진 이야기 하나가 터져 나왔다.

"물 건너 홀애비 *** 놈 그놈. 빨래터에서**댁을 옷도 다 안 벗기고 쑤셔가지고는 머시마 놔 갖고 다 키워 농게 지 새끼라고 빼뜨라 안 갔나."

나는 급히 공책에 연필을 들고 야금야금어머니의 기억을 쫒아 들어갔다. 50~60년 전의 조선 땅 산골마을 비경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