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에서 한복 짓는 여자

동봉 2009. 2. 21. 08:48

갤러리에서 한복 짓는 여자, 김영진 ‘차이’ 대표
한복은 여자의 마지막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예요
김민희 TOP CLASS 기자
사진 : 김선아
입력시간 : 2009.02.16 17:01
  • 한남동에 있는 한복집 겸 갤러리 ‘차이’에 들어서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김영진 대표가 은은한 미소로 맞는다. 아름다웠다. 꽃무늬가 비치는 진회색 저고리에 태국 진탄신 실크로 만든 노란색 치마를 입고, 반지르르하게 머리를 빗어 올려 옥비녀를 꽂고, 노리개와 쌍가락지, 앤티크 느낌의 클러치 백을 갖춘 그는 한복을 위해 태어난 여인 같았다.

    “절제미가 돋보이는 저고리와 볼륨감 있는 치마는 18세기 유행하던 한복 라인이에요. 저는 한복의 아름다움을 여기에서 찾았어요. 차이는 앞으로도 이 라인을 고수할 거예요.”

    차이는 복합 예술 공간이다. 1층은 한복 짓는 공간과 갤러리로, 2층은 살림집으로 쓴다. 살짝만 보여주겠다며 안내한 살림집도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차이에서는 한복만 짓는 게 아니다. 한복 콘셉트의 애프터 드레스는 물론, 이불, 방석, 베개, 함 등 혼례품도 만든다. 7평 남짓한 갤러리에서는 황승호, 임광규, 신동원, 김병훈, 엄미금, 박희섭, 성석진, 박명래, 김태희, 정경심 작가 등이 전시회를 했다.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은 김영진 대표가 한복 짓는 풍경도 하나의 그림처럼 가슴에 아로새기고 간다.

    차이의 한복은 소재부터 다르다. 항라와 실크를 넣어 세 겹으로 저고리를 만든다. 종이 동정 대신 빳빳한 안감을 명주로 감싸 깃을 만들고, 패티코트 대신 생명주로 속치마를 만든다. 단속곳과 속치마를 변형해서 속치마를 만드는데, 이것을 입어야 치마의 항아리 라인이 살아난다고 한다. 얼마 전 결혼한 한 연예인 부부의 양가 어머니는 숱한 협찬제의를 뿌리치고 이곳에서 한복을 맞췄다.

    “돈만 많은 분들이 오시는 게 아니에요. 감각도 있으시고, 한복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신 분들이 오세요. 그런 분들이 다른 분을 소개시켜 주시니 감사하죠.”

    차이의 한복 한 벌은 100만 원대부터 시작한다. 가격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어떤 땐 좀 억울해요. 소재를 생각하면 더 받아야 하는데…. 기모노는 1000만원이라도 사서 입거든요. 일본인에게 기모노는 평생의 꿈이지요. 그걸 입었을 때 비로소 여자가 되는 것 같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자부심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가진 좋은 문화를 실용주의 때문에 폄하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 말간 얼굴에는 젊은 날의 치열함이 깃들어 있다. 그는 얼핏 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행로들을 거쳤다. 연극배우에서 체루티와 루이비통 등 해외명품 슈퍼바이저로, 한복 디자이너로 과감하게 항로를 변경한 그에게 어떤 변곡점들이 있었을까.


    연극배우, 명품 브랜드 슈퍼바이저 거쳐 한복 디자이너로

    공연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연극에 청춘을 바쳤다. 1990년대 초반, 연극판에서 그는 화장실 세면대에서 쌀을 씻어 밥을 짓고 7000원으로 20명의 반찬을 만들면서 공연 준비를 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다가 폐결핵까지 얻었다. 경제적인 문제로 결국 연극을 접었고, 어렸을 때부터 관심 많았던 패션업계에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맡게 된 일이 코오롱에서 수입한 명품 브랜드 ‘체루티’의 슈퍼바이저. 당시 체루티는 해외에서는 유명했지만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았는데, 그가 슈퍼바이저를 맡은 후 수입브랜드 매출 2위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들은 트렌드를 좇지만 제 생각은 달랐어요. 명품은 트렌드로 입는 게 아니잖아요. 제가 잡은 콘셉트는 베이식이었죠.”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숱한 가운데 디자인 학원 근처에도 안 가 본 그가 어떻게 그런 중책을 맡았을까.

    “인사담당자가 말하길, 몇 천 명의 지원자를 만나 봤지만 저처럼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처음 봤대요. 제가 왜 이 일을 하고 싶은지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거든요.”
  • 그는 난생처음 뛰어든 패션업계에서 무섭게 공부했다. 서점을 수시로 다니면서 관련 분야 책을 섭렵하고, 밤을 새워 동대문시장을 다니며 바잉 연습을 했다. 패브릭의 이론과 실제를 공부해 천을 만져보기만 해도 원단의 함유량을 척척 맞힐 정도가 됐다. 그의 열정이 업계에서 유명해지자 여기저기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루이비통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보냈다. 2000년 한국 루이비통에서 남성복을 수입하면서 그는 남성복 의류 팀장을 맡았다. 이 용기와 집념의 여인은 자신을 “게으름뱅이”라고 평가한다.

    “저는 경쟁을 싫어해요. 남들과 똑같은 분야에 뛰어들어서 이길 자신이 없거든요. 악착같은 성격이 아닌데다 게을러서요(웃음). 다만 빈 공간이 있는데,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면 뛰어들어서 최선을 다할 뿐이죠.”

    한복 디자이너로의 변곡점은 그의 남편이 만들었다. 잦은 해외출장 때문에 아내의 빈자리를 수시로 느껴야 했던 남편은 아내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그동안 하고 싶어 하던 한복 디자인을 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선녀탕’이라고 부르는 야외욕조, 통유리로 돼 있어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갤러리 등 세심한 손길이 느껴지는 1층 아내의 공간은 남편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 연극배우와 해외명품 슈퍼바이저, 한복 디자이너. 그가 걸어온 길은 얼핏 보기에 서로 관계 없지만 일관성이 있다. 우리 극을 하면서 ‘진정한 우리 것은 무엇일까’ 하는 정체성 공부를 했다면, 유럽 명품을 다루면서는 패브릭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웠다. 그리고 지금은 두 분야의 배움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

    “한복은 여자가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오트쿠튀르(고급맞춤복)라고 생각해요. 다시맞춤의 시대가 왔어요.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짓는 한복은 창의력이 생명이에요. 한복의 색감과 라인, 제대로 갖춘 장신구가 이루어 내는 조합은 그 어떤 명품에도 비견할 수 없어요. 한국의 멋이 살아 있으면서도 유럽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는 한복을 짓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