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음덕은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동봉 2009. 3. 1. 16:50

조상의 음덕은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SBS 〈백만불 미스터리〉 52회 (2004년 5월 31일 저녁 7시 5분 방영)

조상의 묘자리는 후손에게 정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자손을 번창시키는 명당 터는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경우 조상 묘에 대한 후손들의 정성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지극하다.

SBS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소개한 프로그램의 내용은 죽어서 땅으로 돌아간 조상의 넋(魄)이 과연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렇다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전문가 의견과 실험을 통해 밝혀보고자 시도했다. (이하 방송녹취 편집)
 



조상 묘자리가 후손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가

조상 묘를 잘 쓰면 고관대작이 배출되고 잘못 쓰면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 않는다는 풍수명당설. 자손이 흥하는 땅, 조상의 시신이 편안한 자리 명당. 과연 명당에 묻힌 조상의 음덕은 시공간을 초월해 후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까. 정말 후손에게 복을 주는 명당이 실제로 있는 거라면 그곳은 다른 특별한 기운이 있는 걸까.

종로에 사는 이씨의 가족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갑자기 사업이 망하고 다섯 형제 중 세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함부로 조상 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되는 일 없던 후손은 어쩔 수 없이 무덤을 파보기로 했다.

“꿈속에서 아버지 (묘가 있는) 산이 자꾸 물에 떠내려간다든지 없어진다든지 그러면, 제가 꿈속에서도 아버지 묘를 찾아다니느라 울며불며 다니거든요.”

작업에 들어간 지 얼마 후 무덤에서 물이 쏟아졌다. 근처에 물길이 생겨 무덤이 온통 물 속에 잠긴 것이다. 무덤에 스민 물기로 조상의 유골은 검게 썩어있었다. 이런 척박한 곳에 조상을 모셨으니 죽은 영가(영혼)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장 준비가 끝나서야 자손은 비로소 안도한다.

“(이장한 후에) 편안해졌죠.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하는 형제가 아무도 없어요. 산소 이장한 뒤로….”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우리들에게 흙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낸 어머니였다. 살아있는 땅, 어머니인 땅, 이것이 풍수의 출발점이다. 결국 땅에서 태어났으니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

“명당은 땅 속에 기운이 응집된 장소를 찾는 것입니다.” (조수창 교수 / 단국대 풍수지리학)

방위를 따지고 땅의 기운을 따져 찾은 곳이 명당인지 아닌지는 흙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빛깔과 촉감이 일반 흙과는 사뭇 다르다고 한다. 비벼보면 분처럼 곱게 부서진다는 것.

그렇다면 사람들이 죽어서도 원한다는 명당의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수천년의 풍화작용으로 깎이고 다듬어져 만들어진 명당을 풍수학에서는 혈(穴)이라고 부른다.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에너지가 존재하는가

명당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고 말하는 풍수전문가 모종수 씨. 그의 주장을 실험을 통해 확인해 보기로 했다. 실험자들의 평상시 뇌파는 모두 정상. 그리고 명당이라는 무덤의 봉분에 올라 1시간 동안 앉아 있은 후 다시 한번 뇌파의 변화양상을 측정했다.

“(나타난 뇌파의 형태는) 거의 보기 힘든 뇌파 형태예요. 10헤르츠 성분의 알파파*만 나타나고 주변은 안 나타나는 형태예요.”(최정미 박사 / 신경물리학)

신기한 일이었다.실험자 네 명 모두 조금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뇌파의 일부분만 변하는 특이한 양상을 보였다.

옛말에 “뼈대있는 집안이다”는 말이 있다. 풍수가들에 따르면 이 말은 조상의 시신이 잘 썩어서 뼈만 남는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바로 그 뼈가 땅의 기운을 받아서 후손들에게 복을 전해준다는 것이다.땅에 묻힌 조상의 시신과 자손들 간에는 어떤 기감(氣感)이 있길래 그 기운을 전달받는 것일까.

실험을 통해 자손과 조상 사이에 어떤 기(氣)가 통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건강한 20대의 청년으로부터 정자를 채취한 후 실험자에게 자극을 가해 체외 정자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자극이 가해지기 전 실험자의 정자는 운동량 42%의 건강한 상태였다. 실험자를 조상, 정자를 그 후손이라는 전재 하에 진행됐다. 실험자에게 전기자극이 가해졌다. 그 결과 정자의 운동량은 훨씬 줄어 있었다. 실험자의 몸에 전기자극이 가해질 시각, 옆방에 있는 그의 정자운동력이 10% 정도 감소한 것이었다.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신기한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가 하면 나쁜 땅, 흉터에 묘를 쓸 바에는 아예 화장을 하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풍수가도 있다.

“매장에는 길과 흉이 상반되어 있지만 화장에는 그런 영향이 없습니다. 화장하면 시신은 재가 되는데, 재에서는 기(氣)를 발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손에게는 무해무득합니다.” (박민찬 / 풍수지리연구가)

어떤 자손이 조상의 음덕을 받는가 문제는 명당이 워낙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풍수전문가들조차도 명당의 조건을 제각각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지 묘자리를 명당에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 노력도 안했는데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을까.

“조상의 무덤이 좋은 땅에 모셔졌다고 전제할 때, 그 후손들 모두 똑같이 명당 발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그 땅이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내가 생전에 악행을 많이 해서 사람들의 원망을 받게 되면 그 자리에 온전하게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 (김두규 교수 / 우석대 풍수지리학)

단지 조상을 명당에 모셨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자손의 인품과 노력 여하 그리고 조상의 덕이 더해져야만 발복한다는 것이다.

좋은 땅에 묻힌 조상의 기운이 후손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그러나 조상은 사후에 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생전에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존재이기에 감사한 것이다. 이런 조상에 대한 순수한 감사와 그들로부터 받은 성실한 태도야말로 땅에 묻혀 있는 음덕을 복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이 아닐까

[이규원 객원전문기자의 대한민국 통맥풍수]<51>

퇴계 이황 묘와 도산서원 다섯 용이 탐내는여의주 명당

◇퇴계 이황의 묘. 죽기 전 유언으로 조정의 예장도 사양했다. 태극훈이 감도는 오룡쟁주형 명당이다.
사람의 죽음을 표현하는 데도 품격과 비하를 담은 용어들이 다양하다. 서거 운명 별세 승화 입적 화천 선종 소천 절명 등…. 종교와 지역, 또는 학덕의 깊이에 따라 정중한 공경어가 원용되기도 한다. 몹쓸 짓을 많이 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자가 사망했을 때는 겉으로야 삼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뻗었다’고도 한다.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산 사람에 의해 어떻게 불릴지는 스스로 곰곰이 반추해 볼 일이다.

절대 왕권 시절 임금이 진명(盡命)하면 곧 국가의 지각변동이었다. 붕어 승하 훙서 선어 안가 등이 군왕의 몰세(沒世)와 관련된 지칭어들이다. 그런데 제왕의 타계보다도 지고한 수사가 있다. 바로 역책(易?)이다. 증자(506∼BC 436)가 죽음에 임박하여 정갈한 삿자리(갈대를 엮어 만든 자리)를 바꾸어 깔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이다. 증자는 내성적 학풍으로 크게 존경받았던 공자의 말년 제자다.

우리 역사에도 역책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단지 깨끗한 삿자리를 바꿔 깔고 죽었다 해서 역책이라 불리는 게 아니고 그에 상응하는 업적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후세 사람에 회자되는 것이다.

퇴계는 자신이 죽기 나흘 전 저승길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조카 영(寗)을 불러 유언과 함께 당부의 말을 챙겼다.

“내가 죽은 후 조정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반드시 사양하라. 큰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에다 전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새기고 후면에는 본관, 조상내력, 입지, 행장만을 간단히 기록하여라. 그리고 내가 초를 잡아둔 명문(銘文)을 쓰도록 하라.”

◇영남학파의 산실 안동 도산서원. 퇴계는 나라에서 내리는 관직도 거의 사양하고 이곳에서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이다.

예장은 예조(禮曹)에서 도감을 설치해 합당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르는 절차로 당시 종1품 정승직에 있던 퇴계에게는 당연한 예우였다. 그는 국고가 낭비되는 번거로운 장의를 유언으로 사양하고 비문은 스스로 쓴 96자의 한시로 칠십 생애를 요약해 놓았다. 후학들이 자신의 행적을 함부로 미화할까 염려해 지은 그 자명문(自銘文)이 천하제일 문장이다.

명문 내용에는 일생을 검약으로 살며 높은 벼슬에 오르고 만년에는 학문도야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조선중기 거유(巨儒)의 일생이 압축돼 있다. 특히 ‘어찌 내세를 알겠는가(寧知來世), 지금 세상도 알지 못하거늘(不獲今兮)’이란 퇴계의 의중은 유교의 종교성 여부를 가름하는 대표적 문장으로 내세에 치중하는 일부 종교에 경종이 되고도 있다.

그 유명한 명문 비석도 보고 퇴계는 명당 유택에 안식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벽계 조수창 교수(동국대 사회교육원)와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있는 그의 묘를 찾았다. 동행한 벽계풍수학회 김기선(총무) 김영석 전영식 회원 등도 퇴계 종가와 도산서원을 함께 살펴보는 현장 산(山) 공부에 기대가 크다.

“안산은 다섯 마리 용이 여의주를 갖고 희롱하는 오룡쟁주(五龍爭珠)형이네요. 물길은 우수도좌(右水倒左·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기울어 흐름)하며 수구가 왕양(旺陽)으로 빠집니다. 포태법으로 욕(欲) 방향이니 더없이 좋은 거죠. 놀라운 건 퇴계 선생의 광중(시신을 매장한 자리)이 오룡이 갖고자 하는 여의주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벽계가 묘역에 접근하면서 미리 안산 물형을 파악하고 나서 하는 설명이다.

당판에서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 안 보이던 물 건너 안산의 오룡국세가 묘 뒤 용맥을 타고 오르니 극명하게 드러난다. 입수룡맥을 재고 내려온 김기선 총무가 임자(북→서로 7.5도) 쌍산룡에 자(정북)입수(入首) 자좌오향(정남향)임을 확인해 준다.

“입수룡과 좌향이 거의 직룡(直龍)으로 내려왔습니다. 상단부에서 토룡(土龍)으로 넓게 퍼졌다가 혈처에 가까워서는 수체(水體)로 변해 기를 모아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봉분 옆의 태극훈(太極暈)을 보세요.”

◇토형체 산 아래의 퇴계 종가. 양장수가 휘감아 도는 명당 길지다.

벽계와 오랜만에 확인하는 당판의 태극훈이다. 면밀히 살피니 1∼2㎝ 높낮이로 몇 겹의 둥근 원이 맴돌고 있다. 이 태극훈의 중앙에 서서 사신사와 물형을 내다보면 따져 볼 것도 없이 명당 조건에 어긋남 없다. 다만 봉분이 태극훈 중앙에서 좌측(묘 전면에서 보았을 경우)으로 50∼60㎝ 정도 빗겨나 있다면서 아쉬워한다.

‘동방의 주자(朱子)’로 불리며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퇴계는 좌찬성 식(埴)의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모 춘천 박씨는 후실이었으나 자애로운 성품의 현모양처여서 아들을 곧고 바르게 양육했다. 20세 때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해쳐 일생 동안 병치레하며 사는 다병체질이 되었다. 34세 과거급제 이후 단양·풍기군수, 공조·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70여 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된 것이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사적 제170호). 퇴계가 벼슬길을 마다하고 손수 집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한 서당이다. 지금은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 위치하고 있다. 선조 8년(1575) 당대 명필 한석봉의 친필로 쓴 사액현판이 아직도 건재하다. 퇴계가 죽은 지 4년 만에 서원으로 지어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은 것이다.

“양기풍수는 여러 채의 건물 가운데 중심 건물을 봐야 하는데 여기서는 전교당(보물 제210호)입니다. 사찰의 대웅전과 같은 곳이지요. 청량산 소조하(小祖下) 쌍산룡 임자(북→서로 7.5도) 임(북→서로 15도)입수 계좌(북→동으로 15도) 정향(남→서로 15도)이니 동사택이네요. 계곡이 좁고 경사져 피할 수 없었겠지만 대문 위치가 좌향과 같아서 직사설기(直射泄氣)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왼쪽 간방(동→북으로 45도)의 좌청룡 어깨에 해당하는 산록이 푹 꺼져 있어 팔요풍(八曜風·살기를 띤 바람)이 마음에 걸리나 동서의 병풍 같은 산이 안온하다. 1969∼70년 정부의 고적 보존 정책에 따라 성역화 작업이 이뤄져 면모가 일신됐다.

도산서원을 포물선으로 끼고 돌면 한적한 산골에 퇴계 종가가 있다. 퇴계 묘와 멀지 않은 곳이다. 배산(背山)으로 깔린 가옥의 널찍한 토형체 산이 대궐의 지붕을 닮은 반월형이다. 이 토룡(土龍)맥이 금형(金形)으로 내려와 경좌(서→남으로 15도) 갑향(동→북으로 15도)으로 집터에 와 우뚝 섰다.

“토생금으로 상생하여 생기가 솟는 곳입니다. 뜰 앞의 물이 Y자로 합수되며 화형수(火形水)가 되니 화생토까지 겹쳐 나무랄 데 없는 양택 길지네요. 이 물이 합수돼 퇴계 선생 묘 앞에서 양장수(羊腸水·양의 내장처럼 몇 겹으로 굽이치는 물길)로 감아 도니 상호 보완까지 겸하는 국세입니다.”

빗발이 굵어지더니 계곡물이 급격히 불어난다. 퇴계는 이런 농촌의 고향을 못 잊고 깊은 산중에 초막을 지어 경세가 제자들을 양성해 냈던 것이다. 퇴계는 한국에서만의 스승이 아니었다.

◇도산서원 앞의 안동호. 퇴계는 건너편 안산을 바라보며 안빈낙도했다고 한다.

퇴계 학문은 당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의 건설자이자 실천자로 존숭받았다. 또한 개화기 중국 지도자들의 신념 구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 유학(儒學)의 기몬학파와 구마모토학파 형성에도 사상 근간의 주춧돌이 되어 신명(神明)으로 경배되고 있다.

호남의 대유 고봉 기대승(1527∼1572)과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변은 학문논쟁의 최고봉으로 현재까지도 학계의 연구대상이다. 퇴계는 ‘사단은 이(理)가 발하매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매 이가 타는 것이어서 이기가 호발(互發)한다’고 보았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취했고 가치적인 면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하는 주리적(主理的) 입장이었다.

1970년 서울에서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된 이래 경북대·단국대와 대만 국립사범대, 독일 함부르크대 등 국내외 대학에 부설연구소가 개설돼 있다. 미국의 뉴욕, 워싱턴, 하와이 등에도 퇴계학연구소가 조직돼 있으며 1976년 이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독일 등에서 매년 국제학술회의가 열리고 있다.

퇴계 학풍을 따른 역사적 인물로는 유성룡 김성일 기대승 이산해 등 260명에 달했고 영남학파와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철학파를 형성하였으니 한국유학계의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퇴계의 학문은 대기만성으로 50세가 넘어서야 완숙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국정을 농단한 문정왕후 아들로 왕위에 오른 제13대 명종은 퇴계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으나 응하지 않자 그의 공부하는 모습을 병풍에 그리게 하여 조석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정상에 있다고 누구나 존경 받는 것은 아니었다. 퇴계는 문묘(공자 사당)와 선조 묘정(廟廷)에 배향되었고 전국 40여 곳의 서원에 주사(主祀)되고 있다.

사람의 일생-.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길인가.

시인·온세종교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