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역사탐방

제223회 3월 답사안내

동봉 2009. 3. 27. 15:36

제223회 3월 답사안내

▣ 답사지역 : 구로구 일대 문화유적 답사

▣ 일 시 : 2009년 3월 28일(토)

▣ 시 각 : 오전 10:00

▣ 모임장소 : 지하철 7호선 천왕역 ①번출구

▣ 참 가 비 : 10,000원

♧ 연락처 : ☎ 762-0155 / Fax 762-0118

▣ 답사코스

▶ 류순정 · 류홍(진주류씨) 부자 묘역

▶ 정선옹주 묘역(권협신도비, 권대임신도비)

▶ 전의이씨 묘역, 관음사

▶ 평강성서 유물박물관

* 답사코스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류순정(柳順汀)․류홍(柳泓) 부자(父子) 묘역(墓域)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산43-32의 총 면적 26,531㎡에 이르는 야산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 3대 공신 중의 한 명인 류순정(柳順汀)과 안동권씨(安東權氏) 부부 묘역, 그 아들 류홍(柳泓)묘역, 그리고 그 후손 5대(류사필·류준·류중광·류돈·류식)의 묘 등 총 7대에 걸친 분묘 8기가 자리하고 있다.


경인로 동부제강 앞 사거리에서 7호선 천왕역 방면으로 약 200m 가량 들어가서 오류2동 금강수목원아파트와 골프장사이의 큰길을 따라 150m쯤 걸어 올라가다 빌라 사이 골목으로 가다보면 동보아파트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류순정․류홍 부자묘역을 만나게 된다. 묘역의 가장 우측능선 상단에는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 류순정(柳順汀)의 묘가 있고, 그 아랫단에 배위(配位)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가 있다. 좌향은 남향이고 묘역의 입구에는 유순정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류순정의 묘역에서 서남쪽으로 약 80여m 떨어진 오류동 산43-31 에는 류순정의 아들로서 역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진산군(晉山君) 류홍(柳泓)의 묘가 가장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류홍 묘의 동쪽 아래로는 다른 곳에서 이장된 그 후손묘 5기가 자리하고 있다. 류홍의 묘로부터 아래에 온양군수(溫陽郡守) 사필(師弼), 군자정(君資正) 준(浚), 진성군(晉城君) 돈(焞), 감찰(監察) 중광(重光). 진흥군(晉興君) 식(寔)의 묘가 있다. 그리고 이묘의 중앙에는 류홍 신도비(神道碑)와 류사필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다. 좌향은 동향 및 동북향 이다.
이들의 가계를 살펴보면 조부가 자해(子偕) 부가 양(壤)인 순정(順汀)이 가장 선조이다. 그리고 순정의 아들이 홍(泓), 홍의 아들이 사필(師弼), 사필의 아들이 준(浚), 준의 아들이 중광(重光)이다. 그리고 중광의 아들이 돈(焞), 돈의 아들이 시경(時慶)이며 시경의 아들이 식(寔)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기(京畿)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에 속해 있었는데, 1896년(고종 33년) 경기도 부평군 수탄면(水呑面)으로 바뀌고, 1914년 다시 경기도 부천군(富川郡)으로 변경되었다가 1963년 서울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었고, 1980년 다시 신설된 구로구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이 묘역은 반정공신으로서 영의정의 자리에 있던 류순정이 1512년(중종 7년) 53세에 졸(卒)하게 되자 중종이 박원종 졸시(卒時)의 예에 따라 철조삼일(輟朝三日)하고 장생전(長生殿)의 관곽(棺槨)을 내어줌과 동시에 현재의 구로구 오류동(梧柳洞)과 온수동(溫水洞) 일대 및 경기도 부천시 여월동(如月洞), 작동(鵲洞)에 이르는 약 300여 만평의 땅을 사여(賜與)하면서 조성되었다. 그러나 500년이 다 돼가는 지금은 후대로 오면서 매각 등으로 묘역이 있는 임야 8000여평으로 줄어들었으며, 고층아파트와 빌라가 묘역 주변에 들어서 있는 상황이다.
류순정·류홍 부자 묘역은 서울지역에서 유일한 부자(父子) 2대 공신묘역으로 조성시기도 16c 전반으로 상당히 이른 시기에 속한다. 특히 중종반정의 1등공신인 류순정의 묘역은 조성 당시 왕족 에게만 내려주던 장흥고(長興庫)의 관곽(棺槨)을 사여할 정도로 국가적 관심속에서 조성되어 공신묘역의 조성방식을 알게 하는 중요자료이다.
묘역 내 석물들 또한 매우 정교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수법과 강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어 이 시대 조각사 연구에 의미 있는 자료가 되며, 문인석 등에 보이는 의복 등은 복식사 연구에 중요자료가 된다. 또한 두 공신들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해 놓은 신도비의 비문은 실록 등 문헌기록을 보완하는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당대에 해서체로 두각을 나타낸 명필 송인(宋寅)의 필체를 느낄 수 있는 서예사적 중요자료이기도 하다.
류순정(안동권씨 묘역 포함)과 류홍의 묘역 및 묘역에 부착된 석물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상을 2004. 8. 20자 시 기념물 제 22호로 지정했으며 문화재관리단체는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가 관리자로 지정 되어있다.
현재 오류동 등 구로지역 일대에 사는 후손들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매년 음력10월 5일 오전11시에 이곳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만간 명성에 걸 맞는 사당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진주류씨 문성공파 종친회 류구현 회장(73)은 밝혔다.


▶ 류순정(柳順汀) 묘

류순정[(1459(세조 5)~1512(중종 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지옹(智翁). 아버지는 목사 양(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7년(성종 18)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전적으로 등용되었다.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예에 뛰어나 훈련원정으로 있을 때 전라도 지방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고, 1491년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의 참모로서 야인(野人) 정벌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평안도평사를 거쳐 연산군 초에는 헌납·교리·집의 등을 지냈다. 1503년(연산군 9)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다. 1506년 당시 이조판서로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출했다. 반정에 성공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연산군이 폐지한 경연의 부활에 힘썼고, 1507년에는 이과(李顆)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었다. 1508년 평안도 인산·강계 지방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제포(薺浦)의 왜인들이 난리를 일으키자 도체찰사로 사건을 처리했으며, 이어 도원수로 출정하여 삼포왜란을 평정했다. 1512년 영의정에 오른 뒤 죽었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안(武安)이었으나, 문정(文定)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류순정(柳順汀)의 묘(墓)는 단분 단독분이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남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동자석 망주석을 갖췄다. 묘표는 이수형 1면비 이다. 이수 전면에는 이무기 한마리가 고개를 틀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했고, 주변에 운문을 장식 했다. 후면에는 가운데 반달의 형상을 나타내고 주변에 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推誠保社" "佑世定難功臣大匡補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 "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 "君贈諡柳公之墓" 라 새겼다. 그리고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 했다. 규모는 이수 61*24*48cm, 비신 47.5*16*81cm, 비좌 77*47*19cm이다
동자석은 머리에 쌍계를 하고, 어께 뒤쪽에는 구름모양의 덧깃인 운견(雲肩)을 착용하였다. 의복은 3벌을 가장 긴 것부터 안쪽에서 착용 하였으며, 가장 겉에 입은 짧은 옷은 뒷자락에 화문을 조각 하였다. 허리에는 대(帶)를 두르고 앞에서 매듭을 하여 늘어뜨린 것으로 보인다. 양쪽 팔 아래에는 피건(披巾)을 장식적으로 표현 하였다. 규모는 총고 123cm이다.
망주석은 8각의 기대석을 갖췄으며, 운각의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다. 주신에는 상하 구분 없는 세호를 양각 했는데, 가운데에 금줄을 걸기 위한 용도였던 것으로 보이는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규모는 총고 187cm이다.

류순정묘 아랫단에는 순정의 배위(配位)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墓)가 부전(祔前)하여 있다.

묘는 단분 단독분이고. 봉분에 호석을 둘렀다. 묘표 혼유석 상석 문인석 장명등 등을 갖췄다. 묘표는 운수형 1변비 운수 전면에 달로 보이는 반원의 형태를 표현 했으며, 그 주변 및 사방에 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贈貞敬夫人安東權氏之墓”라 새겼다. 규모는 운수 56*23*43cm, 비신 46*13.5*82cm, 비좌 79*50.5*25cm이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했다. 복두를 매는 끈을 얼굴 옆선으로 내려 턱 아래에서 양 옆으로 나눴다. 복두 뒤에는 각(脚)을 양옆으로 올린 전각(殿脚)을 표현했으며, 허리 뒤에는 야자대(也字帶)를 조각 하였다. 규모는 총고 197cm이다.
장명등은 사모지붕 옥개석을 갖췄고 화사석 사면에 화창을 내었다. 대석 각면에 안상을 새겼으며 상대석에는 양련을 하대석에는 복련을 장식했다. 규모는 총고 192.5cm이다.

▶ 류순정(柳順汀) 신도비(神道碑)

류순정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했고, 전면에 안상 3구획,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비제는 “有明朝鮮國秉忠奮義決榮翊運靖國功臣大匡補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君贈諡文定柳公神道碑銘 幷序”이다.
비문은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이 찬(撰)하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서(書)했다.
규모는 옥개석 122*67*56cm, 비신 68.5*21*155.5cm, 비좌 121*72*41cm이다.

▶ 류홍(柳泓) 묘

류홍의 생몰년은 1483년(성종 14)~1551년(명종6)이다. 자(字)는 자연(子淵)이고, 부(父)는 순정(順汀), 조부(祖父)는 양(壤)이다. 중종반정 당시 이를 주도한 아버지를 따라 활동,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 되고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정랑 공조정랑 등을 거쳐 1511년(중종6) 무과에 급제, 사복시부정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44년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직제강(禁直諸將)의 한사람으로서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1547년 훈련원 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는 단분이고 근래에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동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등을 갖췄다. 묘표는 이수형, 1면비이다. 이수 전면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발로 여의주를 잡고서 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방에 운문을 장식했다.
비신 전면에는 “奮義靖國功臣嘉義大夫同” “知中樞府事兼五衛都摠府” “副摠官訓練院都正晉山君” “諡* * 柳公之墓”라 새겼는데, ‘諡’ 다음의 두 칸은 글자가 마모된 것이 아니고, 아마도 시호(諡號)를 받은 뒤에 새기기 위하여 띄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규모는 이수 54*22*38cm, 비신 46.5*16*84cm, 비좌 78.5*48.5*15cm이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했다. 복두를 매는 끈을 얼굴 옆선으로 내려 턱 아래에서 양옆으로 나눴다. 복두 뒤에는 각(脚)을 양옆으로 올렸고(殿脚), 허리 뒤에는 양자대(也字帶)를 하였다. 규모는 총고 204cm이다.
망주석은 좌측이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하였고, 우측은 주신 일부만 남고 윗부분이 깨어져 나갔다. 규모는 좌측 총고 136cm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췄다. 그리고 화사석 네 면에 화창을 내었는데 한쪽은 사각의 화창을, 한쪽은 초생달 모양의 화창을 낸 특이한 형태이며 규모는 총고 158cm이다.

▶ 류홍(柳泓)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옥개형으로, 진주류씨 묘역에 들어가는 입구 중앙에 류사필(柳師弼) 묘갈(墓碣)과 함께 세워져 있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새겼고, 전후면에는 세 구획의 안상과 그 아래 당초문을, 측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行奮義靖國功臣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晉山君柳公神道碑銘幷書” 이다.
비문은 좌의정(左議政) 강령군(江寧君) 홍섬(洪暹)이 찬(撰)하고,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서(書)했다.
입석연대는 “萬曆元年二月日立” 선조6년(1573년)이며, 규모는 옥개석 103*80
*30.5cm, 비신 64*20*141cm, 비좌 113*68.5*54cm이다.


<참고> 중종반정(中宗反正)이란?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등이 조선왕조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으로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는 그동안의 농업진흥책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향시(鄕市), 즉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건설되었다. 또한 그동안 소규모적·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무역(公貿易) 중심의 대외무역이 점차 국내 수요의 증가와 해외시장의 확대로 인해 활발해지면서 사무역(私貿易)이 크게 늘어났고, 드디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국내의 전국적인 유통망 건설과 중국과의 사무역 증가는 국내 은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중국과의 무역 결제수단은 금·은·철 등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은은 당시 중국에서 지정은제(地丁銀制)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사상(私商)들에 의해 은광 개발이 서둘러졌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농민층이 해체되어 일부는 소상인으로 전환하여 농촌을 떠났고, 많은 수가 농토를 상실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적란(賊亂)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의 관료로서 특권적 성향이 강한 훈신·척신계(勳臣戚臣系)와 신진의 관료군인 사림계(士林系)로 나뉘어 대립했다. 양자 중 훈신·척신계는 왕권 또는 왕실과의 특별한 관계를 통하여 지위를 보장받은 집단이었다. 이들은 자신과 연관된 부류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공납의 방납권(防納權)을 보장해주면서 일정한 대가를 관례적으로 상납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서남 연해지역에서 지방관에게 사주해서 다수의 지방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간석지를 개발해 얻은 수익을 가지고 무역이나 은광 개발에 투자했다. 이들은 곧 새로운 경제변화 속에서 관권을 매개로 부상(富商)들과 결탁해 부를 늘려갔다. 이에 대해 지방의 재지지주(在地地主) 출신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정치계에 구현하고자 노력했던 신진관료집단인 사림파들의 공격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들은 훈신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비호하는 국왕과 그의 측근인 궁금(宮禁) 세력들에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국왕인 연산군은 훈신·척신계와 궁금 세력의 강력한 후원 아래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들을 제거했다. 그후 연산군의 비호를 받은 궁금 세력들은 훈신·척신계와 대결하여 정치 및 경제계에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기도했다. 그 결과 연산군과 궁금 세력은 1504년(연산군 10)에 갑자사화를 일으켜 훈신계열을 철저하게 숙청하고 잔존의 사림파마저 제거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궁금 세력의 지나친 독주는 지배층 내부의 불만을 야기 시켰고, 특히 연산군 자신은 방종한 생활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약점을 이용하여 훈신계열인 박원종·류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모의해 1506년 9월에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무사들을 모아 궁금 세력의 대표자인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시켰다.

◈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墓域)

정선옹주 묘역은 구로구 궁동 산1-66, 22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대왕의 7녀로 정빈(貞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정빈은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의 손녀이자 강호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 사준(士俊)의 딸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며 옹주 또한 공순하고 삼가 조금도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정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하여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일대에서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현재 궁동이라고 하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정선옹주가 시집을 간 안동 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대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이항복(李恒福)은 권율의 사위로 역시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 정선옹주의 남편인 권대임은 안동 권씨라는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에 선무공신의 칭호를 받고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權협)의 손자이며 부인 또한 임금의 딸이라 그의 집은 가히 궁궐 못지않았으며 때문에 궁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묘역에는 정선옹주와 그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하여 여러 기의 안동권씨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궁동의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와룡산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를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 가운데를 다시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었고, 그 끝에 저수지가 있다. 고추처럼 생긴 그 산줄기가 낮은 언덕을 이룬 곳이 궁동의 한 복판이다. 이것이 풍수지리설에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 즉 금계포란형(金鷄包卵型)으로 찬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고추 모양 언덕 끝 부분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있으니, 누가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궁동 명당의 혈이 되는 이 권씨 문중묘는 그 고추 끝 부분의 10m 폭에 약 150m 가량 길게 남북으로 뻗어 내린 언덕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8기의 무덤이 있다.
제일 위의 것이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城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권협의 무덤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석이 작고 비문도 간략하다. 권대임의 아래에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아들 권진(權瑱)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었음이 눈에 띤다. 이는 권대임이 왕의 부마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부자간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임(大任)의 장남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 진(瑱)의 묘 아래에, 진(瑱)의 장남 현감(縣監) 이경(以經)의 묘가, 또 그 아래에 이경(以經)의 장남 군수(郡守) 세태(世泰)의 묘가 있다
묘역 아래 저수지가 있었던 언저리를 비석거리라고 하는데, 남쪽 끝에 권협의 신도비가 있고, 서북쪽 끝에도 새로 세운 비가 있다. 정선옹주 묘역 내에는 신도비 외에도 이 같은 묘비 등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궁동을 중심으로 안동권씨 집성촌이 형성돼, 현재까지 17대손이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고 안동권씨 충정공파 종손인 권중호(59)씨는 설명했다.
지난 2004년에는 KBS ‘진품명품’에서 충정공 권협선생의 전신이 그려진 영정화보 2점에 대한 감정결과 각4억 5천만원씩 모두 9억원의 감정을 받기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초상화 2점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이밖에 수 백년 된 교지와 권협 선생의 반신상이 그려진 영정 등은 종가에서 보관중 이다.

현재 권중호씨를 비롯한 후손들은 잡목과 산악자전거동호인들의 왕래 등으로 400여년된 묘역에 대한 관리와 보존이 날로 쉽지 않고 지방문화재적 가치도 높은 만큼 정선옹주묘역을 지역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 권협(權悏) 묘

권협[權悏, 명종 8년(1553)∼광해군 10년(1618)],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안동, 증조부는 권욱(權旭), 조부는 권진(權振),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권상(權常),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따님 안정 나씨, 배위는 최말(崔沫)의 따님 전주최씨, 손자가 길성군 권대임(權大任)이다.
선조 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시작으로 벼슬을 하였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 29년(1596) 정유재란 때 원병을 청하러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李楨)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그 후 예조참판·호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04년 대사헌에 선무원종공신이 되고, 이듬해 길창군(吉昌君)에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정헌대부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묘는 단분합장이고 좌향은 남향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신도비 등을 갖췄다. 묘표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 이다. 비좌 윗면에 복련, 전면과 측면에는 덩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有明朝鮮 贈議政府 領議政” “行宣武功臣 禮曺判書 吉昌” “君諡忠貞公權悏之墓” “貞敬夫人 全州崔氏 祔左”라 새겼다.
규모는 옥개석 107*73*40cm, 비신 65*30*145cm, 비좌 110*77*41cm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페슬(蔽膝)을 두었는데, 폐슬 아래에는 술장식을 표현 하였다. 허리 뒤의 대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측면에는 패옥을 내렸다. 관모의 측면에는 비녀를 둥글게 양각 했고 뒤로는 관모 둘레를 조절하는 부분을 표현했다. 규모는 총고 193cm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상하를 알 수 없는 꽈배기 모양의 세호를 양각 했다.규모는 총고 179cm이다.

▶ 권협(權悏) 신도비(神道碑)

권협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이다. 비좌는 땅에 묻혀있고 지표상에 위면 만 노출되어 있는데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 했다.
신도비의 전액은 “判書贈領議政權公神道碑”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洪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吉昌府院君行幼忠仗義宣撫功臣崇政大夫禮曺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官吉昌君權公神道碑銘幷書” 이다.
이 비는 현종 14년(1673)에 건립된 권협 신도비명으로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사간원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으며, 중직대부 행사헌부장령○○○이 전액 하였다. 그런데 전서(篆書)의 작자를 새긴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알 수가 없다. 규모는 옥개석 140*78*48cm, 비신 84.5*28*194cm, 비좌 143*91*12cm 이다.

▶ 권대임(權大任) 묘

권대임[權大任, 선조 28년(1595)∼인조 23년(1645)], 자는 홍보(弘輔),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아버지는 길흥군 권신중(權信中), 어머니는 광평대군 이여(李璵, 세종의 아들)의 7세손 이정필(李廷弼)의 따님 증정경부인 전주이씨 이다.
선조의 7녀 정선옹주와 결혼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돈령부봉사 권진(權瑱)을 낳았다.
서예가(書藝家)로 선조로부터 여러 번 상을 받았고, 통헌대부에 이르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봉헌대부가 되었다. 인조 13년(1635) 아버지 상이 끝나자 선무공신(권협)의 적손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여 숭덕대부로 승진되고 도총관이 되었다. 인조 17년(1639) 심양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재화를 모두 털어서 미 송환 포로를 속환시켰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하여 정1품이 되었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남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신도비 등을 갖췄다. 묘표는 원수형 2면비 이다. 비좌 윗면에 복련 전측면에 덩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有明朝鮮 吉城君” “權大任之墓” “貞善翁主 祔左” 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7*23.5*129.5cm, 비좌 96*60*37cm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폐슬(蔽膝)을 표현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관모의 武부분 앞면에는 운문을 조각했다. 규모는 총고 194cm 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좌상우하의 세호를 양각했다, 규모는 총고 180cm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췄고,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었다. 화사석에는 4면에 화창을 내었다 총고는 186.5cm이다.

▶ 권대임(權大任) 신도비(神道碑)

권대임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 이다. 옥개석 및 비좌에 별다른 문양을 장식하지 앉았다. 신도비의 전액은 “儀賓吉城君墓” “權公神道碑銘” 비제는 “有明朝鮮國贈緌錄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諡權公神道碑銘幷書”이다.

비는 숙종 40년(1714)에 건립된 권대임 신도비명으로 우의정 허목(許穆)이 비문을 짓고, 좌부승지 이징귀(李徵龜)가 글씨를 썼으며, 대사헌 권규(權珪)가 전액을 하였다. 규모는 옥개석 146*87*56cm, 비신 89.5*30.5*198cm, 비좌 151*89*42cm이다.

▶ 권신중(權信中) 묘

권신중[權信中, 선조 8년(1575)~인조 11년(1633)]은 자는 군집(君執),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어머니는 최말(崔沫)의 따님 전주최씨, 배위는 전주이씨, 아들은 길성위 권대임(權大任)이다.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한성부판관 등을 지내다가 풍덕군수(豊德郡守)로 재임 시 제릉(齊陵)을 수리한 공으로 통종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좌향은 남향이다. 묘표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등을 갖췄다. 묘표는 봉분 앞에 있으며 원수형 2면비이다.
비신 전면에 “有明朝鮮贈議政府右議” “政吉興君行通政大夫豊” “德郡守權信中之墓”
“贈貞敬夫人 全洲李氏 祔左”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6*26*125cm, 비좌 94*59*27cm이다.
묘갈은 봉분 우측앞에 있으며 팔작지붕 옥개형 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전면과 측면에는 덩굴문을 장식 했다. 묘갈의 전액은 “贈右議政吉興君權公墓碣”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義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吉興君行通政大夫豊德君守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權公墓碣銘이다.
비문은 우의정 허목(許穆)이 찬(撰) 및 전(篆)하고 개성부 유수 윤심(尹深)이 서(書)했다. 규모는 옥개석 113*78*51cm, 비신 64.5*31*140cm, 비좌 112*78*37cm 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페슬(蔽膝)을 표현 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규모는 총고 190cm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상하 구분 없는 꽈배기 모양의 세호를 양각 했다. 규모는 총고 184cm이다.

▶ 권진(權瑱) 묘

권진(權瑱)의 자는자옥(子玉)이며 권대임과 선조의 7녀 정선옹주가 결혼하여 낳은 맞아들이다. 1694년에 건립된 권진묘비(權瑱墓碑)는 홍만조(洪萬朝)가 비문을 지었으며, 박경후(朴慶後)가 글씨를 썼다.

묘비 : 有明朝鮮 朝奉大夫 行敦寧府奉事 權瑨 之墓, 令人 南陽洪氏 祔左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

-평강성서유물박물관-

편집부

● 세계적으로 희귀한 소장 유물들
지하철 1호선 오류역에 내려 시장골목을 지나 언덕바지를 오르면, 주택가 가운데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 평범한 건물이 서있다. 그곳에 들어간 이들은 잠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분주하고 복잡스런 삶의 풍경에서 벗어나 먼 고대(古代)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평강 성서유물박물관이 그곳이다.
1998년 11월 7일 개관한 성서유물박물관은 독특한 설립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던 박윤식 목사의 신앙과 목회 철학, 복음에 대한 열정에 감명을 받은 케네스 바인 박사가 평생 소장해 오던 유물을 박 목사에게 기증함으로써 박물관이 설립된 것이다. 성서고고학계의 권위자인 케네스 바인 박사가 기증한 유물은 그 분야의 유물로는 한국뿐만이 아닌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해 소장 가치가 큰 유물이라고 한다.
두 층으로 구성된 전시실을 들어가면 내부가 매우 짜임새있는 구성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성민 학예사는 “이 박물관의 설계는 이스라엘 성지 박물관을 모델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로 궁금증을 풀어준다. 구성의 짜임새뿐만이 아니라 유물의 해설마다 영문과 일문 번역글이 함께 있는 것으로 외국 관람객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다만 해설에 어려운 한문용어가 섞여 있어 명확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고 한눈에 읽히기엔 좀 길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평강 성서유물박물관 전시실 내부 ▶


우씨는 “기증자와 설립자의 기독교 정신의 취지에 맞게 기독교 역사의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가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제 1전시실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질그릇같은 존재로서의 인간·하나님의 등불로서의 인간의 영혼·인(印)같이 품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소주제를 담고 있다.
제 2전시실은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꿈을 다룬 ‘인간의 타락’ 장이다. 2층에 2주제와 함께 있는 제 3전시실은 ‘인간 회복과 영생의 길’이라는 장으로 기독교의 역사의 마지막 주제를 보여준다.
명확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행해진 위의 해석은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 미이라와 각종 부장품에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타락의 실상’이라고 해석한 것에 비기독교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씨는 “박물관 명칭에 들어있는 ‘성서 유물’이라는 구절에서도 강하게 드러내는 박물관 주제의 지향성이 세계적인 유물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원인일 것”이라고 동의한다.

● 종교를 초월한 문화적 체험
하지만 언제나 유물에 관한 해석은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즉 박물관이 제시하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박물관에서 유물을 열람하는 재미는 줄어들지 않는다. 이 박물관은 구약과 신약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유물을 폭넓게 전시하고 있다.
◀ 이집트 두상과 순례자의 물병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거쳐 발달해온 토기의 변천사에는 가나안지방의 양뿔모양 토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출토된 향유병, 키프로스와 페니키아지방에서 만들어진 값비싼 토기 등이 등장한다. 청동기시대의 엉성한 모양의 등잔부터 1세기경 만들어진 쌍심지등잔, 로마·비잔틴·아랍 시대에 이르는 등잔의 변천사를 보는 일도 흥미롭다. 다큐멘타리에서나 볼 수 있던 이집트의 신상과 아기 미이라와 매(買鳥) 미이라 등도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신라시대 고분에서 나온 것과 매우 닮은 짐승에 올라탄 사람 모양의 진흙인형을 보며 인간의 보편적 경험에 대한 경이를 느끼는 일도 가능하다. 옛 언어로 쓰여진 두루마리 성경 또한 서양 언어의 기원과 발전에 흥미를 지닌 이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이다. 이 모든 것은 굳이 창조와 타락, 구원에 이르는 기독교적 주제에 동의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작은 예일 뿐이다.


▲ 미이라 얼굴 덮개와 가슴장식과 신약시대의 쌍심지등잔

이러한 좋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박물관이 그리 많이 홍보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은 이곳만이 아닌 모든 사립박물관이 처해 있는 어려운 현실의 단면이기도 하다. 이곳 성서유물박물관에서는 지난 12월 1일에서 14일까지 한국사립박물관협회에서 주최한 문화상품전에 약간의 모조품(Imitation)을 내놓는 것으로 참여했다. 인사동 동덕아트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상품전에는 수십 군데의 사립박물관이 참여했다고 한다. 차미경 학예사는 “정부에서 공공박물관이 극히 제한된 곳에 적은 수로만 있는 한국의 실정에서 박물관의 저변 향상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사립박물관에 지원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차씨의 지적처럼 한국의 박물관, 특히 사립박물관의 현실은 재정과 시설 면에서 매우 열악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정부는 박물관을 규제나 관리의 대상으로 여길 뿐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획기적인 지원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 정보화 사회는 미래를 향한 시선만으로 이룩되지 않는다. 박물관은 인류의 역사라는 거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박물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정보화 사회의 우선적 과제이다.■

성서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나 일반인들이 성서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서 입체적으로 이해하며 기독교적 관심이 아닌 역사적인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며 교육 창출의 역할이 기대되는 평강성서유물 박물관은 국내 유일한 고대 이집트 박물관이다.

평강교회 교육관에 설치된 성서유물 박물관은 저명한 미국의 고고학자 케네스바인 (전 캘리포니아 로마린다대 총장)박사가 평생 동안 발굴, 수집한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돼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연일 계속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규모는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연건평 3백 60여 평이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하나님의 창조). 제2전시실(인간의 타락/ 인간의 회복과 영생의 길), 기획전시실이 있다.


- 위 치 : 서울 구로구 오류2동 150-15호

- 관람시간 : 평 일 : 10:00 ~ 17:00, 주 일 : 13:00 ~ 17:00

- 휴 관 일 : 정기휴관일 - 매주 월요일, 비정기휴관 - 하계 휴가기간

- 교통안내 : 지하철 1호선(인천행) 오류역 하차, 2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