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회 3월 답사안내
제223회 3월 답사안내
▣ 답사지역 : 구로구 일대 문화유적 답사
▣ 일 시 : 2009년 3월 28일(토)
▣ 시 각 : 오전 10:00
▣ 모임장소 : 지하철 7호선 천왕역 ①번출구
▣ 참 가 비 : 10,000원
♧ 연락처 : ☎ 762-0155 / Fax 762-0118
▣ 답사코스
▶ 류순정 · 류홍(진주류씨) 부자 묘역
▶ 정선옹주 묘역(권협신도비, 권대임신도비)
▶ 전의이씨 묘역, 관음사
▶ 평강성서 유물박물관
* 답사코스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류순정(柳順汀)․류홍(柳泓) 부자(父子) 묘역(墓域) 구로구 오류동 산43-31, 산43-32의 총 면적 26,531㎡에 이르는 야산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 3대 공신 중의 한 명인 류순정(柳順汀)과 안동권씨(安東權氏) 부부 묘역, 그 아들 류홍(柳泓)묘역, 그리고 그 후손 5대(류사필·류준·류중광·류돈·류식)의 묘 등 총 7대에 걸친 분묘 8기가 자리하고 있다.
류순정[(1459(세조 5)~1512(중종 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지옹(智翁). 아버지는 목사 양(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7년(성종 18)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전적으로 등용되었다.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예에 뛰어나 훈련원정으로 있을 때 전라도 지방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고, 1491년에는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 허종(許琮)의 참모로서 야인(野人) 정벌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평안도평사를 거쳐 연산군 초에는 헌납·교리·집의 등을 지냈다. 1503년(연산군 9)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음해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이조판서를 지냈다. 1506년 당시 이조판서로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 지중추부사 박원종(朴元宗) 등과 함께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출했다. 반정에 성공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으로 청천부원군(菁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연산군이 폐지한 경연의 부활에 힘썼고, 1507년에는 이과(李顆)의 역모를 다스린 공으로 정난공신(定難功臣) 1등이 되었다. 1508년 평안도 인산·강계 지방에 둔전(屯田)을 설치했으며,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제포(薺浦)의 왜인들이 난리를 일으키자 도체찰사로 사건을 처리했으며, 이어 도원수로 출정하여 삼포왜란을 평정했다. 1512년 영의정에 오른 뒤 죽었다. 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안(武安)이었으나, 문정(文定)으로 개시(改諡)되었다. 류순정묘 아랫단에는 순정의 배위(配位)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墓)가 부전(祔前)하여 있다. 묘는 단분 단독분이고. 봉분에 호석을 둘렀다. 묘표 혼유석 상석 문인석 장명등 등을 갖췄다. 묘표는 운수형 1변비 운수 전면에 달로 보이는 반원의 형태를 표현 했으며, 그 주변 및 사방에 운문을 장식 했다. ▶ 류순정(柳順汀) 신도비(神道碑) 류순정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했고, 전면에 안상 3구획, 측면에 안상 2구획을 새겼다. 비제는 “有明朝鮮國秉忠奮義決榮翊運靖國功臣大匡補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菁川府院君贈諡文定柳公神道碑銘 幷序”이다. ▶ 류홍(柳泓) 묘 류홍의 생몰년은 1483년(성종 14)~1551년(명종6)이다. 자(字)는 자연(子淵)이고, 부(父)는 순정(順汀), 조부(祖父)는 양(壤)이다. 중종반정 당시 이를 주도한 아버지를 따라 활동,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 되고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정랑 공조정랑 등을 거쳐 1511년(중종6) 무과에 급제, 사복시부정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44년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직제강(禁直諸將)의 한사람으로서 위사원종공신(衛社原從功臣)에 책록 되었다. 1547년 훈련원 도정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는 단분이고 근래에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동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등을 갖췄다. 묘표는 이수형, 1면비이다. 이수 전면에는 이무기 한 마리가 발로 여의주를 잡고서 이를 바라보고 있으며, 사방에 운문을 장식했다. ▶ 류홍(柳泓) 신도비(神道碑) 류홍 신도비는 옥개형으로, 진주류씨 묘역에 들어가는 입구 중앙에 류사필(柳師弼) 묘갈(墓碣)과 함께 세워져 있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새겼고, 전후면에는 세 구획의 안상과 그 아래 당초문을, 측면에는 두 구획의 안상과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1506년(연산군 12) 박원종(朴元宗) 등이 조선왕조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으로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 때는 그동안의 농업진흥책에 힘입어 산업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15세기 말엽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향시(鄕市), 즉 지방 장시(場市)가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연작상경(連作常耕)의 집약적 농업기술의 발달로 구매력이 증대되어 마침내 전국적인 유통 경제망이 건설되었다. 또한 그동안 소규모적·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무역(公貿易) 중심의 대외무역이 점차 국내 수요의 증가와 해외시장의 확대로 인해 활발해지면서 사무역(私貿易)이 크게 늘어났고, 드디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국내의 전국적인 유통망 건설과 중국과의 사무역 증가는 국내 은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중국과의 무역 결제수단은 금·은·철 등이었으나, 그중에서도 은은 당시 중국에서 지정은제(地丁銀制)가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사상(私商)들에 의해 은광 개발이 서둘러졌다. 이로 인해 농촌에서는 농민층이 해체되어 일부는 소상인으로 전환하여 농촌을 떠났고, 많은 수가 농토를 상실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적란(賊亂)이 되었다. |
◈ 정선옹주(貞善翁主) 묘역(墓域)
정선옹주 묘역은 구로구 궁동 산1-66, 22 일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선옹주(貞善翁主)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대왕의 7녀로 정빈(貞嬪) 민씨(閔氏)의 소생이다. 정빈은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의 손녀이자 강호도호부사(江華都護府使) 사준(士俊)의 딸이다. 정빈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며 옹주 또한 공순하고 삼가 조금도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정빈의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선옹주(貞善翁主)가 안동권씨 권대임(權大任)과 결혼하여 지금의 구로구 궁동 67번지일대에서 궁궐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하여 현재 궁동이라고 하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 되었다 한다. 정선옹주가 시집을 간 안동 권씨 집안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과 그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의 대공을 세운 도원수 권율(權慄)이 있다. 또 영의정을 지냈던 이항복(李恒福)은 권율의 사위로 역시 이 집안과 관련이 있다. 정선옹주의 남편인 권대임은 안동 권씨라는 집안의 배경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 또한 잘 써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여기에 선무공신의 칭호를 받고 예조판서를 지낸 권협(權협)의 손자이며 부인 또한 임금의 딸이라 그의 집은 가히 궁궐 못지않았으며 때문에 궁동이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이다.
묘역에는 정선옹주와 그 남편 권대임의 묘를 비롯하여 여러 기의 안동권씨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흔히 풍수가에 의해 명당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궁동의 북쪽 끝 와룡산을 주산으로 하여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가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와룡산 서쪽으로는 궁동 서부를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우백호(右白虎)를 이룬다. 주산에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한 가운데를 다시 짧은 산줄기가 남쪽으로 뻗었고, 그 끝에 저수지가 있다. 고추처럼 생긴 그 산줄기가 낮은 언덕을 이룬 곳이 궁동의 한 복판이다. 이것이 풍수지리설에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 즉 금계포란형(金鷄包卵型)으로 찬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고추 모양 언덕 끝 부분에 안동권씨 문중묘가 있으니, 누가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이다.
궁동 명당의 혈이 되는 이 권씨 문중묘는 그 고추 끝 부분의 10m 폭에 약 150m 가량 길게 남북으로 뻗어 내린 언덕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두 8기의 무덤이 있다.
제일 위의 것이 권대임의 할아버지인 길창군(吉昌君) 충정공(忠貞公) 권협과 정경부인 전주 최씨(全州崔氏)의 무덤이다. 그 아래에 부마도위(駙馬都尉) 길성군(吉城君) 권대임과 정선옹주의 무덤이 있는데, 권협의 무덤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석이 작고 비문도 간략하다. 권대임의 아래에 아버지인 길흥군(吉興君) 권신중과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이 있다. 그 아래는 권대임의 아들 권진(權瑱)과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권대임과 아버지 권신중의 순서가 바뀌었음이 눈에 띤다. 이는 권대임이 왕의 부마라는 특례를 인정하여 부자간의 순서를 바꾸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임(大任)의 장남 돈령부봉사(敦寧府奉事) 진(瑱)의 묘 아래에, 진(瑱)의 장남 현감(縣監) 이경(以經)의 묘가, 또 그 아래에 이경(以經)의 장남 군수(郡守) 세태(世泰)의 묘가 있다
묘역 아래 저수지가 있었던 언저리를 비석거리라고 하는데, 남쪽 끝에 권협의 신도비가 있고, 서북쪽 끝에도 새로 세운 비가 있다. 정선옹주 묘역 내에는 신도비 외에도 이 같은 묘비 등이 다수 남아 있어 당시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궁동을 중심으로 안동권씨 집성촌이 형성돼, 현재까지 17대손이 살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둘째주 일요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고 안동권씨 충정공파 종손인 권중호(59)씨는 설명했다.
지난 2004년에는 KBS ‘진품명품’에서 충정공 권협선생의 전신이 그려진 영정화보 2점에 대한 감정결과 각4억 5천만원씩 모두 9억원의 감정을 받기도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 초상화 2점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며, 이밖에 수 백년 된 교지와 권협 선생의 반신상이 그려진 영정 등은 종가에서 보관중 이다.
현재 권중호씨를 비롯한 후손들은 잡목과 산악자전거동호인들의 왕래 등으로 400여년된 묘역에 대한 관리와 보존이 날로 쉽지 않고 지방문화재적 가치도 높은 만큼 정선옹주묘역을 지역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 권협(權悏) 묘
권협[權悏, 명종 8년(1553)∼광해군 10년(1618)],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안동, 증조부는 권욱(權旭), 조부는 권진(權振),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권상(權常),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따님 안정 나씨, 배위는 최말(崔沫)의 따님 전주최씨, 손자가 길성군 권대임(權大任)이다.
선조 10년(1577)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을 시작으로 벼슬을 하였고,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 29년(1596) 정유재란 때 원병을 청하러 명나라에 갔을 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李楨)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그 후 예조참판·호조참판·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04년 대사헌에 선무원종공신이 되고, 이듬해 길창군(吉昌君)에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정헌대부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다.
묘는 단분합장이고 좌향은 남향이다.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신도비 등을 갖췄다. 묘표는 팔작지붕 옥개형 4면비 이다. 비좌 윗면에 복련, 전면과 측면에는 덩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有明朝鮮 贈議政府 領議政” “行宣武功臣 禮曺判書 吉昌” “君諡忠貞公權悏之墓” “貞敬夫人 全州崔氏 祔左”라 새겼다.
규모는 옥개석 107*73*40cm, 비신 65*30*145cm, 비좌 110*77*41cm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페슬(蔽膝)을 두었는데, 폐슬 아래에는 술장식을 표현 하였다. 허리 뒤의 대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측면에는 패옥을 내렸다. 관모의 측면에는 비녀를 둥글게 양각 했고 뒤로는 관모 둘레를 조절하는 부분을 표현했다. 규모는 총고 193cm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상하를 알 수 없는 꽈배기 모양의 세호를 양각 했다.규모는 총고 179cm이다.
▶ 권협(權悏) 신도비(神道碑)
권협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이다. 비좌는 땅에 묻혀있고 지표상에 위면 만 노출되어 있는데 윗면에는 복련을 장식 했다.
신도비의 전액은 “判書贈領議政權公神道碑”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洪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吉昌府院君行幼忠仗義宣撫功臣崇政大夫禮曺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官吉昌君權公神道碑銘幷書” 이다.
이 비는 현종 14년(1673)에 건립된 권협 신도비명으로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비문을 짓고, 사간원 정언 조위명(趙威明)이 글씨를 썼으며, 중직대부 행사헌부장령○○○이 전액 하였다. 그런데 전서(篆書)의 작자를 새긴 부분은 마모가 심하여 알 수가 없다. 규모는 옥개석 140*78*48cm, 비신 84.5*28*194cm, 비좌 143*91*12cm 이다.
▶ 권대임(權大任) 묘
권대임[權大任, 선조 28년(1595)∼인조 23년(1645)], 자는 홍보(弘輔),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아버지는 길흥군 권신중(權信中), 어머니는 광평대군 이여(李璵, 세종의 아들)의 7세손 이정필(李廷弼)의 따님 증정경부인 전주이씨 이다.
선조의 7녀 정선옹주와 결혼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돈령부봉사 권진(權瑱)을 낳았다.
서예가(書藝家)로 선조로부터 여러 번 상을 받았고, 통헌대부에 이르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였고, 그 공으로 봉헌대부가 되었다. 인조 13년(1635) 아버지 상이 끝나자 선무공신(권협)의 적손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여 숭덕대부로 승진되고 도총관이 되었다. 인조 17년(1639) 심양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재화를 모두 털어서 미 송환 포로를 속환시켰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하여 정1품이 되었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봉분에는 호석을 둘렀다. 좌향은 남향이며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 신도비 등을 갖췄다. 묘표는 원수형 2면비 이다. 비좌 윗면에 복련 전측면에 덩굴문을 장식 했다.
비신 전면에는 “有明朝鮮 吉城君” “權大任之墓” “貞善翁主 祔左” 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7*23.5*129.5cm, 비좌 96*60*37cm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폐슬(蔽膝)을 표현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관모의 武부분 앞면에는 운문을 조각했다. 규모는 총고 194cm 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좌상우하의 세호를 양각했다, 규모는 총고 180cm이다.
장명등은 사모합각지붕의 옥개석을 갖췄고, 옥개석 위에는 보주를 얹었다. 화사석에는 4면에 화창을 내었다 총고는 186.5cm이다.
▶ 권대임(權大任) 신도비(神道碑)
권대임 신도비는 팔작지붕 옥개형 이다. 옥개석 및 비좌에 별다른 문양을 장식하지 앉았다. 신도비의 전액은 “儀賓吉城君墓” “權公神道碑銘” 비제는 “有明朝鮮國贈緌錄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諡權公神道碑銘幷書”이다.
비는 숙종 40년(1714)에 건립된 권대임 신도비명으로 우의정 허목(許穆)이 비문을 짓고, 좌부승지 이징귀(李徵龜)가 글씨를 썼으며, 대사헌 권규(權珪)가 전액을 하였다. 규모는 옥개석 146*87*56cm, 비신 89.5*30.5*198cm, 비좌 151*89*42cm이다.
▶ 권신중(權信中) 묘
권신중[權信中, 선조 8년(1575)~인조 11년(1633)]은 자는 군집(君執),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悏), 어머니는 최말(崔沫)의 따님 전주최씨, 배위는 전주이씨, 아들은 길성위 권대임(權大任)이다. 선조 38년(1605)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한성부판관 등을 지내다가 풍덕군수(豊德郡守)로 재임 시 제릉(齊陵)을 수리한 공으로 통종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묘는 단분 합장이고, 좌향은 남향이다. 묘표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등을 갖췄다. 묘표는 봉분 앞에 있으며 원수형 2면비이다.
비신 전면에 “有明朝鮮贈議政府右議” “政吉興君行通政大夫豊” “德郡守權信中之墓”
“贈貞敬夫人 全洲李氏 祔左”라 새겼다.
규모는 비신 56*26*125cm, 비좌 94*59*27cm이다.
묘갈은 봉분 우측앞에 있으며 팔작지붕 옥개형 이다. 비좌 윗면에는 복련을 전면과 측면에는 덩굴문을 장식 했다. 묘갈의 전액은 “贈右議政吉興君權公墓碣” 비제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義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吉興君行通政大夫豊德君守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權公墓碣銘이다.
비문은 우의정 허목(許穆)이 찬(撰) 및 전(篆)하고 개성부 유수 윤심(尹深)이 서(書)했다. 규모는 옥개석 113*78*51cm, 비신 64.5*31*140cm, 비좌 112*78*37cm 이다. 문인석은 양관조복을 착용했고, 상(裳)위에 페슬(蔽膝)을 표현 하였다. 등 뒤의 대(帶)에는 화문을 장식 했으며, 대 아래로 후수(後綬)를 늘어뜨리고 후수 양 측면에는 패옥을 후수의 아랫단에는 술을 내렸다. 규모는 총고 190cm이다.
망주석은 운각에 여의두문, 그 아래 염의를 조각 했고 주신에는 상하 구분 없는 꽈배기 모양의 세호를 양각 했다. 규모는 총고 184cm이다.
▶ 권진(權瑱) 묘
권진(權瑱)의 자는자옥(子玉)이며 권대임과 선조의 7녀 정선옹주가 결혼하여 낳은 맞아들이다. 1694년에 건립된 권진묘비(權瑱墓碑)는 홍만조(洪萬朝)가 비문을 지었으며, 박경후(朴慶後)가 글씨를 썼다.
묘비 : 有明朝鮮 朝奉大夫 行敦寧府奉事 權瑨 之墓, 令人 南陽洪氏 祔左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 | ||||
-평강성서유물박물관- | ||||
편집부 | ||||
● 세계적으로 희귀한 소장 유물들 평강 성서유물박물관 전시실 내부 ▶ 우씨는 “기증자와 설립자의 기독교 정신의 취지에 맞게 기독교 역사의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가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제 1전시실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질그릇같은 존재로서의 인간·하나님의 등불로서의 인간의 영혼·인(印)같이 품고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소주제를 담고 있다. 제 2전시실은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꿈을 다룬 ‘인간의 타락’ 장이다. 2층에 2주제와 함께 있는 제 3전시실은 ‘인간 회복과 영생의 길’이라는 장으로 기독교의 역사의 마지막 주제를 보여준다. 명확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행해진 위의 해석은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집트 미이라와 각종 부장품에 ‘신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타락의 실상’이라고 해석한 것에 비기독교라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씨는 “박물관 명칭에 들어있는 ‘성서 유물’이라는 구절에서도 강하게 드러내는 박물관 주제의 지향성이 세계적인 유물이 전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원인일 것”이라고 동의한다. ● 종교를 초월한 문화적 체험 성서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나 일반인들이 성서의 역사를 좀 더 가까이서 입체적으로 이해하며 기독교적 관심이 아닌 역사적인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이해하며 교육 창출의 역할이 기대되는 평강성서유물 박물관은 국내 유일한 고대 이집트 박물관이다. 평강교회 교육관에 설치된 성서유물 박물관은 저명한 미국의 고고학자 케네스바인 (전 캘리포니아 로마린다대 총장)박사가 평생 동안 발굴, 수집한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돼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연일 계속되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규모는 지상 6층, 지하 1층으로, 연건평 3백 60여 평이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하나님의 창조). 제2전시실(인간의 타락/ 인간의 회복과 영생의 길), 기획전시실이 있다. - 위 치 : 서울 구로구 오류2동 150-15호 - 관람시간 : 평 일 : 10:00 ~ 17:00, 주 일 : 13:00 ~ 17:00 - 휴 관 일 : 정기휴관일 - 매주 월요일, 비정기휴관 - 하계 휴가기간 - 교통안내 : 지하철 1호선(인천행) 오류역 하차, 2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