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화로는 소통의 매개였다
동봉
2007. 2. 10.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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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 대숲에 북풍이 몰아치는 밤이면 한 겹 창호지를 바른 격자무늬 홑 문짝 틈을 막아주던 문풍지도 덩달아 부르르 떨었다. 무릎 시릴 만큼 외풍이 센 방에 빨간 숯을 담아 묻어둔 화로는 혹독한 추위를 녹여주는 최상의 난방 기구였다. 어른들이 차지한 따끈한 아랫목으로 파고 들 수 없었던 아이들은 바람이 거셀수록 방 가장자리를 차지한 둥그런 오지 화롯가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른들은 기침하고 콧물 흘리는 자식을 보면서 성장을 확인하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삶의 의미를 깨우쳤던, 가족의 역사가 이어지고 가족의 꿈이 만들어지던 화롯가 풍경은 우리네 가정의 일상이었다. 구공탄이 보급되면서 화로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구공탄가스에 견뎌내지 못한 놋그릇들이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에 밀릴 무렵이었을 것이다. 우리 고향에서도 1970년대 후반 아니면 1980년 초쯤 전기가 켜지면서 화로는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고 기억한다. 그 대신 가족들을 홀린 것은 윗목을 차지한 텔레비전이었다. 그리고 가족은 서로 같은 방향을 보면서 각자의 삶을 찾기 시작했다.
화로는 먼 옛날부터 겨울이 길었던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잘 사는 집에서는 12각, 10각 혹은 8각의 백동이나 유기화로를 쓰기도 했고 괜찮은 집에서는 3발이 유기 화로나 곱돌화로를 썼다. 아무리 형편이 어려운 집에도 질박한 옹기화로 두어 개는 갖추고 살았다. 그밖에 시집가는 딸을 위한 가마화로, 집안 어른을 위한 앙증스러운 화로,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찻물 끓이는 화로, 약탕기를 얹을 수 있는 화로 등 다양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였다고 본다.
그뿐인가. 화로는 밤늦게까지 가족들의 옷을 바느질하던 어머니가 뾰쪽한 인두를 달구게 도왔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인두의 달구어진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인두 바닥에 살짝 대보던 모습을 실감나게 기억한다. "피식" 소리에 주위는 일순 긴장한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양 달구어진 인두를 헝겊에 쓱쓱 문지른 후 풀을 바른 하얀 동정을 곱게 펴던 할머니의 손길은 하나의 경이였다. 아마 뜨거운 물건 앞에서 검지에 침을 묻혀 뜨거운 정도를 가늠하는 내 버릇은 그때 할머니로부터 무언중에 익혔을 것이다.
더구나 화로의 날개에 놓인 부삽으로 회색의 재를 살짝 젖히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 불씨가 은하수의 별처럼 환상적이었다는 말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화로의 불씨들이 공기와 만나 깜박깜박 제 몸을 태운 후 재가 되어 사라지는 과정이 마치 작은 우주와 같았다고 말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 받을지도 모른다.
가족의 붕괴가 도를 넘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 사는 모습이 각박해졌다는 염려도 크게 들린다. 그럴 때면 나는 가끔 우리네 가족의 일상에서 화로를 대신할 소통의 매개를 찾는 꿈을 꾸기도 한다. 한 겨울 훈훈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화로처럼 지금 우리네 가족들을 모을 수 있는 물건은 없는 것일까? 가족의 정, 사람의 정을 나눌 물건이나 공간이 있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훨씬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텐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