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촌 美來村

새3강 07026(월) : 배농사/이명자 사장

동봉 2007. 2. 27. 09:37



왼쪽 사진은 작년에 배축제할때 가서 찍은 모습이구요

오른쪽은 축제때 경기도립 무용단과 국악단공연 보고 있는 제 모습이에요

머슴아들 세명 보이시죠!

경기도에 농원에서 공연을 신청하셔서 무료로 공연도 보고점심도 먹고

배밭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어요

이번주 토요일 일요일에도 2일간 농원에서 배꽃축제를 여는데 화성에서

가까우신데 사시면 참석해보세요

제가 안내해 드리면 좋은데 전 주말에 여행이 잡혀있어서요~

약도를 원하시는 분 있음 올려드릴께요~


제가 5년전에 현명농장을 알게 된이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먹고 있는 배에요~

친환경 농산물 말은 많이 들와봤는데 대체 어떻게 농사를 지으셨길래

한결같이 저런 이쁘고 맛있는 배를 생산해내는지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미국이니 중국이니 수입안하는 농산물이 없는 이 현실에서 자연농업식 재배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는 농사를 지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헛농사가 되고 마는게 현실입니다.

비싸도 믿고 먹을수 있는 식품은 사람들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건 아실꺼에요~

현명농장배는 거름을 뭘로 주나면요

한방영양제, 칼슘, 천혜녹즙,키토산, 아미노산, 천연미네랄등 모든 영양제를

직접 만들어서 준답니다. 상상이나 가세요!

그러니 한결같이 맛이 있을수밖에요~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된 사유는

전 그동안 28000원 주고 배를 지금껏 사먹고 있었는데

남편이"현명농장배가 싸게 나왔네"라고 의아해하면서

전 집이 수원이고 농장은 화성이라 2박스 살려고 들려봤어요

싸게 내놓은 이유인즉

특품은 크고 겉보기에도 아무 흠집이 없어야 상품가치가 있거든요

근데 농사를 짓다보면 농약한번 안치는데 다 예쁘게 나오진 않죠!

그러다 보니 맛도 똑같고 아무이상도 없는데 제값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와서 배를 싸게 공급해주신다고 하셨어요~




현명농장배는 롯데백화점 계약재배농장인데요

백화점 가시면 가격이 무려 5만원입니다.

품질보장받은 식품은 가격이 비쌉니다.

오른쪽 사진은 공장내부를 함 찍어봤어요.

고추장, 배즙 만드는 공장내부도 구경해봤는데

어찌나 깔끔하게 관리를 잘하시는지

혀를 내두르고 왔다는거 아닙니까!

농사는 기가 막히게 잘 지으시는데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홍보를 잘 못하시고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안타까운 마음에

팔아보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왔어요~



사진으로 보셔도 아시겠지만 배 껍질 색깔이 투명하고 맑아요

고추장도 시판되고 있는데 음식할때 조미료 하나도 안쓰고 요리를 해도

맛은 끝내줍니다.

가격은 \18000 인데요(택배비 포함)

크기가 다릅니다

7.5kg 인데 8개,10개,11개 이렇게 구성되어있어요
큰걸 선호하시는 분이면 8개신청하시면 되구요.

작은걸 선호하시면 10개나 11개로 신청하심 됩니다.

두박스 신청하시면 \33000

고추장은 그동안 순창 고추장이 맛있다고

사먹었었는데 현명농장 고추장 드셔보시면

다른거 못먹습니다.

천연배즙으로 당도를 맞춘 고추장하고 물엿넣고 끓인 타 고추장하고는

맛의 차원이 다르겠죠!

나중에 고추장에 관심이 많으시면 직접 만드는 현장 내부사진을 올려보도록 할께요

고추장은 택배비가 포함되지 않은 가격이오니 배 주문하실때 같이 주문하심 좋을것 같네요

고추장 가격은 사진상으로 보이는게 400g \15000.저거보다 작은게 200g\10000입니다.

그리고 100퍼센트 좋은 배만 골라서 만든 배즙도 있어요

순수배즙이라고 배만 짠건데요. 아이들이 좋아합니다.

도라지 생강이랑 같이 넣어서 영양식품으로 어른들이 좋아하는 배즙도 있어요

순수배즙 \24.000(택배비 포함) 도라지,생강.배즙\27.000(택배비 포함)

먹어보지 않고 사는건 미심쩍으니까 배를 신청하시면

배상자 안에 시식해보시라고 몇개 사모님께 넣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이렇게 싼 가격에 만나볼 기회가 많지는 안을것 같아요.

좋은거 혼자만 드시지 마시고 소문 많이 내주세요

그래야 저도 기운내서 좋은일 있음 우리 회원들님하고

같이 하죠~

입금 농협(207173-52-169006)

우리은행(394-07-010038) 행운 정 을 순

email- ssunn953@hanmail.net ssunn953@naver.com

전화- 031-294-9537

메일로 인적사항 보내주시고 실명 잊지마시고요.입금해주시면 되요~


“이미지의 매트릭스”

지금 압구정거리는 세련된 현대식 상업건물들과 세련된 카페들로 즐비하지만 불과 3, 40년 전 만해도 배밭이었다.
늘 사람들로 북적대는 국내 최고의 백화점들과 바쁘게 지하철 출입구를 드나드는 사람들, 그리고 첨단의 유행을 걷는 패션의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지금의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거리이다. 그러나 분명 그랬다.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어버렸다는 옛말도 있지만 배밭이 최첨단의 소비문화를 자랑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桑田碧海가 아니라 梨田盛市가 되었다.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가 되기까지에는 무수한 시간의 문제가 개입되었겠지만 배나무밭이 세련된 도시로 탈바꿈하는 데에는 불과 몇 년의 시간이 고작이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먼 우주의 시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사람의 일생에 비견하더라도 실로 눈깜빡 할 사이가 아닌가.

흔히 일반인들이 알고있듯이 강남은 강북 도심의 역할을 분산, 혹은 확장시키기 위해서 개발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강북 도심의 수용역량이 한계에 부닥뜨리면서 확장된 부도심으로서의 강남개발이 이루어진게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그런 부수적인 효과도 노렸겠지만 근본적으로는 1967년 대통령의 결정으로 경부고속도로 사업이 시작되면서 토지보상비 없이 도로용지를 확보하는 일이 절실했던 이유가 더 크다. 그래서 제3한강교에서 양재동 구간의 건설책임을 맡은 서울시는 부랴부랴 영동제1지구 구획정리사업에 착수한다. 대상지는 428만평으로 세계가 놀랄만한 규모였다.

이에 따라 제3한강교 건설도 처음 계획보다 앞당겨 시행되었고, 이 때 1970년 양택식 시장이 삼성동, 압구정동, 대치동등 「영동제2지구」개발 365만평의 구획정리사업이 추가되면서 강남은 지역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한다.
동호대교와 압구정동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그리고 한국 부동산 투기의 원년이 시작되는 것도 이 즈음이다. 소위 “빨간바지”로대표되는 복부인들이 부패한 정권의 그늘 밑에서 주워들은 정보로 막대한 부동산 매매 차액을 남겼다.
배밭을 가꾸면서 근근히 생활하며 자식 공부시키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강남의 원주민들에게도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놀라운 은총(?)이 내려지던 때였다. ‘졸부’라는 말이 유행했다. 배밭을 팔아서 졸지에 생전 처음보는 거금을 거머쥔 전직 농부들은 그야말로 쏟아져 내린 ‘돈벼락’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농부들에게 땅을 사서 더 비싼 값으로 되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긴 복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쉽게번 돈을 더 이상 아끼지 않았다. 앞다투어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집안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으며, 화장실의 모든 벽은 이태리산 대리석으로 치장했고, 그래도 남은 돈으로는 때마침 불기 시작한 골동품 열기에 발맞춰 마치 자신이 고매한 고미술 애호가라도 되는 양 골동품 사재기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난한 농부에서, 혹은 가난한 군인의 아내에서 일약 거부로, 정권 창출의 주역으로 신분이 상승한 그들에게 있어 일차적인 목표는 당연히 자기 집을 새로 짓고, 그것을 힘을 다해 치장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흥부가 첫 번 째 박을 탈 때 나온 것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환혼주(還魂酒)등, 세상의 모든 불치를 낮게 하는 희귀한 약재였다. 그러나 흥부 마누라는 대뜸,
"우리 집에 약 사러 올 이 없고, 아직 효험 빠르기는 밥만 못하오."
하며, 지금 당장 등 따숩고 배부르기를 원한다.
그래서 뒤이어 타는 박에서는 세간살이, 그러니까 집과 집을 치장하는 온갓 고급한 가구며, 사치품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나오는 것이 여자다. 강남의 부동산 투기 붐도 흥부의 박에서 나오는 온갓 재물의 순서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옛말처럼 사람은 돈이 생기면 권력을 탐하고, 그에 걸맞는 문화적 ‘분위기’를 원한다.
1970년대에 인사동을 휩쓸었던 골동품 수집 열기를 둘러싼 그 수많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의 이면에는 강남개발을 둘러싼 부패한 정권 담당자들의 자기 이익 챙기기와 그로 인해 졸지에 부자가 되어버린 흥부같은 사람들의 ‘졸부記’가 있었던 것이다.

압구정동(押鷗亭洞)이란 지명은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수양대권을 도와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 된 뒤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무려 30여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인물이다. 주도면밀하게 세류를 파악했던 그였지만 관직을 떠난 뒤에도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멀지 않은 지금의 압구정동 자리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으니, 수양대군을 도와 ‘킹 메이커’의 역할을 다했던 그도 자신의 권력욕 만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또 한 켠으로 생각하면 그 당시 사대문 안이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듯이 유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때 한강 건너에 자리를 잡고 물러나 있던 그의 행적이 과히 흉이 될 법한 일은 아니다 싶다. 따지고 보면 화전에 머물렀던 중신들도 많고 서울에선 좀 멀지만 파주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다고 볼 때 한명회가 특히 비난을 받은 것은 순전히 그의 정치력을 위험시했던 사람들에 의한 비난성 발언에 가까운 야유였을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파주에서 서쪽으로 임진강가에는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세종조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尨村) 황희(黃喜)정승의 정자인데 반구정의‘伴’과 압구정의‘狎’은 둘 다‘벗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놀았던 갈매기는 아주 달랐던 것 같다.
황희가 말 그대로 갈매기로 상징되는 무심의 상태와 놀았다면 한명회의 갈매기는 먹이를 탐하는 갈매기의 그것과 같았다. 그래서 누구는 한명회의 압구정의 ‘압’자를 친할 ‘押’이 아닌 누를 ‘壓’자로 야유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이런 자구를 고쳐서 당하는 조롱을 꽤 많이 받은 것 같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강정(江亭)에 걸려있는 한명회의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라는 싯귀의 扶를 亡으로, 臥를 汚로 고쳐써서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는 뜻으로 바꾸어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압구정이란 이름은 한강변에 있는 이 정자의 장소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원래 '압구'는 한명회의 호이다. 중국 송나라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던 서재 이름인 압구정에서 따온 것이다.
'속된 세상 일에서 벗어나 한적한 강가에 머물며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한명회는 정자 이름에서 자신의 호를 따왔고, 그것을 다시 정자의 이름으로 지어 부른 것이다.

아마 한명회 당시의 이 한강변은 흰 배꽃들이 눈을 어지럽히는 봄날이 있었을 것이고, 정말 갈매기들이 한가롭게 날아다니던 조용한 강가였을 것이다. 지금은 피부 미용실에서 썬탠을 한 늘씬한 미녀들이 온갖 화려한 외국 상호를 달고있는 건물들 사이를 활보하는 소비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거리가 되었지만 말이다. 시인 유하는 압구정동을 이렇게 노래했다.



압구정동이 오늘날 소비자본주의의 대표격인 거리가 된 것에는 신도시라는 여러 가지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상업 자본의 안간힘 때문이었다. 이 상업자본의 힘에는 현대 백화점과 갤러리아로 대표되는 거대자본과, 카페를 중심으로 이 거리에 밀집해 있는 소규모 자본의 두 가지 힘이 존재한다.
강남은, 알다시피 우리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실험된 지역이었다.(외국인들은 강변북로를 달리다가 강남의 아파트들을 보고 거기가 서울의 슬럼인 줄 안다) 따라서 자연히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게 될 막대한 인구를 거대자본이 놓칠리 없고, 당연히 그 수요에 따라 백화점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에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은 교육받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 정도였고, 또 그들은 당시 무자비하게 진행되던 개발이익의 수익금들을 어느정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눠 가질 만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압구정 문화를 창출한 것은 처음에는 주부들에 의해서였다. 백화점을 찾는 주부들은 쇼핑 외의 다른 무엇을 원했다. 정형적인 백화점의 부대시설에 만족하지 못했고, 거대 자본은 이런 다양한 주부들의 기호를 만족 시킬만한 변화를 주도하지 못했다. 그 불만을 만족시키며 압구정에 하나 둘 씩 자리하기 시작한 카페들은 나중에는 서로의 변별성을 경쟁적으로 주장하게 되었고, 점점 고급해지는 소비자들의 기호에 따르기 위해 너도나도 일본의 세련된 실내장식을 모방했다.
이 시점에서 압구정 거리를 주도하던 주부들은 거의 순식간에 그들의 자식들로 바뀐다. 이 일본풍에 열광한 것은 소자본들이 노렸던 주부들이 아니라 그들의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80년대에 외국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강남의 자제들이 국내의 힘겨운 입시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학을 빙자해 탈출을 감행한다. 대학의 간판이 중요했지 본래 공부에 뜻이 없던 이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유학생들 끼리 모여 노름과 도박, 마약으로 외화를 탕진하면서 일단의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그 시기에 압구정 거리는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된다. 고등학교 때의 억압에서 갑자기 이국 땅에서 학교와 부모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진 이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통제 기제란 게 있을리 만무했다. “욕망의 통조림 공장”으로서의 압구정 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압구정거리는 “온갓 이미지들이 난무―유하”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난무에는 개발 독재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란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성이 내재되어 있고, 부모 세대들의 천박성을 경멸하는 신세대들의 반항과 실패가 같이 한다.
말하자면 그 이미지들의 난무에는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빼곡히 숨어있는 것이다. 지금도 압구정거리의 번화함은 여전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그 거리가 가지고 있는 세련됨의 천박성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다.
소비자본주의의 거품이 걷혀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수대교의 붕괴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 전대미문의 사건은 거품임이 밝혀졌음에도 관성에 의해 압구정을 찾던 개안(?)한 오렌지족들의 발길을 인위적으로 끊게 만들었다.
굳이 돌아서 압구정동을 찾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압구정동은 이미 매력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고 싶은가? 지금은 강북보이와 강남보이로 유행의 물결도 분리되어있다. 이 분리가 전적으로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나는 어쨋든 새로운 물결을 찾아가기 위한 어떤 과정이라고 본다. 이 과정을 치열하게 겪으면서 우리는 정말 ‘문화’라는 것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시인이자 건축가, 건축비평가로 활동
90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 타즈마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