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을 걷다](5)세조의 거둥길과 만과봉
동봉
2007. 6. 10. 09:05
[한강을 걷다](5)세조의 거둥길과 만과봉 | ||
입력: 2006년 08월 18일 15:50:50 | ||
멈추지 않는 물길을 따라 오대산을 나섰지만 숲이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다시 산문에 들어서서 새벽 기운 잔뜩 머금은 채 곧추 선 전나무 숲을 걸었는가 하면 반석에 앉아 맑은 물 고인 곳마다 노니는 송사리들을 바라보다 선정(禪定)에 들었다. 말이 선정이지 내가 뭘 안다고 선 운운 하겠는가. 그저 동 터 오는 곳을 향해 눈을 감고 새벽바람 소리를 들었는가 하면 송사리들 노니는 모습을 떠올렸을 뿐인 것을…. 그러다 불현듯 잊은 것이라도 있는 양 서둘러 다다른 곳은 부도밭이었다. 그 근처에도 빼어난 기품을 지닌 전나무들이 숲을 이루었지만 그보다는 부도밭만이 내놓을 수 있는 고즈넉함에 매료되었던 탓이다.
거기에 더해 남호암골에서 내려오던 날, 서붓서붓 걷다보니 엉겁결에 지나치고 만 아쉬움이 가득 차 있었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깨달음의 길을 간 사람들의 흔적이 주는 묘한 뉘앙스 때문이었을까. 과연, 찾는 이 드문 부도밭은 절집에서 새나 짐승이 와서 먹으라며 음식을 놓아두던 생대(生臺)와도 같이 여겨졌으니 마음이 푸근하기만 했다. 그곳 어디쯤 이슬을 툴툴 털어내고 바위에 걸터앉아 펼쳐 든 것은 조선 중기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계곡 장유와 함께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불리던 택당 이식(1584~1647)의 시였다. 지금의 원주시 흥업면 월송 3리 다둔리에 있었던 울암사(鬱巖寺)에 머물던 택당이 지인인 혜종(惠宗)선사가 오대산 선방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것이다. 그 중 첫째 수에는, “저잣거리 벗어나면 모두가 선의 세계(離俗皆禪境)/영악한 속셈 망각하는 그것이 불법(忘機是佛乘)”이라는 대목이 있기도 하려니와 두 번째 수에는 “강물줄기 협곡 지나 활짝 열리면서(江出峽門開)/굽이진 곳 백 길 높이 자리한 선방(禪房百尺외)/맑은 물 하얀 자갈 훤히 보이고(淸流分素礫)/오솔길 푸른 이끼 온통 뒤덮였네(細逕入蒼苔)./그저 세상 초월하면 그만인 것을(直可超三界)/뭣 때문에 오대산을 굳이 가려 하시는고(何須向五臺)”라는 대목이 있으니 선에 대한 간결한 인식도 출중하거니와 지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까지도 잘 드러난 시이다. 택당의 말에 따르면 속진이 묻어나는 세상에서 떠나면 그 어느 곳이라도 그곳이 곧 선방이요, 또 저자에 머문다 하더라도 세상살이에 물들지 않으면 그곳 또한 선방이라는 것 아닌가. 그것은 결국 선의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그럼에도 왜 나는 산을 떠나지 못하는가. 이미 나섰던 문을 구태여 되돌아와 다시 산을 배회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안거에 들었던 스님들마저 지난 백중날 모두 산문을 나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가 산문을 나서기를 저어하는 것은 산문 밖이 안보다 더 혹독한 선방이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방이라고 해서 반드시 맑고 고요해야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앞서 택당이 시의 행간에서 말했듯이 선은 그 어디에서고 날을 세울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가 머무는 곳은 그 어디이든 선방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첫 회 원고를 쓰기 위해 서대 염불암에 올랐던 지난 달 15일, 산 속에 있었던 나는 나뭇잎에 세차게 부딪치는 빗소리와 나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듯 불어대던 바람 속에서 마냥 행복했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대한 경외가 생길 만치 말이다. 그러나 물길을 따라 산문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모든 황홀함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서 전율에 떨어야 했다. 새벽에는 멀쩡하던 오대천 물길은 광포한 폭군과도 같이 변했으며 물길을 따라 진부면으로 향하는 길은 물과 흙에 뒤덮여 사라지고 집은 흙더미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떨어져 내린 산이 참혹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는가 하면 내 눈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가 집을 덮치고, 순식간에 자동차를 삼켜 버리는 아수라장과도 같은 광경을 두 눈 멀쩡히 뜬 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집 주인을 모른 체하며 굉음을 내고 흐르던 오대천은 둑이나 다리 근처를 넘실거리며 호시탐탐 넘어 올 태세였으며 나는 그 참혹하고 암담한 장면들 안에서 12시간을 꼼짝 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그날의 악몽을 지울 길이 없다. 오늘처럼 맑고 고요히 흐르는 물이 남겨 놓은 상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굵은 것들이니까 말이다. 그 때문에 선뜻 산문 밖으로 나서기를 저어하고 있는 것이리라. 산문 밖은 그 어느 때보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가시밭의 풍경이 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어쩌랴. 물은 흐르고 또 흐르는 것을….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산문을 나서서 20리쯤, 오대산의 남쪽 끝자락인 월정 삼거리에 다다랐다. 옛사람들의 기문에는 이곳을 성오평(省烏坪)이라고 하고 있으며 야색창연(野色蒼然)이라는 표현을 하는가 하면 이 삼거리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나 중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사하촌이 크게 번성했던 곳으로 짐작할 뿐이다. 지금은 삼거리에 주유소며 슈퍼마켓이나 모텔과 같은 것들밖에 남아 있지 않아 섭섭했지만 그나마 식당 하나가 해묵은 모습을 하고 있어 반가웠다. 조선의 7대왕인 세조가 즉위 12년인 1466년 3월에 상원사로 거둥을 할 때에도 이곳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그날은 윤3월16일이었으며 다음날인 17일에 세조는 상원사로 향했다. 삼거리에서 동쪽, 곧 횡계로 방향을 잡자마자 길 양쪽으로 소나무가 튼실하게 자란 작은 동산이 보이는데 그곳은 만과봉(萬科峯)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조가 상원사에 거둥한 17일 행궁(行宮)에 돌아와서 영의정인 희현당(希賢堂) 신숙주, 이조판서인 자순(子順) 한계희, 호조판서인 천은당(天隱堂) 노사신으로 하여금 문과 시장(文科試場)에 나아가서 참시(參試)하게 했다고 되어 있으니 과거를 봤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종의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것이었으며 그 시험을 치른 장소가 바로 만과봉 일대이다. 이 지방에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당시 시험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흙 한 줌과 돌을 하나씩 가져오게 하여 쌓은 것이 지금의 만과봉과 같은 동산을 이루었고 그 시험에 참가한 유생들이 모두 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설화로 전할 뿐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의 당시 3월18일 기록을 보면 문과에 진지(陳趾) 등 18명을 뽑고, 무과에 이길선(李吉善) 등 37명을 뽑았다고 되어 있으니 과거를 본 것은 분명하며 급제자를 뽑은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의문은 세조가 왜 이토록 깊은 산골에서 불현듯 알성시를 치렀을까 하는 것이다. 설화에 따르면 왕이 피고름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럽게 시달리던 피부병이 상원사 거둥길에 씻은 듯 나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상원사 들머리에 있는 관대걸이에 관복을 걸어놓고 계류에서 목욕을 하던 중 등을 씻어 준 문수동자에 의해 그의 고질적인 피부병이 나아 그 기쁨으로 유생들에게 시혜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세조가 획득한 정권은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정권의 선명성이나 정통성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조카인 단종을 폐위시키고 사육신을 참살한 그의 도덕성은 백성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절대자에게 자신을 의탁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 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인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가 택한 절대자는 부처였으며 재위 기간 중에 이룬 호불(好佛)정책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가하면 그는 역대 왕들 중 유난히 거둥을 자주 했으며 그때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금강산을 떠나 동해안의 명파리와 간성을 거쳐 낙산사에 머문 세조는 상원사에 거둥하기 전인 3월14일 강릉의 연곡에 행궁을 차렸다. 그리고는 농요를 잘 부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노래 경연대회를 열었다. 그 중 양양의 관노인 동구리(同仇里)란 자가 가장 노래를 잘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상으로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이며 악공(樂工)의 예(例)로 왕의 일행을 따르게 하고, 또 유의(유衣) 1령(領)을 내려 주었다고 하니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특혜였다. 노비가 양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위의 기록에서 궁금한 것은 왕이 왜 농요를 들었을까 하는 것이다. 또 가장 노래를 잘한 사람으로 뽑힌 인물이 하필이면 가장 천한 신분인 노비였을까. 물론 그가 노래를 잘 했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노비의 신분으로 왕의 행렬에 동참했다는 것은 조용한 고을에서는 큰 사건이었을 것이며 백성들이 입방아를 찧기에 충분한 얘깃거리였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왕에게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던 것일 테니 말이다. 세조는 자신이 가진 무한권력을 백성들에게 베풀며 소위 말하는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설화에는 그런 왕이 치르는 과거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올곧은 선비들도 있었다지만 많은 이들이 앞 다투어 과거에 응시를 한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현실 앞에 무너져 버리고 만 명분의 씁쓸함처럼 아직도 봉긋하게 솟아 있는 만과봉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데 찌푸린 하늘에서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지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