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을 걷다](11) 아우라지·구미정·검용소
동봉
2007. 6. 29. 16:58
[한강을 걷다](11) 아우라지·구미정·검용소 | ||||||
입력: 2006년 09월 29일 15:48:29 | ||||||
아! 이 간사한 마음을 어쩔거나. 어제만 하더라도 나는 그곳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저 새벽이 밝아오면 안개가 자욱하거나 어슷어슷 동살이 비쳐드는 조양강 기슭을 거닐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눈을 뜬 새벽,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곤두서고 말았다. 땅거미 지는 조양강 둑에 앉아 피안은 결코 먼 곳에 있거나 저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밑일 것이라고, 그리하여 그 어느 곳에서라도 내 본래 면목을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 곧 도피안(到彼岸)이 아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어놓고는 밤새 마음이 달라진 것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혹은 앞으로 가야할 곳보다 저곳이 더 좋아 보이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모래성처럼 허물어버린 채 쏜살같이 달려가려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골지천(骨只川)이다. 이 연재의 시작에서 밝혔듯이 나는 오대산 우통수를 문화적 관점에서의 발원지로 보고 그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골지천은 지리학적 관점에서 본 한강의 발원지인 검용소(儉龍沼)에서부터 시작된 물줄기이다. 그렇다고 한들 또 하나의 발원지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것은 결코 나를 유혹할 수 있는 무엇이 되지는 못한다. 다만 오대천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흘러내리는 골지천의 매혹적인 모습들이 잊히지 않을 뿐이다. 그 때문에 이른 새벽부터 기슭을 거닐던 조양강이 동살 가득 머금은 채 붙들었건만 짐짓 못본 듯이 돌아서고 말았다.
지나간 세월의 모습들이 모두 아름답거나 귀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우라지만은 이렇듯 달라지지 말았어야 했다. 요즈음의 유행어처럼 “아우라지는 아우라지다워야 아우라지이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우라지의 아름다움은 세월의 더께를 두터운 이끼처럼 덮어 쓰고 있는 것이었다. 낡으면 낡은 대로, 궁벽하면 또 그것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는 법이다. 차라리 그것을 감추거나 없애려고 어설프게 손을 대는 것보다 그냥 흘러가는 세월에 맡겨 저절로 곰삭게 두는 것이 더 현명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작은 사물도 그렇거니와 장소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나 아우라지 같은 곳은 딱히 눈으로 확인할 빼어난 정경이 있는 곳도 아니니 더욱 그랬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양수라고 하는 송천과 음수라고 하는 골지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세워둔 처녀상도 바뀌지 말아야 했다. 소나무 아래에 소담한 크기로 있던 하얀색의 처녀상도 볼 품 없었지만 그것은 그나마 다듬어지지 않거나 욕심내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머금고 있어 오히려 정겨웠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처녀상을 보고 첩첩산중 정선 땅 산골인 이곳에 살던 처녀라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라. 그녀는 치마저고리에 몸매가 감춰지긴 했지만 소위 44사이즈의 쭉쭉빵빵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팔등신이다. 어찌 이렇듯 출중한 미모를 지닌 아가씨가 이토록 깊은 산골에 살았을까. 아무리 봐도 그녀는 미스코리아나 슈퍼모델을 하면 했지 산골에 있을 처녀가 아닌 것이다. 그 처녀상을 보며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 살겠네”라는 아라리를 떠올리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그것은 불균형의 미학이며 어긋난 감성이다. 그래서 전설처럼 강물 위를 떠돌았을 아우라지의 이야기들은 그저 머릿속으로만 되뇔 뿐 다른 모든 것은 마치 박제된 듯 인공의 냄새만이 강하게 나는 곳이 되고만 것이다. 씁쓸한 마음으로 처녀상 곁을 떠나려는데 기적소리가 울렸다. 탄광촌이었던 구절리를 출발한 낡은 비둘기호가 핍진한 삶의 영혼들을 실어 나르던 기억만 지니고 있는 내 눈앞에 난데없이 묘한 분위기의 열차가 등장했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타던 마차가 저러했을까. 나는 그만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리곤 뭐라고 표현하기도 힘든 괴리감에 젖어야 했다. 왜 저렇게 난감한 치장을 한 열차가 아우라지 강 위의 철교를 건너가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정선과 아우라지라는 낱말이 주는 뉘앙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해야 하는 것들이 도대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가 궁금하다. 섞어찌개도 제대로 맛을 내려면 아무것이나 섞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렇게 찌개를 끓이는 집에 어쩌다 한번은 갈지 모르지만 단골로 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퓨전이란 이것저것 아무것이나 마구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 현실과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보다 정확한 안목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현실사회 속에서 모나거나 서걱거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뚝심을 바탕으로 한 용기 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 한 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장황하게 떠드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꽤나 아팠나 보다. 아직도 아라리의 사랑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떼꾼들의 질박하지만 핍진한 삶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는 이들아. 그대들은 이제 더 이상 아우라지를 찾지 마라.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버렸고 강기슭에 굴러다니는 조약돌처럼 아라리도 더 이상 투박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아우라지는 또 하나의 추억을 머금은 채 찾는 이들의 애를 태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우라지의 슬픈 장면 하나는 임계댁이라 불리던 배귀연과 첩첩산골 고양리에 살던 김남기의 옥산장 여관에서의 공연이었다. 1990년대 중반, 사람들은 앞 다투어 아우라지로 달려갔고 그들은 곧잘 임계댁과 김남기씨를 여관 2층 마루에 불러 세웠다. 물박이나 지게조차도 없이 그저 멀뚱히 서서 도시에서 찾아 온 이들을 위해 소리를 하던 그들, 세월이 지날수록 참 몹쓸 짓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차례 두차례, 횟수를 더할수록 스위치를 넣으면 나오는 라디오처럼 그들에게서부터 아라리는 그렇게 흘러 나왔다. 아라리가 그들의 몸에 배어 들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련만 어느덧 애절함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라리는 결코 남이 들으라고 내뱉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푸념처럼 늘어놓는 소리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처럼 달라진 것은 뭇 호사가들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결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아!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해 강물은 짙푸름을 더하는가. 오늘 따라 잔잔한 강물에 하늘빛이 서려 있었다. 여량이 끝나는 곳, 아우라지 성당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여량1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물길을 따라 들어섰다. 본새가 오대천보다 넓어 제법 강과 같다.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정경을 곁으로 두고 새치교를 넘어 고갯마루에서 자동차를 멈췄다. 어느 곳에서 이만한 물굽이를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인가. 흔치 않은 정경이려니 그저 말없이 보고 있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감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택당(澤堂) 이식 선생의 손자인 수고당(守孤堂) 이자(1652~1737)가 머물렀다는 정자이련만 나는 도통 정자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정자가 내려다보이는 그 건너편에 올라 굽이굽이 흘러가는 골지천과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만끽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만하면 행복하지 않은가. 생량머리의 가을볕을 덮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누웠으려니 절로 미소가 머금어졌다. 어제 나의 피안이었던 조양강을 떠나 다다른 오늘 나의 피안은 이곳이다. 오늘 만큼은 꼬치꼬치 역사도 따지고 싶지 않고 수고당 선생이 탐닉했다는 구미십팔경(九美十八景)도 찾고 싶지 않다. 골지천은 그렇게 머리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리라. 두어 시간 머물렀다가 임계와 하장을 거쳐 검용소에 다다랐건만 머릿속에는 조금 전 구미정에서 바라본 텁텁하고 옹골진 정경만이 똬리를 틀고 앉아 비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그 정경은 나의 골지천 아라리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지누〉 |
[한강을 걷다]맞은편서 굽어본 구미정 | ||
입력: 2006년 09월 29일 15:48:35 | ||
그 중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곳은 남한강이며 오대산의 우통수보다 검용소에서부터 시작되는 골지천의 물줄기가 더 길어 한강의 본류로 보는 것이다. 골지천은 태백시 창죽동의 검용소에서부터 오대천과 만나는 정선군 북면 나전리까지의 물길을 일컫는 것이며 그곳부터는 조양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강은 서로 다른 물이 합하는 곳에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긴 강이 짧은 강의 이름을 덮어버린다. 아우라지는 두 물이 서로 어우러진다는 표현이며 그곳에서 송천과 골지천이 만났지만 송천보다 골지천이 더 길므로 여전히 골지천이라 불리고 송천은 아우라지에서 그 이름을 잃는 것이다. 골지천은 눈길 닿는 곳 모두 봐둘 만하다. 어느 곳 한 군데 뒤처지는 곳 없이 아름답지만 유난한 곳은 구미정이다. 수고당 이자 선생이 1692년에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며 은둔해 지냈다는 곳이다. 이곳은 그 무엇보다 강바닥의 기암괴석들이 일품인데 이자 선생 또한 그 중 아홉 군데 아름다운 곳을 골라 구미(九美)라고 했으며 또 열여덟 곳의 경치에 대해 각각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지 않은 채 바라봐도 골지천의 정경은 이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자가 있는 곳보다는 그 맞은편 높은 곳에 있는 바위에서 내려다봐야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큰 길에서 구미정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지 말고 사을기교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2㎞ 남짓, 아스팔트가 끝나고 시멘트길, 그리고 400m가량 비포장 길을 들어가면 맞은편에 닿을 수 있다. 아우라지는 골지천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지닌 곳이다. 한강을 흘러내린 뗏목이 이곳에서 출발했으며 아라리 가락이 강물처럼 넘실거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눈으로 확인할 것은 드물다. 그러니 아우라지에 가려거든 그곳 토박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9월29일부터 10월2일까지 정선읍 공설운동장에서 아리랑제가 열린다. 〈이지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