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을 걷다](14) 봉양리·용탄리·귤암리·가수리

동봉 2007. 7. 19. 08:09



[한강을 걷다](14) 봉양리·용탄리·귤암리·가수리
입력: 2006년 10월 27일 16:33:52
1994년, 동강의 지류인 동남천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모습이다. 사북, 고한에서 시작된 동남천은 가수리에서 동강에 합류한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안에 자유를 만드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길에 나서서 조차 머물러야할 곳과 서둘러 지나쳐야할 곳에 대한 분별조차 하지 못한다. 속도에 얽매인 것이다. 그저 빨리 가는 것만이 능사다.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 코드 중 하나인 ‘빨리빨리’는 박정희가 만들어 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른 습성이다. 목표와 기간이 정해졌으니 어쩔 것인가. 어떻게 하든 일을 성사시켜야 했으니 서둘러야 했고 그에 따른 졸속은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대한민국은 사고 천지 혹은 수선공화국이 되고 말았지 않은가. 그렇게 보면 얼마 전 히트 친 유행어인 ‘대한민국에서 안되는 게 어디 있니’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며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어 마냥 웃기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도진 ‘빨리빨리’ 병은 길을 나서서 조차 떨치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도보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속도는 백리 행군을 밥 먹듯이 하는 군사문화의 잔재인지는 몰라도 다분히 전투적이다. 등산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그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다만 누가 얼마나 빨리 혹은 누구보다 더 빨리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왔느냐가 중요할 뿐인 것이다. 하루 동안 더 많이 걷고 더 빨리 올라갔다 내려 온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은근히 깔보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한때 붐을 일으켰던 문화유적 답사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진득하게 한 곳을 오래도록 보기보다는 비록 무엇을 보았는지 잊어버릴지라도 서둘러서 여러 곳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 관(觀)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는 것과도 같다. 조선 후기의 사상가인 혜강(惠岡) 최한기(1803~1877)가 쓴 ‘기측체의(氣測體義)’에 보면 “눈동자는 내외를 출입하는 문(眸爲內外咽喉)”이라고 했으며 눈은 한 몸의 들창이요, 눈동자는 들창의 볼록 거울이라고 했다. 더구나 그렇게 눈에 와서 비치는 것들은 모두 저마다의 기를 지니고 있어 사람들이 스스로 지닌 기와 서로 통하면 한번 봤을 뿐이지만 능히 잊히지 않고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아무리 자주 본 들 이내 잊히고 만다고 했다.

뱅뱅이재
나는 그 말을 믿고 따르는 편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여전히 느린 걸음이지만 이미 새벽부터 길을 떠나 정선읍을 빠져 나간다. 정선 제 1교 앞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는 정선병원 입구는 비석거리이며 우시장 터이기도 했다. 아예 마을 이름이 강마을이며 비석관이라는 막걸리 집이 유명했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느티나무 한그루가 길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서 당시의 정경을 웅변하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은 강 건너 뱅뱅이재에 가 있다. 5층짜리 아리랑 아파트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는 그 고개는 병방치라고도 부르지만 뱅뱅이재가 더 맛깔스럽다. 고갯마루에 서면 조양강이 뱅뱅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젠 낡은 모습이 역력한 아리랑 아파트 옆 주공아파트는 아라리 명창인 김병하씨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1994년 그를 정선역 앞의 허름한 다방에서 만났었다.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두어 차례 소리를 들었던 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듬해에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결국 소리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인 고은 선생은 그의 소리를 두고 정선아라리의 극치라고 까지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낭랑하기만 한 그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딸인 김길자씨가 소리를 이어가고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김병하의 소리는 그의 어머니인 정옥선씨부터 이어졌고 그의 소리를 다시 딸이 이어받고 있으니 대를 이어 소리 물림을 하는 셈이다.

아! 어쩔 것이냐. 강을 따르자면 지금 걷고 있는 길을 가야겠지만 마음은 뱅뱅이재를 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뱅뱅이재는 조양강이 굽이져 광하리를 지나 동강으로 흘러가는 귤암리로 질러서 내려가는 길이니 강으로 가는 옛길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내가 그곳으로 가지 않는 까닭은 고갯마루에 서면 나의 게으름이 한 발짝도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곡리에서 덕송리로 이어지는 강을 걸어 정선을 찾은 이들아. 다른 곳 마다하고 반드시 뱅뱅이재에 올라라. 그리곤 스스로를 놓아 버린 채 망연히 강과 하늘과 산을 바라보라. 풍경과 하나가 되려고 꿈틀거리는 자신을 느낄 수 있으리라.

또 하나의 그리움만 남겨 놓은 채 벼랑을 따라 이어지는 강 길을 따라서 용탄으로 향한다. 영조 45년인 1769년 정선군수가 주민들 간의 화합을 노래한 계민시(戒民詩)를 새겨 놓은 송정암(訟停암)을 지나자 봉양6리 오리장 마을 앞이다. 강은 강이건만 물이 흐르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양 큼지막한 바위들이 강바닥에 박혀 있다. 그것도 여간 큰 것이 아니다. 저 바위 사이로 뗏목이 지나갔으리라고 짐작하기 쉽지 않지만 뗏목은 너울거리며 잘도 지나갔다고 하니 떼꾼들의 솜씨가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봉양여울을 무사히 빠져 나간 떼꾼들은 바로 이웃한 진포리의 주막에서 숨을 돌리며 여장을 풀었으니 지금 매운탕을 파는 식당 언저리가 그곳이다.

강 건너로 42번 국도의 솔치재를 바라보며 세대마을을 지나는데 가을걷이를 마친 논이 휑하다. 세대마을은 논농사를 제법 크게 하는 마을이어서 벼가 익을 무렵 솔치재에서 바라보면 강과 어우러진 정경이 매우 유혹적인 마을이기도 하다. 십 오년도 넘었던 즈음, 내가 비포장이었던 이곳으로 기를 쓰고 찾아 들었던 것도 순전히 그 아름다운 정경에 홀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길만 달라졌을 뿐 별반 다를 것 없이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면 석탄을 캐내는 탄전이 있어 언제나 거뭇했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도 없이 말끔해져 오히려 탄광의 추억이 머쓱해지고 만다.

두어 굽이를 돌아들면 이내 용탄이며 가리왕산 휴양림으로 가는 길과 맞닥뜨린다. 범여울을 지나고 노미마을을 지나 광하리로 강을 따라 가야하지만 발길은 자꾸 머뭇거리고 눈길은 먼 산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예닐곱 해 전 걸어서 넘은 성마령이 궁금한 것이다. 그 길은 평창에서 정선으로 오가던 길, 정선에 오려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었지 않은가. 지금은 평창군 미탄면에서 하늘재라 불리는 마전치를 넘어 조양강을 건너고 다시 솔치재 마루에 올라서면 정선은 그 얼굴을 슬쩍 보여 주지만 예전에는 성마령을 넘어 지금 걸어 온 강을 따라 관음베루를 돌아들어 정선읍으로 향했다.

성마령은 미탄면 평안리 본동마을에서부터 정선읍 용탄리의 행매동까지 이십 오리 남짓한 고갯길을 말하는 것으로 높이는 960m이다. 대관령이 830m남짓하니 대략 짐작이 될 것이다. 그 고개가 하도 높아 하늘의 별과 맞닿을 지경이었으니 이름조차 그리 되었으리라.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재(松齋) 이우(1469~1517)가 쓴 ‘관동행록’에 성마령이라는 시가 남았다. 그는 늦은 가을의 해거름에 고개를 넘었던 모양인지 “평창 동쪽에 큰 고개가 솟았는데 / 고갯마루에서 가히 별을 만질 수가 있구나. / 말발굽은 소나무 가지 끝을 타고 오르고 / 하늘의 은하수는 계류와 같이 뻗쳤도다. / 바람에 시달린 나무는 일찌감치 잎을 떨구고 / 구름과 맞닿아 눈보라조차 덮어썼구나. / 골짜기에는 해거름인가 하면 어느덧 밤이 닥치고 / 고개 돌려 바라보니 걸어 온 길이 아득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성마령도 못 본 듯 지나치고 만다. 범여울을 돌아들면 강을 따라 노미마을로 가는 길이건만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 탓에 마을 언저리까지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와 광하리로 내달았다. 하늘재로 향하는 42번 국도 위에서 광하교를 건너기 전 강을 따라 들어섰다. 예전에는 그랬다. 이곳에만 들어서면 번잡한 기운은 사라지고 드물게 안겨보던 아버지 품처럼 든든했으며 기운이 넘쳐나곤 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이제 들어 선 이 길에 대한 추억 또한 가물거리기는 매 한가지이다.

흙먼지 폴폴 일던 이 길에 들어서면 지천으로 늘어 선 고추밭을 지나 아주 먼 곳으로 가는 듯 아득했다. 강이 끝닿는 곳, 그곳까지 말이다.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귤암리를 지나 가수리까지 들어서면 걸음을 멈추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누군들 이 길에 들어서서 수미마을을 쉽사리 지나칠 수 있을까. 가을이면 하늘빛이 배어든 물빛은 아름다우며 분교 마당의 느티나무가 물들어가는 정경을 모른 체하고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그리 많지 않으리라.

가수리 또한 귤암리와 마찬가지로 정선에서 산으로 들어오는 길이 있으니 너투니재라는 것이다. 정선까지 30리나 된다지만 나는 그 길을 걸어 보지는 못했다. 그 길을 찾으려고 분교 뒤로 몇 차례나 올랐지만 가뭇없이 사라진 길을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은 하필이면 내려 선 길이 사북 고한에서 가수리로 흘러오는 동남천 물줄기였다.

내친걸음을 쉬지 않고 걸어 다다른 곳은 광덕리였으며 두어 집 정도가 살던 그 마을에서 남면 낙동리로 걸어 나오면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덧 군데의 외나무다리를 건넌 것도 처음이었지만 황소와 함께 20m나 되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본 것이었다.

비록 십 오년 전이긴 하지만 그와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것은 지금 가고 있는 이 강이 빚어놓은 마을들이 얼마나 깊은 오지였던가를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지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