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걷다](17) 어라연· 청령포
[한강을 걷다](17) 어라연· 청령포 | ||||||
입력: 2006년 11월 17일 16:24:15 | ||||||
온통 찌푸린 하늘을 이고 있는 새벽, 너무도 달라져 버린 문산 마을을 떠나 강기슭을 걸었다. 어라연(魚羅淵)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두어 시간 남짓한 이 길을 수십 번도 더 걸었다. 산철쭉이 무리지어 반기고 동강 할미꽃이 흐드러지던 어느 해의 봄을 이곳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였다. 무덤덤하고 심드렁한 풍경, 끝없이 이어지지만 자극이 없는 강을 따라 개죽이 여울까지 걷는 동안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토록 익숙한 길이었건만 문득 처음 맞닥뜨린 길처럼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당연히 걸음은 더뎠지만 오히려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을 외면해 버린 것이다. 마음 속에 분란이 일어났으니 도무지 걸음이 경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낯설다는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나에게 낯설다는 것은 몹시 매력적이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 모두 말이다. 일순 두려움이나 경계심이 앞서 그와 맞닥뜨리면 머뭇거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익숙함 뒤로 밀쳐놓거나 포기하지는 않는다. 익숙한 것들이 아름답다면 낯선 것은 눈부시며 혹은 그 반대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보다 분명한 것은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낯선 것들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물이란 지나친 것은 있으되 크고 작거나 모자라는 것은 없는 법이다. 비록 그 선물이 나에게 금방 소용에 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길 위에서 받는 선물은 결코 허튼 마음으로 받아서는 안된다. 그 모든 것은 소중하며 귀한 것이다. 적어도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래야 한다. 풍경을 만나면 그에게 반응하고 사람을 만나면 그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또한 아무리 사소한 문화이거나 역사일지라도 흘깃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길 위로 나서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할뿐더러 누려야 할 특권이기도 하다. 언제나 그랬다. 길 위에는 쓰다 남은 헝겊조각처럼 무수한 것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널려 있게 마련이다. 길 위를 걷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만나는 그것들을 하나 둘씩 꿰매는 재봉사여야 한다. 그래야만 오롯한 자신만의 길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바느질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이 지닌 깜냥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과 낯선 것들을 따로 무리지어 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질서정연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넘쳐나는 편협성이 엿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야 하며 굳이 나눌 까닭이 없는 것이다. 어제 나의 누더기에 덧댄 헝겊조각은 안개 속에서 바라보던 옅은 에메랄드빛을 띠었다면 오늘은 머리 위에 무겁게 내려 깔린 하늘빛만큼이나 짙은 회색이지 싶다. 지금은 그 둘이 서로 성긴 모습으로 모나 보일지라도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우러질 것이다. 강의 굽이와 여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산과 어울려 있듯이 말이다. 생각에 잠긴 채 한 시간이나 걸었을까. 두꺼비 바위를 에돌자 어라연의 삼선암(三仙巖)이 눈앞에 어엿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러나 나는 머물지 않고 산으로 올랐다. 여태 강을 따라 걸었으니 그 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기신기신 낙엽으로 가득 찬 길을 걸어 잣봉으로 오르자 웅장하기만 했던 삼선암은 주먹만 하게 보일 뿐이었다. 여태껏 유장한 흐름으로 곁을 흘러가던 강 또한 가녀린 한 가닥의 물줄기일 뿐이다. 아무리 바라봐도 여태 걸어 온 강과 다를 바 없으며 그저 불거진 큰 바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왜 이곳 어라연이 동강을 대표하는 아름다움이라며 인구에 회자되는 것일까. 그것은 물빛 고운 무덤덤한 강과 투박하며 거뭇한 바위가 서로 몸을 부비며 살갑게 있기 때문이다. 어우러진 것이다. 그렇지만 어라연만 뚝 떼어 놓고 보면 아무리 그들이 서로 어울려 있다 하더라도 기대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심드렁할 뿐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어라연의 아름다움에 반응하려면 반드시 무덤덤한 강을 지나와야 한다. 마음 속에 무료함이 극에 달할 즈음 맞닥뜨리는 어라연의 정경은 그 지루함과 무료함을 한순간에 날려버릴 만큼 특별하다. 어라연을 두고 선경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은 그 스스로 지닌 특별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강을 걸어오며 무료함에 지친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여울만 바라보던 사람은 그 물살의 거침을 짐작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여울은 거울과 같이 맑고 고요한 담(潭)이나 소(沼)가 있어야 존재감이 생기며 서로 돋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풍경에 대한 편식은 심해져 간다. 무덤덤하여 자극적이지 않은 풍경은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는 편협함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하는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의 가장 좋은 핑곗거리인 바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지만 생각해봐라. 네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잣봉에서 다시 어라연으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된꼬까리 여울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를 듣거나 먼 강을 바라보며 능선 길을 걸어 마차 마을을 지나고 거운리 섭새강변에서 다시 강을 만났다. 그렇지만 걷지는 않았다. 흐린 날씨에 눅진해진 몸을 쉬고 싶었던 까닭이다. 버스를 타고 영월읍으로 나가는 동안 해는 저물고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한 시내에 다다라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숙소를 찾아 기진맥진한 몸을 쉬었다. 또 다시 새벽, 동강의 끝자락에 있는 금강정(錦江亭)에 들렀다가 서강 언저리의 청령포(淸령浦)에 다다라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두터운 구름 사이로 기어코 햇살은 비추지 않았다. 오히려 서리마저 내린 찬 날씨에 곱은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야 했으니 물안개가 뭉실뭉실 피어나는 강 너머 청령포를 바라보며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된 단종(端宗·1441~1457)이 지은 시 한 수를 되뇔 뿐이었다. “원통한 새 한 마리 궁중에서 나온 뒤로 / 외로운 몸 짝 잃은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누나. / 밤마다 잠청해도 잠들 길 바이없고 / 해마다 한을 끝내려 애를 써도 끝없는 한이로세. / 울음소리 새벽 산에 끊어지면 그믐달이 비추고 / 봄 골짝에 토한 피가 흘러 꽃 붉게 떨어지는구나. / 하늘은 귀 먹어서 저 하소연 못 듣는데 / 어쩌다 서러운 이 몸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이 시는 자규시(子規詩)이다. 궁중에서 나온 한 마리 원통한 새는 자규, 곧 두견새를 일컬으며 단종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저 애달플 뿐 어찌 내가 그 옛날 단종의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다만 푸른 새벽기운을 덮어쓴 채 눈앞에 펼쳐진 청령포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머물던 곳이다. 앞으로는 서강이 휘감아 돌고 뒤로는 톱날 같은 봉우리 여섯 개가 삐죽 솟아 육륙봉(六六峯)이라고 부르는 도산(刀山)이 곧추 서 있어 아무리 둘러봐도 빠져 나갈 곳이 없다. 다만 공간이 넓다 뿐이지 외부와 차단된 것은 위리안치(圍籬安置) 정도가 아니라 가극(加棘)안치보다 더 혹독한 유배지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단종은 세조 3년인 1457년 6월22일, 첨지인 어득해(魚得海)와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과 내시부사(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 그리고 군사 50명의 호송 아래 서울 화양동의 강기슭에 세워진 화양정(華陽亭)을 떠나 영월로 향했다. 화양정 아래의 나루에서 여주의 이포나루까지는 뱃길을 이용했으며 여주의 대신면을 지나 문막, 원주, 주천을 거쳐 6월28일에 청령포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해 10월24일, 단종은 사약을 받고 승하하고 말았으니 그날의 기록은 ‘연려실기술’의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조에 자세하게 남았는데 다음과 같다.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진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 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다시 동강 끝자락의 금강정으로 돌아왔다. 그 앞에 낙화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던 것을 무심히 지나쳤기 때문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저 동강 위로 어린 왕의 죽음을 슬퍼한 이들이 앞 다투어 뛰어내렸다니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이지누〉 |
[한강을 걷다]잣봉 오르면 어라연 오롯이 |
입력: 2006년 11월 17일 16:24:07 |
지난주에 지나온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의 진탄나루에서부터 영월읍 문산리를 거쳐 거운리의 섭새강변까지 이어지는 강 길은 무작정 걸어보는 것이 좋다.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길이어서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거운리에 다다를 무렵 어라연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방향으로 행로를 잡던지 하루면 너끈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문산리나 거운리는 영월읍에서 버스가 다니므로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다.
어라연은 말 그대로 풀면 물고기들이 비단결같이 노니는 못이다. 그만큼 물이 맑았으며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것이지 싶다. 강물 가운데 큰 바위가 셋이 솟아 있는데 신선들이 내려와 놀았다고 해서 삼선암(三仙巖)이라고도 한다.
잣봉(537m)은 얕은 봉우리로 어라연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훌륭한 곳이다. 대개 거운리의 봉래초등학교 거운분교 앞에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비포장 길을 걷기 시작하여 마차 마을에 다다르기까지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마차마을에서 가파른 길을 십분 정도 오르면 능선에 다다르고 그곳에서부터 강이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인다. 정상을 100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시야가 터지며 어라연과 된꼬까리 여울이 보인다. 잣봉에서 올라간 길을 되돌아 내려오거나 아예 어라연으로 내려가 강을 따라 돌아올 수도 있다.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를 모시던 신하들이 뛰어 내렸다는 낙화암이 있는 금강정은 영월읍에 있다. 섭새에서 영월읍으로 나가다 보면 삼옥리를 지나 마지막 강마을인 저새마을이 건너다보인다. 저새마을을 에돌아 영월읍을 바라보며 우회전하면 강 건너에 곧추 선 벼랑과 작은 정자가 보인다. 올라가는 길은 동강 1교를 건너서 오른쪽에 KBS팻말을 따라가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청령포 가는 길은 영월읍내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읍내에서 대략 5분 이내면 도착할 수 있으며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소나무 숲이 매력적이며 단종이 머물렀다는 어가를 복원해 놓았으며 청포금표비(淸浦禁標碑), 단종유지비(端宗遺址碑), 관음송(觀音松), 노산대(魯山臺), 망향탑(望鄕塔)과 같은 유적들이 있다.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또한 읍내에서 5분 거리이며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이지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