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을 걷다](18) 온달산성·향산리삼층석탑·적성산성

동봉 2007. 8. 4. 10:56

[한강을 걷다](18) 온달산성·향산리삼층석탑·적성산성
입력: 2006년 11월 24일 16:00:10
-강을 휘감는 택당의 절절한 효성-

온달산성 남문에 서면 산성과 영춘 그리고 남한강이 감돌아 나가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은 사진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흘러 나간다.

그동안 힘겹게 걸었던 것에 대한 반감일까. 동강과 서강이 만나 큰물을 이루고 비로소 남한강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월읍의 덕포를 보는둥 마는둥 곁눈질로 지나쳤다. 덕포는 지금껏 걸어온 동강의 험한 골짜기를 빠져 나온 자그마한 골안떼가 몸을 풀고 다시 더욱 큰 규모의 강떼로 엮어지던 곳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텅 비어 황량하기만 한 들판을 가로지르는 물줄기가 옹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늦은 오후 햇살에 빛나며 영화로웠던 옛일을 추억하는 듯 흔들리던 억새마저 없었다면 나는 아련히 번져오는 쓸쓸함을 안고 영월을 떠나야 했으리라.

해거름에 하동면 와석골의 난고(蘭皐) 김병연 유적지를 에돌아 곤한 몸을 누인 곳은 단양군의 영춘면이었다. 새벽 기온은 거침없이 영하로 곤두박질쳤으며 무서리가 하얗게 뒤덮은 산길을 걸어 다다른 곳은 온달산성이다. 성을 한 바퀴 돌아 남문 근처를 서성이며 바라보는 소백산은 해끄무레하게 눈을 덮어썼고 이제 막 동살이 비쳐들기 시작한 구봉팔문(九峰八門)은 더욱 겹겹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봉우리와 골짜기를 넘나드는 햇살의 유희는 섬세한 실내악처럼 감미롭게 이어졌고 돌아서면 남한강의 유장한 물줄기가 웅장한 교향곡처럼 영춘면을 감돌아 흐르고 있었다.

라르고의 선율처럼 침잠한 새벽에 성산(城山)의 산성을 거닐면서 내가 생각에 잠긴 것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이나 신라의 북진정책에 따른 한강 수계의 쟁패에 대한 거창한 역사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한 눈에도 한강을 휘어잡을 수 있을 만치 목이 좋은 곳은 분명하건만 오늘은 애써 모른 체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엉뚱하게도 비록 자신은 남루할지언정 밥을 빌어서라도 눈 먼 어머니를 봉양했다는 온달의 지극한 효성에 빗대어 조선 중기의 탁월한 문장가였던 택당(澤堂) 이식의 감동적인 어머니 사랑을 떠올리고 있었을 뿐이다.

택당은 1637년 봄날, 이곳 영춘의 어느 골짜기로 찾아들었다.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해는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었던 즈음이었다. 택당 또한 남한산성에서 왕을 모시고 있었으나 1월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할 때에 함께 나가지 않은 채 성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순전히 어머니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그는 ‘정축년 봄, 영춘에서 대죄하며 올린 소’(丁丑春在永春待罪疏)라는 글에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근무태만에 더해서 근무지로부터의 무단이탈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것도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계획된 것이었으니 스스로 죄를 고하며 벌을 기다리는 글을 올린 것이다.

보물 405호인 향산리 삼층석탑.
그는 1637년 1월6일, 아우인 재(材)와 아들인 면(冕) 그리고 단(端)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피신하라는 것이었다. 잠깐 그 내용을 보면 “어머니께서 이 몸을 위급하게 여긴 나머지 필시 당신의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계실 테니, 너희들이 안심하시도록 충분히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이다. 날씨가 차츰 따뜻해지고 있으니, 아무쪼록 잘 보호해 모시고 제천과 영춘 사이로 방향을 돌려 길을 떠나되,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는 곳 가운데 가장 외진 곳을 찾아서 안정할 계책을 세우도록 하라”고 했는가 하면 말미에는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목숨을 바치기로 평소에 벌써 작정해 두고 있었다. … 그러니 어버이를 사모하는 한 생각만 없다면, 나의 가슴속에 다른 고통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다.

곧 그는 나라와 부모를 동격에 두었으나 그가 최후에 택한 것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갇힌 신세이면서도 어머니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던 택당은 기어코 산성을 몰래 빠져나와 사흘을 걸어서 경기도 지평의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당부대로 어머니는 이미 길을 떠났으며 생존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한 번 나선 걸음을 멈출 길 없어 내처 영춘의 심산유곡까지 달려가 어머니를 만났던 것이다.

어머니를 만난 당시의 모습을 택당은 “노모가 홀로, 병든 며느리 하나를 데리고 외딴 벽지에 죽은 듯이 숨어 있다가 신을 만나게 되자 부둥켜안고 오열하면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어미 곁을 떠나지 말고 있다가 죽고 난 뒤의 일을 처리해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차마 그 자리에서 결별하고 떠나지 못한 채 하늘을 우러러 가슴만 칠 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나랏일을 소홀히 한 죄로 자신의 벼슬을 모두 내놓을 테니 다만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는 기회만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가슴 뭉클해지는 감동이었다. 그토록 지극한 효성에도 불구하고 그해 7월에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세상천지 부모님을 공경하여 잘못되는 일이 있을까. 택당 또한 그 후에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지만 가뜩이나 쇠약한 몸에 어머니의 여묘(廬墓)살이를 하며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1647년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택당이 어머니를 만난 영춘의 심산유곡은 어디쯤일까. 구봉팔문이 첩첩하게 우뚝 솟은 저 골짜기 어디일까. 아니면 다리 건너 굽이굽이 베틀재를 휘돌아 닿는 소백산 자락 의풍리 어디일까. 궁금함을 뒤로한 채 산성을 내려오니 뚝딱거리는 망치소리며 콰르릉거리는 중장비 소리가 뒤섞여 시끌벅적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세트장을 짓는 것이다.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금 머물다 내려 온 성산의 고성(古城)이 온달산성이라는 것은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 뿐 역사적 사실로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 않은가. 학계에서조차 설왕설래하는 사실을 기정사실화시켜 고구려의 역사적 내용을 담은 드라마 세트장을 산성 아래에 짓는다는 것은 마뜩치 않은 일이다.

지자체에서는 드라마 세트장만 지으면 그것이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하는 줄 알지만 이미 식상하여 더 이상 유효성이 없는 일인 것이다. 결국 드라마 촬영 당사자들만 꿩 먹고 알까지 먹는 일인 줄 왜 미루어 짐작하지 못하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그것이 기업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면 모르겠으되 지자체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그런 하찮은 일에 낭비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일들이 역사적 장소의 분위기조차 망가뜨리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공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제 더 이상 호젓하게 온달의 이야기를 떠 올리며 산성으로 오르는 일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온달이 파수를 세워서 마을 이름이 군간(軍看)이 되었다는 군간리를 지나 늪실마을로 들어섰다. 일대는 견지낚시가 소문난 곳이어서인지 강태공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드문드문 강 가운데에서 낚시에 열중이다. 가을이면 억새가 강변을 뒤덮는 늪실마을과 잇닿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에는 단아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발길을 붙든다. 한눈에도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임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절집이 있었던 자리에는 여염집들이 들어서 옛 모습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신라의 19대 왕인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신라로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墨胡子)가 절을 세우고 향산사(香山寺)라 했으며 그가 열반한 후 부도를 이곳에 세웠다고는 하지만 뚜렷한 것은 알 길이 없다. 묵호자가 향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이니 향산이라는 이름은 이해할 수 있으나 석탑의 양식은 통일신라 하대의 것으로 그가 생존해 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적성산성

단양읍을 휘돌면 도담삼봉이 지척이지만 내처 단성면으로 향했다. 그곳에 적성산성(赤城山城)이 있을 뿐 더러 신라의 한강유역에로의 진출과 승전을 알리는 내용을 담은 신라적성비(新羅赤城碑)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석의 내용을 ‘한국고대금석문’을 참고로 풀어 보면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단양의 적성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이후에 이사부지(伊史夫智)를 비롯한 대중(大衆)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등이 회의를 열어 공을 세운 현지인들에게 포상하기로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더욱 구체적으로는 왕명(王命)의 형식으로 현지인 야이차(也이次) 등에게 전사법(佃舍法) 등에 따라 상을 내린다는 것이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히 단정할 수 없지만 진흥왕 즉위년인 540년으로부터 신라가 한강유역에 진출한 시기인 551년 사이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비각에서 내려와 성곽에 오르자 에메랄드빛 강물이 아련히 흘러가고 있었다. 턱을 괴고 앉아 새벽에 오른 온달산성이라고 부르는 성산고성이나 얼마 전 오른 동강의 고성리 산성을 떠올렸다. 그들이 머금고 있는 이야기는 고구려이지만 실증적 사실로 가지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강을 따라 이어지는 향산리에는 묵호자의 이야기가 향기처럼 배어있고 이곳 적성산성은 고구려 땅이었던 것을 신라가 빼앗은 것이니 미루어 짐작해 강물 위를 떠도는 온달의 이야기며 고구려의 이야기들을 믿기로 했다. 어느덧 해거름이 가까워지자 종일 맑았던 날이 흐렸지만 도담삼봉으로 내달렸다. 내일 새벽에 다시 만날 것이지만 어둠에 잠겨가는 모습 또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지누〉

[한강을 걷다]온달산성은 성산 정상에
입력: 2006년 11월 24일 15:59:56

영월읍의 덕포나루는 동강대교나 영월대교를 태백방면이나 고씨굴 방면으로 건너면서 보이는 오른쪽 강이다. 단양군 영춘면은 덕포에서 고씨굴 이정표를 따라 88번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고씨굴을 지나자마자 각동교가 나오면 다리를 건너 595번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30분 남짓, 북벽교를 건너게 되는데 그 일대가 깎아지른 절벽이 장중미를 더하는 북벽(北壁)이다. 온달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 정상 부분에 있으며 나라 안에서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산성 중 하나이다. 사적 264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682m에 불과한 아주 작은 성이다.

온달동굴이 있는 온달국민관광지의 주차장에서부터 30분 남짓 오르면 성에 닿을 수 있지만 가파른 길이다. 중간쯤 오르면 시멘트로 만들어 놓은 정자가 하나 있는데 사모정(思慕亭)이다. 전사한 온달의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 장사를 치를 수 없게 되자 평강공주가 달래어 떠나보냈다는 곳이다. 구봉팔문은 성에 올라 가장 높은 곳에서 뒤로 보이는 첩첩한 산중을 일컫는다. 그곳에 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가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가 소백산이다.

보물 405호인 향산리 삼층석탑은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471-1에 있으며 국도에서 100m남짓 떨어진 마을 가운데에 있다. 1층 몸돌에는 문비가 잘 남아 있으며 전체 비례가 알맞아 아름답다. 1935년에 도굴꾼들이 무너뜨린 것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향산리에서 단양읍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성재산에 있는 적성산성은 단양읍에서 5번 국도를 따라 중앙고속도로 단양IC방면으로 가다가 단양1교를 건너 36번 도로로 접어들면 만나는 단성면에 있다. 허름한 단성농협 건물이 있는 곳에 이정표가 있으며 올라가는 길은 아주 가파르지만 자동차가 올라갈 수 있다.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에서도 산성과 적성비로 갈 수 있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성은 주차장에서도 잘 보이며 전체 길이는 932m이다. 영토 확장을 기념한 척경비(拓境碑)의 성격을 지닌 신라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되었으며 윗부분은 파손된 상태이다. 글씨 또한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거나 깨진 곳이 많아 판독이 쉽지 않지만 눈여겨보면 적성(赤城)이라는 글씨를 찾을 수 있다.

〈이지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