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선린외교 꽃피운 통신사는 `원조 한류`
동봉
2007. 10. 18. 08:40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왕이 일본 에도(江戶) 막부(幕府.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將軍)에 파견한 공식 외교사절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만인 1607년(선조 40년)부터 1811년(순조 11년)까지 모두 12차례 파견됐다. 이 중 1636년, 1643년, 1655년 세 차례는 에도(지금의 도쿄)를 거쳐 도치기현 닛코까지 방문했다. 조선통신사 400주년을 맞아 닛코에서 조.일 선린외교의 자취를 둘러봤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임진왜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화친 제의에 의해 길이 열렸다. 1603년 에도 막부를 연 도쿠가와는 전국시대 전란에 지친 일본에 평화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가 통치 이념으로 도입한 주자학의 영향이 컸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도쿠가와는 전쟁 모델을 평화 모델로 바꾼 사람"이라며 "그가 일본에 주자학을 들여와 패도를 문치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이 과정에서 조선통신사는 일본에 파견된 문화사절단으로서 도쿠가와 통치 이념에 힘을 실어주는 연료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일본과의 평화적인 전후 처리를 위해 조선에서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은 사명대사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인 1593년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평양성 탈환 작전에 참가해 공을 세운 인물이다. 1594년부터 1597년 사이에는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을 직접 찾아가 네 차례나 강화 담판을 벌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을 받아 일본 교토(京都)로 갔다. 1605년 교토 후시미(伏見)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전후 처리 문제와 강화회담을 하고 국교 회복과 조선인 포로 송환, 통신사 파견 등의 길을 열었다. 그 후 에도시대 260여 년간 12회에 걸친 통신사 파견으로 양국 간의 친선과 문화 교류는 꽃을 피웠다. 통신사의 주임무는 왕의 국서를 전하는 것이었지만 양국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원조 한류'의 역할도 했다. 그래서 통신사는 양국의 문화.문물 교류를 이끌어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3국의 평화 공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전 장관은 "조선통신사는 260년 동안 일본에 평화를 유지하게 해 준 한류였다"고 말했다. 닛코시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해 연말까지 통신사가 묵었던 숙소 터에 안내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이토 후미오 (藤文夫) 닛코시장은 "통신사 400주년을 기념해 올해 시와 상공회의소에서 여행단을 모집, 12월 한국을 방문한다"며 "조상들의 선린 교류를 본받아 우리들도 양국 교류를 늘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불꽃놀이를 지켜본 데라자키 다이스케(寺岐大輔.회사원)는 "통신사의 취지를 살려 두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학생 교류를 늘리자고 주장하고 싶다"며 "학생들이 홈스테이 등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는 도치기TV가 초대한 한국 고교생 6명과 교사 2명도 참석했다. 이들은 하코네에서 닛코까지 통신사가 올라온 길의 일부분을 따라 올라오면서 통신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닛코(일본 도치기현)=박경덕 기자 |
도쇼구에는 도쿠가와의 무덤도 있다. 그는 원래 시즈오카현에 묻혔으나 1년 뒤 도쇼구로 이장됐다. 임진왜란 후 조.일 선린외교의 길을 연 도쿠가와 사당에 있는 범종은 양국간 우호 관계의 기념비적인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닛코시 남쪽에는 수령 200~300년짜리 삼나무 가로수 길이 조성돼 있다. 길 좌우에 키 50m가 넘는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37㎞나 늘어서 있다. 닛코시와 레이헤이시, 아이즈니시 3개 도시를 관통하는 이 길은 기네스북에도 최장 삼나무 가로수 길로 등재돼 있다. 도쿠가와의 충신인 마쓰다이라 마사쓰나가 20여 년 동안 심어 도쇼구에 기증했다. 특별사적 외에 특별 천연기념물로도 등록돼 있는 일본의 자랑거리다. 에도시대 초기에 조성한 이 길은 쇼군이 도쇼구를 참배하러 올 때 이용했던 것인데 조선통신사도 이 길로 도쇼구까지 갔다. 길 양쪽에 늘어선 1만3300그루의 삼나무는 웅장한 모습으로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신사 일행의 최종 목적지인 도쇼구에 거의 다다른 지점이어서 수백 년 전 선린외교를 위해 수천리 길을 달려온 사절단의 피곤한 발걸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닛코=박경덕 기자 |
"나는 임진년에 간토(關東)에 있었고, 전쟁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나의 군사들은 바다를 건너가지 않았다. 조선과 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다. 나를 적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도쿠가와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 1390명을 사명대사의 귀국길에 함께 돌려보내 자신의 화친 의지를 실천해 보였다. 조선이 국교 회복과 통신사 파견을 결정한 것은 이러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였다. "우리나라가 일본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지만, 도쿠가와가 국권을 잡은 뒤 여러 차례 강화를 요청해 오고 지난 잘못을 고치겠다고 하므로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답하는 것이다." 400년 전 6월 10일 첫 조선통신사 여우길 일행이 에도에 도착한 뒤 일본 측과의 회담에서 한 말이다(당시 부사였던 경섬의 '해사록'). 조선이 보낸 사절단의 정식 명칭은 1624년까지 세 차례는 '통신사'가 아닌 '회답 겸 쇄환(刷還)사'였다. 도쿠가와의 화친 제의에 대한 답변을 전하는 '회답' 임무와 함께 임진왜란 때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을 데려오는 '쇄환' 임무를 맡긴 것이다. 1607년 첫 통신사 여우길은 1418명을, 1614년 두 번째 통신사 오윤겸은 321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일본 측은 "붙잡혀 온 사람들 가운데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속히 돌아가게 해 주라는 것이 쇼군의 엄명"이라고 공식 서한에서 밝혔다. 통신사 파견은 1811년까지 12차례 계속됐다. 때로 의견 차이를 빚기도 했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두 나라의 신뢰 관계는 깊어져 갔다. 덕분에 문화 교류와 교역도 활발해졌다. 그 출발점은 도쿠가와와 조선 조정 간의 '전후 처리' 외교였다. 박경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