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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영> <이산> <왕과 나> 속 선·악 캐릭터

동봉 2007. 11. 25. 17:28

착하지만 고지식한 주인공 VS 나쁘지만 이유있는 악역
<대조영> <이산> <왕과 나> 속 선·악 캐릭터
이준목 (seaoflee)

사극을 보면서 가끔씩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과도한 영웅주의나 선악의 이분적인 구분에 있다.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위하여 필요한 설정이라고는 해도, 주인공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선’을 유지하는 반면, 주인공에 반하는 세력들은 무조건적인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주몽>이나 <연개소문>, <대조영>, <태왕사신기> 같은 최근의 고구려 사극들은 이런 성향이 특히 강하다. 역사적 특성상 민족주의 성향이 강할 수밖에 없는 사극에서 자국의 영웅들을 ‘띄우는’ 것이야 굳이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일본 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이나 <요시츠네>, <대망>같은 작품들이나, 중국의 <무미랑전기>,<설인귀전기>,<진왕 이세민>같은 작품들을 보다보면 자국의 영웅들을 미화 수준을 넘어 거의 신격화까지 치닫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간혹 그들의 역사적 설정들이 우리의 민족사와 맞닿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과도한 왜곡과 편견에 씁쓸함을 느끼는 순간도 적지않다.

어느 나라든 고유의 역사적 해석 방식과 이론이 있고, 드라마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극적 전개의 설득력에 있다. 단순히 다큐멘터리처럼 드라마 역시 실제 역사처럼 완벽한 고증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등장 인물이나 설정 등이 보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공감대를 제시할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항상 정의롭고 완벽하며,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나쁜 놈으로만 묘사하는 해석 방식은 단조롭고 유치하다.

사극에서의 이분법적 선악구도에 가장 매몰된 경향을 주는 예로 최근의 <대조영>을 꼽을수 있다. 이것은 주연배우 최수종의 열연과는 별개의 문제다. <대조영>은 그야말로 태어날때부터 ‘제왕지운’을 타고난 완벽한 인물로 묘사된다. 등장인물이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영웅으로 성장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기에 시련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설정이다.

극중 <대조영>은 그야말로 완벽한 바른생활 사나이다. 자신의 적까지도 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대의명분과 품위를 잃지않는 ‘폼생폼사’의 인물로 그려진다. 대조영이 부하들이나 적들 앞에서 계몽조의 일장연설을 뿜어내실 때는 예의 장중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배경에 깔린다. 대조영이라는 인물은 언제 어디서든 원리원칙을 따라야하고, ‘꼼수’를 쓰지않으며 매사 완벽한 성인군자처럼 그려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극적 전개를 현실적인 관점에서 지켜보다보면, 그런 대조영의 고지식함으로 인하여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마저도 위험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조영이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방식은 주변의 도움이나 행운에 의지한 경우가 많다. 대조영이라는 인물이 영웅스러울지는 몰라도, 드라마적 캐릭터로서는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그런가하면 대조영의 적대세력이자 라이벌이라고 할 만한 이해고는 어떨까. 거란족 출신으로 용장으로 역사적으로는 대조영과 함께 북방의 패권을 다투는 걸출한 영웅으로 설정된 이해고지만, 막상 드라마에서는 연적에 대한 과도한 질투심과 라이벌 의식에 사로잡힌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보인다.

드라마 초반부터 이해고의 모습은 독자적인 존재감보다는 연인인 초린에 대한 스토커적인 집착과 대조영에 의한 속좁은 견제의식으로만 일관하는 비정상적인 악역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대조영과 이해고의 극단적인 라이벌 관계는 마치, <주몽>에서 소서노의 연적관계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주몽- 대소의 라이벌 구도와도 유사하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생기있는 인물은 요즘들어 비중이 많이 줄어든 설인귀(이덕화)다. 설인귀는 배역상 역사적으로 고구려 멸망의 주역이었고, 고구려 부흥운동에 있어서도 끊임없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는 악역이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드라마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현실적이고 융통성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때 자신의 정적이었던 이문이나 이해고를 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라이벌인 대중상이나 대조영에게도 비록 적이지만 공명정대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나쁜놈’이어서 주인공과 싸우는게 아니라 서로 정치적인 입장과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싸운다는 점에서 극중 설인귀는 현실적인 악역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적으로 천문령 전투 이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설인귀는 드라마에서 벌써 퇴장했어야 하는 캐릭터다. 드라마의 인기와 더불어 극중에서는 아직도 살아있는 설인귀의 역할과 비중이 어정쩡해진 것이 <대조영>의 극적 재미가 떨어진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산>의 홍국영이나 <왕과 나>의 조치겸도 ‘이유있는 악역’이라는 점에서 선악구도에 치우친 사극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인물들이다.

극중 세손의 책사로 등장하는 홍국영은 역사적으로 정조의 왕위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일등공신이지만, 이후에는 지나친 독선과 전횡으로 세도정치를 펼치다가 오히려 정조에게 퇴출당하는 인물이다. 2001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홍국영>에서 김상경이 연기한 홍국영은, <이산>의 홍국영에 비해 오히려 정조 이산같은 모범적 영웅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극 전개상 지금은 주인공 편에 서 있기에 그의 활약상이 부각되고 있지만, 홍국영의 처세나 가치관은 흔히 이야기하는 정의로움과는 거리가 있다. 목적을 위해 때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거짓말과 꼼수도 주저하지않는 듯한 홍국영의 모습은, 극중 ‘절대선’과 개혁으로 상징되며 대의명분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정조 측인물들의 현실적 약점들을 보완해주는 ‘필요악’처럼 보인다.

<왕과 나>의 조치겸 역시 극의 큰 틀에서는 내시라는 집단의 정치적 이익과 입지 강화를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악역 혹은 간신에 가깝지만, 자신이 모시는 왕에 대한 충성이나, 자기 편에 한해서는 정의롭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인물이다.

실제 주인공이라 할 만한 김처선이 극적 전개에 있어서 아직까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도는무기력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조치겸은 때로는 잔혹하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과 목표를 위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로서 대중의 공감대를 자아낸다.

오늘날 드라마가 정말로 필요로하는 것은 막연히 완벽하고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영웅보다, 대중이 그 언행과 가치관에 대하여 공감할 수 있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대중들이 주인공보다 홍국영이나 설인귀같은 인물들에게 더 공감대를 느낄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