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되려면 재무 주치의부터
만나 보십시오”
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재테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틈타 자칭‘재테크 전문가’로 나서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재테크에 대한 관심만 넘쳐날 뿐, 경제에 대한 철학이 부족한 우리들에게 윤병철(70) 한국FP협회 회장은 이렇게 말한다.“돈은 네 발 달린 짐승이다. 두 발 달린 사람이 네 발 달린 짐승의 지배를 당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복권에 당첨된 벼락부자들 중 80%이상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조사결과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아무 준비 없이 엄청난 부를 얻은 졸부라든지, 운이 유별나게 좋아 단기간에 큰돈을 거머쥐게 된 일명 ‘재테크 행운아’ 들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의 이면에 숨겨진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돈 관리 전문가를 키워내기 위한 교육기관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국제공인 재무설계자격(CFP: Certified Financial Planner) 인증·교육기관인 한국FP협회는 2만2000명에 달하는 금융인들을 자산관리 전문가로 키워내고 있으며, 일반인들에게도 ‘돈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한국FP협회 윤병철 회장은 한국개발금융, 한국투자금융, 하나은행 등을 거치며 금융계 샐러리맨 생활 41년과 그 중 CEO 생활만 약 16년 동안 해오고 있는 금융계의 배테랑 원로이다. 하나은행장, 우리금융지주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지난 2000년 한국FP협회를 창립했다. 7월 10일, 마포에 자리한 한국FP협회 사무실로 윤병철 회장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재무설계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들어봤다.
금융계 40년 경력에 은행장과 금융지주회사 회장 등 최고경영자로서만 20년입니다. 재무설계라는 특정 분야에 열정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하나은행에서 물러난 직후 우리금융지주 회장으로 있으면서 금융 발전을 위해 진정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그간의 경험상 어떤 분야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금융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운용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키워내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키워내야 할까에 대한 답은 시대가 말해주더군요.
우리나라 경제력이 세계 10위라고 하지만 돈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은 형편없습니다.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얘깁니다. 금융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은행의 판매 창구에 열 명이 일을 했다면 이제는 같은 양의 일을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습니다. 특히 IMF 이후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금융 겸업화로 은행, 증권, 보험 상품을 한 군데서 취급하게 됐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금융 상품을 아우를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개인들의 재무설계를 해주고 그에 맞는 금융 상품 운용을 할 수 있도록 컨설팅해주는 파이낸셜플래너(FP)를 키워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례로 미국은 1960년대 이미 지금의 한국처럼 금융 겸업화가 진행됐습니다. 이때 금융 상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물론 윤리와 서비스 교육까지 철저히 받은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관련 자격과 교육 시스템이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각 금융기관에서 주도적으로 이러한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죠. 이런 이유로 한국FP협회를 만들고 CFP를 들여오게 된 것입니다.
FP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왜 필요한 걸까요? 기존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주십시오.
행복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FP는 이렇게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재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금융 상품을 판매하는 것과는 역할이 다릅니다.
FP가 도움을 주기 위해 고객에게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알고 나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또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FP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 즉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가정이 불안하면 사회가 불안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들이 돈이 많다는 것을 막연하게 부러워하기만 하죠.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각자 원하는 일과 목표가 다 다르기 때문에 필요한 돈도 그것을 위한 만큼이면 충분하다는 게 재무설계의 관점입니다. 때문에 가장 먼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재무설계의 시작입니다.
최근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인해 노후 설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FP의 역할은 더욱 폭넓어질 것 같은데요.
처음 재무설계의 개념을 국내에 도입할 당시에는 금융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데 무게를 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인들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재무설계의 필요성에 대해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개인들에 대한 사회보장제도가 낮은 수준이기 때문이지요. 미국의 경우 개인들에 대해 삼층 구조의 사회 안전망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먼저 일 단계로 국민연금과 같은 사회보장제도, 이 단계는 직장에서의 퇴직연금제도, 마지막 삼 단계는 개인들 각자 스스로가 미래를 대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 깊어 노후를 위한 재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이러한 삼층 구조가 훨씬 취약합니다. 국민연금은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예상되고 있고 퇴직연금제도도 아직까지 활성화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단계인 개인들의 재무설계에 대한 인식도 미국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안일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FP들은 많은 고객들과 만나면서 이러한 점을 각인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시작 단계이긴 하지만 한국FP협회는 무료 재무상담 컨설팅 행사 등을 개최해 일반인들에게 재무설계의 개념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기업들과 연계해서 그 직원들을 대상으로 재무설계 컨설팅과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책임져주지 못하는 부분을 개인들 스스로 챙길 수 있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재무설계 컨설팅을 진행하다보면 우리나라 일반 가정의 재무적인 문제들을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최고 기업이라 하는 한 대기업의 경우 17%가 신용불량자라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높은 소득을 올린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돈을 관리하는 능력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최근 제1금융권인 은행에서 서민층을 위한 소액 대출 사업을 시작했다고 관심을 끄는데 이런 노력으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재무적으로 고민이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돈을 대출해주는 것만으로는 절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애초에 돈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를 키워주는 게 더욱 시급한 문제일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돈을 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라는 점과 비슷한 이치일 것입니다.
최근 자산 시장에 대한 문제 중 부동산 시장에 대한 거품 논란도 있었는데, 만약 가까운 미래에 부동산 가격이 갑자기 내려간다거나 하면 가계 재정은 심각해질 것으로 우려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서울의 아파트값이 지나치게 높은 가격에 책정돼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판단하는 문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결국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거품이면 지금 당장 팔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계속 놔둬야 하는 것일까요?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야 현명한지 판단내리기 쉬워질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가계 운용 자산 비중을 보면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부동산에 몰려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는 개인들이 부동산에 좀 더 많은 자산을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 중에서 80%가 살고 있는 집이라고 하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동산이 은퇴생활을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는 자산이냐는 측면에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후 생활비를 위해서는 결국 현금이 필요한데, 부동산으로만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가 정작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고 자산 가치가 떨어진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최근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점점 바뀌고 있는 추세이긴 합니다. 저금리로 인해 펀드가 각광받고 있고 주식시장에 많은 개인들이 투자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가치 있는 기업을 키우고, 개인들의 자산도 늘어나는 등, 경제 선순환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펀드가 8000개를 넘어설 만큼 많고, 상장 기업이 1000개가 넘는데, 정말 가치 있는 기업을 선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일반인들에게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의사가 필요하고 법률적 고민이 있으면 변호사가 필요하듯 가계의 재정적 문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면‘재정 주치의’인 FP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층이 아닌 일반 대중들은 금융 자산을 운용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기가 쉽진 않은 것 같습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도 부자들을 관리하는 것보다 수익 면에서 덜 유리하기 때문에 관리비용에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현재 재무설계 전문가들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CFP는 1700명 정도이며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은 2만2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다수 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 금융권에서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더불어 최근에는 금융권에서 자신의 실력을 길러 독립적으로 재무 컨설팅 회사를 차렸거나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FP협회는 일반인들을 위해 무료 컨설팅을 점점 확대해나갈 계획입니다.
사실 미국도 재무설계가 정착되는 초기 단계에서 금융회사들은 상품 판매 독려를 위해 자격 취득을 권장했던 편입니다. 하지만 점차 성숙 단계에 이르면서 상품 판매자로서의 역할이 컸던 이 사람들이 자신만의 고객을 구축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고 있어 금융 소비자 입장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금융기관에서 상품 판매의 마케팅 수단으로 재무설계를 활용한다면 자사의 상품만을 팔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은 CFP 자격 취득자가 5만 명인데 이중 10%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중에 ‘아메리카 파이낸스’라는 재무 컨설팅 회사를 따로 차리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에서는 재무 컨설팅 수수료만을 수익 모델로 하는 회사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런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의 은행에선 은행 고객은 있지만 은행원 고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지요. 은행지점에서도 펀드 판매가 중요한 수익원이기 때문에 은행원들도 보험 설계사들처럼 자신의 얼굴을 보고 찾아오는 고객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독립계 회사의 경우에는 평생 고객을 만들겠다는 개념을 넘어서서 대를 이어 고객을 관리하겠다는 전문가들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관계입니다. 때문에 협회는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해 윤리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2년마다 계속 교육을 진행해 급변하는 금융환경에서 끊임없이 공부해야만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