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촌 美來村

미래촌생활강좌 제215강 080417(목) : 똥교회/김현수 목사(들꽃피는마을)

동봉 2008. 4. 18. 08:21

청소년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 없어 안타까워"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들꽃 피는 마을 김현수 목사

[ 2007-05-01 16:10:34 ]

공장이 많고 그래서 노동자도 많이 살고 있는 경기도 안산! 대학 다닐 때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구속 수감되기도 했던 피 끓는 나이의 개척교회 전도사는 94년 한 여름 새벽, 교회 지하실 한 구석에서 몰래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는 가출 청소년들을 만난다.

가정이 산산조각으로 찢어져 집을 나온 아이들, 약물 중독으로 신음하던 아이들이었다.아무리 쫓아도 가지 않고, 보호시설에 보내면 또 도망쳐 나오는, 아픔을 머금은 이 아이들은 김현수 목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유인물 대신 아이들을 봉고차에 싣고 구질구질 엉켜 사는 삶을 시작했다. 아파트에서 식구들과 같이 살기도 했다. 불량 청소년들 불러들인다고 동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가정을 꾸려 나갔다. 피만 섞이지 않았지 새로운 형태의 가정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을 다시 학교로 돌려보냈지만 복학이 불가능했다. 학교가 거부했다. 그래서 들꽃 피는 학교를 세웠다. 이제 13년이 흘렀다.

새로운 가정인 그룹 홈도 11가정이나 된다. 학교 건물도 지어졌다. 아이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귀한 존재들이다. 귀한 들꽃이다.

귀한 들꽃 하나하나를 보듬어 키우고 계신 들꽃 피는 마을의 촌장, 김현수 목사를 5월 1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다.

◇ 아이들의 안식처, 들꽃 피는 마을

▶ 들꽃 피는 마을에서 부르는 대안가정, 그룹 홈이라고 부릅니까?

=법률용어로는 공동생활가정이라고 하고 그룹 홈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이 되는 건가요?

=13년 전 교회지하실에서 아이들을 만난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지역에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기도 했습니다. 여자 아이 두 명은 집에서 데리고 살고 남자 아이 여섯 명은 교회에서 데리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한 집에서 살기는 하지만 가정의 모습은 되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거리에 살았던 아이들일수록 가정의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희와 같이 부모역할을 할 선생님이 필요한데 그분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13년 동안 많은 분들이 오신 거죠. 그래서 우리 들꽃 피는 마을은 어떤 시설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바로 삶의 과정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오시면 저희 아이들을, 옛말로 하자면 형제들을 분가시키는 것처럼 가정의 분가를 이뤘어요. 처음에는 월세 보증금 100만원에 10만원 하는 단칸방을 얻어서 시작하다가 두 칸짜리, 세 칸짜리로 옮기면서 자연스럽게 가정이 형성됐죠.

▶ 지금 11가정이 있다고 하셨는데 한 부모 가정만 있는 경우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남자 선생님이 있는 가정은 남자 아이들만 있고 여자 선생님이 있는 가정은 여자 아이들만 있는 거죠. 그런데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미혼이었던 선생님들이 결혼을 해서 부부가정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11가정 중에서 6가정이 엄마, 아빠가 되어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 아이들이 엄마, 아빠라고 부르나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데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요즘 아이들은 완전히 고아인 아이는 없습니다. 저희 들꽃 피는 마을에 아이들이 70명 정도가 있는데 한 10% 정도만 엄마, 아빠가 없고 나머지는 계세요.

▶ 그런데 왜 집을 나왔을까요?

=가정해체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게 바로 그런 겁니다. 저희 아이들의 공통점이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거예요. 엄마가 한두 살 때 집을 나가니까 아빠랑 살다가 아빠가 병들거나 술을 마시고 가정폭력을 휘두른다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아이들이 길거리로 나오게 되고 아니면 가정에서 분리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보호차원에서 쉼터나 그룹 홈으로 보내오는 거죠.

▶ 그러면 아이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친부모도 알고 있나요?

=거의 알고 있습니다. 설령 모른다고 해도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저희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지만 친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친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을 뿐더러 친부모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생님이나 목사님으로 부르게 하고 가끔 아이들이 엄마, 아빠 부르면 받아주기도 합니다.

▶ 지금 11가정에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나요?

=한 가정에 5~7명의 아이들과 부모역할을 하는 선생님, 이렇게 해서 많게는 10명 정도가 같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일 어린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고 제일 큰 아이가 19살입니다. 모두 10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 한 집에 7명씩 살다 보면 어느 가정에서나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말썽도 부리고 말 안 듣고 할 때도 많겠어요.

=한 마디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까 자체가 삶의 일상으로 자리를 잡더라고요. 그런 게 특별하다고 생각하기보다 아름다운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니까 아이들도 어느 가정에나 있는 거라고 받아들입니다.

▶ 가장 말 안 듣는 아이가 있나요?(웃음)

=그런 것보다도 교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아이들을 아침에 깨우는 겁니다. 아이들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아침에 깨우려고 하면 정말 힘들죠.

◇ 들꽃 마을을 돌보는 것은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아이들

▶ 다시 가출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저희 들꽃 마을에 왔다가도 자리를 못 잡고 다시 나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긴장하고 있어요. 거리 생활을 하고 버림받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들꽃 마을에서 다만 몇 개월을 있다 가더라도 정말 자신들을 사랑과 관심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보여줄 것인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거리의 생활이 몸에 밴 아이들은 적응을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리의 네온사인이나 유흥가의 불빛이 고향 같은 거예요. 그래서 다시 거리로 나가서 헤매고 중독 증세죠.

▶ 그런 독소를 빼 내려면 기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목사님과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이 들꽃 마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는 다른 아이들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선생님이 같이 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삶 속에서 공감하는 거죠. 97년도의 일인데, 들꽃 피는 마을에 와서도 말도 안 하고 마음의 문을 안 여는 13살짜리 아이가 있었어요. 원래 자폐증상이 있다고 올 때도 소개를 받았는데 3일 동안 한 마디도 안 하고 책상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더라고요. 그런데 3일째 되던 밤 3시 경에 눈을 떴는데 아이들 방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요. 우리는 식구가 많다 보니 문이 다 망가졌는데 살짝 보니 아이들이 새우깡 같은 과자들을 놓고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마음에 쌓아놓았던 분노들을 풀어내더라고요. ‘너희 아버지는 그렇게 때렸어? 그건 약과야. 나는 이렇게 맞았어.’ 서로 어울려서 말이죠. 보니까 그 녀석도 어울려서 얼굴이 핀 상태로 같이 얘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 아이도 마음이 풀리겠구나 싶었죠. 제가 헛기침을 하면서 그만 자라고 했지만 아마도 아이들은 이후로도 계속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다음 날 아침 정말 아이의 얼굴이 풀리고 밥을 먹기 시작하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들꽃 피는 마을이 귀한 것은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 주는 선생님들, 후원자들이 기도로 감싸주는데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이들이 아이들을 서로 치유해 준다는 점이에요.

▶ 아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군요.

=들꽃 피는 마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이들이 아이들을 보듬을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마련해 줄 것인가 하는 게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이들이 많은가요?

=아주 많습니다. 우리나라 위기 청소년이 15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제가 청소년위원회의 정책자문위원을 한 적도 있지만, 이 나라 청소년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가 없습니다. 통계자료가 정확하게 없다는 것은 정책적인 기초 자료가 없다는 거죠. 들꽃 피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많은 아이들이 굉장히 밀려있어요. 우리가 그 아이들을 다 받지 못하는 게 5~7명의 아이들이 가정의 모습을 갖춰야 하니까요. 우리나라의 청소년 문제가 심각하고 무엇보다 가정해체가 되면 그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거든요.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년 동안 상처를 받는데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그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전환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 13년간 300명의 아이들.. 가정해체가 가장 큰 원인

▶ 아이들이 어떤 사정으로 집을 나오게 되나요?

=13년 동안 300명의 아이들이 거쳐 갔는데 거의 초창기 때 만났던 8명, 그 환경에서 변한 게 없어요. 94년도 시작할 때 만난 아이들이 여자 아이 2명과 남자 아이 6명이었는데 처음에는 아이들의 가정을 굉장히 원망했었어요. 어떻게 아이들을 이렇게 길거리에 방치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서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했어요. 8명의 아이들 중에서 4 가정밖에 방문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8명의 아이 중에 1명만 엄마, 아빠가 다 있었고 나머지는 다 한 부모 가정이었어요. 그나마 양쪽부모가 있는 아이도 다른 곳에서 빚 때문에 완전히 파산을 해서 야반도주를 한 거예요. 그러니 학교나 제대로 갈 수 있었겠어요? 12살짜리 아이가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만난 아이들과 돌아다니게 된 거죠. 나머지 7명의 아이들의 공통점은 엄마가 없었어요. 가정방문을 하기 전에는 어떻게 엄마가 돼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가서 속사정을 들어 보니 오죽하면 엄마가 집을 나갔는지 이해가 되더라고요. 남편한데 엄청난 맞고 사는 거예요. 처음에 만난 아이도 3살 때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어요. 그렇게 아이를 키우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으니까 7살 때 도로 아빠에게 데려다 준 거예요. 아빠 집에 와 보니 남아 있던 동생이 할머니나 아빠의 사랑을 빼앗아간다고 생각해서, 형이 밤중에 몰래 할머니를 해치려고 했다든지 하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엄마를 빼앗기고 아빠를 빼앗기고 할머니를 빼앗긴다는 심리적인 상처가 곪으면서 형제간에 때리게 된 거죠. 이 가정의 경우는 아빠의 알코올보다는 복잡한 것들이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제일 많은 경우는 아빠가 술 먹고 때리는 게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은 가정에서 신체폭력이나 성폭력까지 생기면서 아이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오는데,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는 가출의 개념보다는 아이들이 살기 위해서 뛰쳐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출이라는 청소년 행동을 갖고도 정말 종류가 많아요. 학교문제, 경제적인 것보다는 부모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친구 때문에 등 다양한 문제가 있지만 이혼이라든지, 폭력, 알코올 등으로 인한 가정해체가 가장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그런 상처로 인해 마음이 닫혔던 아이들이 목사님을 만나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나요?

=상담 과정에서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저와 선생님들, 그리고 아이들끼리 털어놓으면서 마음이 풀어지는 거죠. 아이들이 가정해체 등으로 나오면 길거리 생활을 하게 되는 데 갈 곳 없으니까 생존을 위해서 도둑질을 한다든지 돈을 뺏는다든지 문제행동을 하게 되고 그럴수록 사회에서는 계속 거부당하고 격리되면서 가정과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분노를 아이들이 갖게 되는 겁니다.

▶ 친부모와 화해하는 경우가 많은가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때렸던 부모도 아이들이 들꽃 피는 마을에서 안정을 찾으면서 잘 크고 학교도 다니게 되면 나중에 부모가 굉장히 고마워하고, 어렸을 때는 막 때렸는데 아이들이 커서 힘이 생기면 부모와 대등한 관계가 되니까 오히려 부모가 아이들에게 의지하는 관계가 됩니다.

◇ 대안학교는 ‘다양한 학교’의 다른 이름

▶ 들꽃 피는 마을에 온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학교를 세우신 건가요?

=그렇죠.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은 살겠더라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이 다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잖아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학교에 복학시키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학교에서 받아주면 정말로 다행한 일이죠. 처음에 만난 아이들은 초등학생들이 많았는데 이 아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도 적응을 못하고 다시 뛰쳐나오는 거예요. 그런 과정 속에서 학교에 적응하는 아이들은 복학을 하고 그래도 적응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대안학교를 운영하게 된 거예요.

대안학교라는 것은 다양한 학교라고 해석을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도 뛰쳐나오는 이유가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예요. 한글과 구구단이 안 되는 아이들이 중학교 3학년을 따라갈 수 없잖아요. 그래서 그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교육을 96년도에 홈 스쿨링으로 집에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98년도에 40평짜리 상가건물을 하나 얻어서 많아진 아이들을 위해 교실을 만들고 들꽃 피는 학교라고 이름도 붙였어요. 그리고 같은 건물의 2층 40평짜리를 하나 더 얻어서 들꽃 피는 학교를 운영했죠. 기초학습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프로그램, 지리산을 간다든지 여름방학에는 국토대장정을 간다든지 이 아이들에게 맞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들꽃 피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필요한 공부는 하지만 상가건물이다 보니 학교에 대한 자존감이 떨어지는 거예요. 교실 두 칸이 무슨 학교냐 하는 의견들이 있어서 아이들의 환경과 자존감을 높여줄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후원자들과 함께 이렇게 길거리에 내몰린 아이들일수록 훌륭한 선생님이 필요하다고 호소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아이들에게 생명교육과 산후조리에 대한 교육, 감옥에 끌려 간 아이들에게는 인권교육과 법과 자유에 관한 교육,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폭력이 아닌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교육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2004년도에 90평짜리 4층 건물, 360평을 지을 수가 있었어요. 아이들이 너무 너무 좋아하죠. 비록 가정과 사회에서 내몰렸지만 우리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사회가 따뜻하구나, 우리에게 관심이 있구나 하는 체험을 한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들이 공부하는 게 습관화되지 않은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씨름하는 걸 보면서 버림받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 학교 선생님들은 어떤 분들이 오셔서 가르치시는 건가요?

=그룹 홈의 생활교사는 아이들과 함께 사는데 주력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들꽃 피는 학교 선생님이 되셔서 가르치기도 하고 부부의 경우는 한 사람은 같이 생활하는데 집중하고 또 한 사람은 가르치는데 집중을 합니다. 그리고 들꽃 피는 학교의 전담 선생님도 따로 계세요.

▶ 임신한 아이들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나요?

10대 청소년들의 성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고 생명교육, 성교육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시급합니다. 들꽃 피는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성경험을 한 아이들이 있고 요즘 청소년들이 성에 대해 개방적이기 때문에 그쪽 방면에 유능한 선생님을 모셔서 성교육을 하고 워크숍도 합니다. 이미 임신한 아이는 특별한 시설에 교육받고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낙태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손도 쓸 수 없는 경우를 많이 겪습니다. 그래서 가출한 아이를 찾으러 다닐 때나 낙태문제나 아이들이 들꽃 피는 마을에 들어오려고 줄을 서 있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절망감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성경말씀에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 들꽃 피는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나요?

=아이들을 다 받을 수가 없어서 상담이 밀려있는 상태입니다.

▶ 혹시 들꽃 피는 마을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반대는 없었나요?

=처음 초창기 때는 지역사회에 정착을 못 해서 2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나마 동네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묵인이 돼서 교회에서 7개월 살고, 아파트로 이사해서 3개월 동안 살았는데 지역 주민들의 진정 때문에 그곳에서도 나와야 했죠. 갈 곳이 없어서 봉고차에서 꼬마들 6명을 데리고 1개월 간 유랑생활도 하고 6개월 동안 빈 집에서 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들이 오시면서 안정이 돼서 지금은 안산의 와동에 10가정, 선부동의 1가정, 월피동의 쉼터 등 12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 유랑 생활했던 아이들은 이제 다 어른이 되었겠어요.

=26~28살까지 다 어른이 됐죠. 지금은 다 독립해서 사회인이 되어 있습니다. ‘선배들의 시간’이라고 해서 후배들에게 찾아와서 이야기를 해 줍니다. 여기 있는 동안 정말 잘 지내라고,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지금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이 정말 잘 듣습니다. 아이들 눈이 초롱초롱합니다.(웃음)

◇ 가난했지만 울타리가 되어 준 부모님

▶ 고향이 강원도신가요?

=강원도 횡성군 태기산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 어렸을 적 생활형편은 어떠셨어요?

=우리 집은 전형적인 소작농이었습니다. 산 밑에서 농사를 지었고 3남 2녀 중에 저만 대학을 가고 동생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이니까 제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허락 하에 혼자 서울에 올라와서 외가댁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교회에서 하는 지금의 들꽃피는 학교와 같은 야학을 다니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을 간 거예요.

▶ 학생운동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건가요?

=제가 75학번인데 그 당시가 긴급조치, 유신체제 등이 있었던 때라 정의와 자유를 억누르고 짓밟는 행위에 대해 우리 신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일어서자는 사명감으로 충천했었어요. 77년도에 고난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고 성명서를 읽었는데 성명서만 읽어도 잡혀가는 시대였어요.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법을 가지고 노동자를 탄압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저희는 긴급조치만 각오하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반공법까지 얽혀서 재판을 받고 그런 과정에서 반공법은 제외되었지만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레드 콤플렉스가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는지 뼈저리게 느껴졌었죠. 수감생활은 2년 4개월 동안 했고 79년 7월에 특사로 나왔어요.

▶ 이후에는 뭘 하셨어요?

=학교에 바로 복학을 하지 않고 고향 시골에 내려갔어요. 감옥에 있을 때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걸 실천하려고 갔는데 농사를 지어보니까 못 짓겠더라고요. 땅 파다가 허리를 삐끗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자식 중에 유일하게 대학을 보냈는데 공부는 안 하고 내려와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농사를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요. 그리고 고향에서는 반공법으로 감옥 갔다 온 것은 저 혼자니까 완전히 빨갱이 집안이 되었었죠. 1년 동안 농사짓는다고 고향에 있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공장 다니다가 학교 졸업하고 나서 출판사에 다니다가 목회를 하게 됐어요.

▶ 가난하더라도 부모님이 울타리가 되어주면 참 좋은거 아니겠어요?

=저는 가난이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난하더라도 부모님들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면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가난하게 살면 상대적인 결핍이나 박탈감으로 인해서 거리로 나오게 되는 확률이 더 높은 거죠. 우리 아이들은 전부 가난한 아이들이에요. 가정이 깨어지고 엄마가 매 맞는 모습을 보면서 길거리에 내몰린 이 아이들을 가정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로 보지 않고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로 봐야 합니다.

◇ 아름다운 동행, 들꽃피는 마을은 모두가 가꾸어야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83년도에 했는데 제가 29살 때였고 아내는 27살 때였습니다.

▶ 어떻게 만나셨나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서강대학교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어요. 아내가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는데 구로에 있는 공장에서 여성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중이었어요. 그렇게 연결이 돼서 결혼까지 하게 됐죠.

▶ 김현수 목사님이 들꽃 피는 마을을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는 안하셨나요?

=오히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아내가 앞장을 서고 저는 뒤에서 돕는 입장입니다.(웃음)

▶ 부모님은 다 생존해 계신가요?

=아버지는 85년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도 저희의 동역자가 되어 주세요. 작년까지도 어머니가 한 가정을 맡아서 돌보고 계셨어요. 내년이 팔순이셔서 독립가정을 맡으시는 건 은퇴를 하셨고 저희 가정이 바쁘니까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아주 정정하셔서 남자 중학교 아이들과 팔씨름도 하실 정도에요. 지금은 교사들이 젊은 분들이 많은데 연세가 든 분들이 오시면 좋겠더라고요. 그분들이 이런 쪽에 뜻이 있어서 함께 동참하시면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같이 동참하실 은퇴하신 분들에게 홍보할 필요도 있겠어요.

=저희가 좀 싼 집을 전세로 얻어서 이런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은 많이 있으니까 선생님과 아이들이 혈연만 다를 뿐이지 일반 과정과 똑같이 한 가정을 이루는 거거든요. 또 같이 살아보니까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아이들은 아이들이더라고요. 혼도 내고 규칙도 정해서 규칙을 어길 경우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훈련들을 하는 거예요. 사회에서 훌륭한 일을 하신 연세 드신 분들이 동참하시고 사회가 조금만 뒷받침을 해주면 큰 보람을 느끼실 겁니다.

▶ 향후의 계획이나 꿈이 있으시다면 어떤 게 있으세요?

=대안가정을 꾸려가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대안교육을 끊임없이 모색해 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런 데 뜻이 있는 분에게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보람된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고, 살아보니까 사명감을 떠나서 우리 식구들끼리는 재미가 없어서 못 살 것 같아요. 딸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대학 졸업하고 취업을 했어요. 그 딸에게 자랄 때 어땠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중고등학교 다닐 때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지금은 아이들에게 언니, 누나, 교사 역할을 할 정도로 잘 컸습니다.

책 소개
엽기적 사회증오 범죄 속에서 희망의 씨앗을 날리는 사람들
최근 온 나라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엽기적인 범죄’가 경기침체로 어둡던 민심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있다. 20여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자신을 영웅시하는 유영철이라는 한 살인자 때문이다. 그의 살인행각을 전문가들은 ‘무동기형 범죄’ 또는 ‘사회증오 범죄’라 부른다. 이러한 범죄 양상을 ‘선진국형 범죄’라고도 하지만, 대체로 그 원인을 빈부격차의 심화와 도시의 익명성의 강화, 이에 따른 사회부적응자의 뿌리 깊은 소외감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 공동체성의 확보를 제시하고 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일찌감치 범죄에 발을 들이게 되고, 그로부터 깊은 사회적 소외감과 복수심의 결과에서 비롯된 이러한 범죄의 근원적 처방은 결국 해체일로를 걷고 있는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가족과 사회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문제아’가 잔혹한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빈부격차의 심화와 이혼율의 급등으로 갈수록 해제가정이 급증하고 있는 요즘,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코 밝게 내다볼 수 없게 만드는 어두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사회의 곳곳에 희망의 씨앗을 퍼뜨리는 들꽃 같은 이들이 있다. 바로 신간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의 저자 김현수 목사와 마을 식구들이 그 장본이다. 이들은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가 노숙자와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몸을 파는 여인들의 친구였던 것처럼,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가출청소년의 형제이자 부모이고, 나약자 자의 모습으로 드러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참다운 목회자이다.

똥교회 목사의 사연, 노동자들의 목사에서 가출청소년들의 목사로!
1986년 안산지역 노동자들의 권익을 찾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된 안산노동교회에 1994년 여름,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여덟 명의 악동들이 잠입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때의 당혹스러운 상황을 저자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1994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바로 그해 7월 말,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을 아이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우리 부부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로 들어섰습니다. 바로 그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악취가 먼저 코끝을 찔렀습니다. 거름 썩는 냄새 같기도 했고, 청국장을 띄울 때 나는 냄새 같기도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불현듯 악취의 공격을 받은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아이들 여덟 명. 그것도 한 덩어리로 뭉쳐 곯아떨어진……. 온 교회를 악취로 장악해버린 바로 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겨우 열 살이 되었을까 싶은 아이부터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침입한 아이들을 타일러 돌려보냈지만, 아이들은 그후로도 종종 교회에서 자고 갔다. 자고 가면 갈 것이지, 아이들은 교회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곤 했다.
“녀석들이 이곳에서 잠을 자고 가는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만, 다암 한 가지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더군다나 녀석들은 자고 가면서, 교회 한구석에 똥까지 싸놓고 가곤 했습니다. 혹시나 ‘똥교회’라고 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아무도 모르게 똥을 치우고 물로 싹싹 닦아냈습니다. 그렇게 깨끗이 닦으면서도 괘씸한 생각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똥교회 목사’ 소리를 듣지 않으려던 그가 어느 날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들과 덜컥 살림을 차렸고, ‘예수가정’이라 이름지었다. 그 ‘예수가정’이 지금은 안산에 모두 열한 곳이나 생겨 ‘들꽃피는마을’을 이루고 있다. 노동자 편에 서다가 경찰에게 포위되고 체포되기도 했던 운동권 목사가 가출청소년들에게 포위되어 그들의 어버이가 된 사연이다.
신간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는 그렇게 대안가정을 꾸리고 대안학교(들꽃피는학교)를 운영하며 지내온 10년의 이야기다. 이 책의 1부 “세상 밖으로 밀려난 아이들의 마을을 꿈꾸다”는 들꽃피는마을이 오늘날처럼 든든하게 둥지 를 틀기까지의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를 때로는 코끝 찡하게, 때로는 미소짓게 하는 미담으로 채우고 있다. 이 때의 혼란스러움을 이겨내는 데는 단연코 신앙의 힘과 든든한 가족의 지원, 그리고 지역사회의 풀뿌리 같은 후원자들의 힘이었음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특히 함께 살게 된 거리의 아이들이 도둑질, 앵벌이, 가스와 본드 등 약물 중독 등에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기도와 인내로 극복하는 이야기는 “전쟁 같은 날들”이라는 표현처럼 극적이다.
“본드 하려고 준비해 숨겨둔 것들을 찾아 빼앗으니 명현이가 먹을 것을 빼앗긴 양 날뛴다. 도로 빼앗으려다가 안 되니까 내 팔을 물어버린다. “더 물어 봐” 하고 팔을 들이대니 여기저기 조금씩 물다가 그만 두고 식칼을 들어올린다. “어디 찔러 봐라. 사모님은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야.” 그 순간은 정말 찔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스쳤다. 담대한 마음이 속에서부터 우러나왔다. 칼을 든 명현이에게 바짝 다가서니 슬그머니 칼을 떨어뜨린다.……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고 아이들에게 호소하고 기도했다.”
이밖에도 어렵사리 목사가 된 아들의 앞길과 하나밖에 없는 손녀에 대한 염려로 대안가정운동을 반대하셨던 어머니가 10년이 지난 지금 대안가정운동의 제일선에 나선 이야기, 초등학교 5학년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거리의 아이들에게 빼앗긴 듯한 상황을 넘기며 이제는 어엿한 대학생이 된 외동딸 심지가 지난 일을 보람있었다고 회고하는 이야기는 개인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가족이기주의가 횡행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 따뜻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거리의 아이들을 오래 전부터 돌보아온 이웃들의 이야기는 사랑과 나눔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이어지는 2부 “아이들을 독립투사로 키우자”는 10년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들꽃피는마을 현재의 모습과 꿈에 대한 고백이다. 말썽꾸러기들을 삶의 스승으로 삼아 살아오면서, 청소년들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대안가정과 대안학교에서는 어떻게 상처받은 거리의 아이들을 치유하고, 삶의 주인으로 세우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대안가정/대안학교운동의 베이스 캠프가 다름 아닌 교사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공동체 생활에서 오는 피곤함을 교사공동체에서 어떻게 풀어내는지, 또 들꽃피는마을에서 교사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러한 교사들의 노력을 통해서 아이들이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모습은 한편의 감동의 드라마이자, 우리 사회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 그 자체다.

10년 동안 이룬 대안가정, 대안학교운동
들꽃피는마을은 들꽃피는학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예수가정’을 시작으로 이웃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가정을 잃은 아이에게 가정을, 배움을 잃은 아이에게 배움을 나누기 위한 김현수 목사의 노력은 한편으로 그룹홈 형식의 ‘대안가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형 대안학교’로 발전해간다.
들꽃피는마을의 대안가정의 특징은 혈연가족과의 관계를 무척 중요시한다. 그런 탓에 생활교사들을 ‘아빠, 엄마’라 부르지 못하게 한다. 혈연가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이 그저 떠돌이 부랑아가 아니라 엄연히 부모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시키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감과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또한 들꽃피는학교는 “온 세상이 배움터, 모든 이가 교사!”라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정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중등반 2년, 고등반 2년 과정을 거쳐 졸업하게 되는 이 학교의 수업은 대체로 교실 밖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기초 교과를 비롯해서 삶의 주체가 되는 프로그램으로 채워져 있다. 특히 매년 여름마다 이루어지는 ‘여름도보여행’은 이 학교 프로그램의 백미다.
“마지막, 해변에 도착하는 순간은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웃옷을 벗어던지면서 소리소리 지르며 바다에 뛰어들고,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얼싸안으며 그 동안의 고통을 눈물로 씻어냅니다. 허탈함에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저마다 멀고 힘들었던 여정을 자신이 살아가는 힘으로 축적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하여 아이들은 힘들게 살았던 과거의 삶을 위로받고, 앞으로 펼쳐질 삶에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확고한 이념과 방법론으로 무장했던 공동체운동과 대안교육운동이 최근 들어 시들해지고 있는 반면, 처음에는 엉겁결에 시작된 대안가정, 대안학교운동이 10년이 지난 지금 크고 너른 그루터기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저자 김현수 목사와 그와 함께 이 사업을 소명으로 받아들인 교사들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삶의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큰 시사점을 주고 있다.
사랑과 나눔, 그리고 가정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
신간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는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힘들게 일한 한 목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기도와 봉사로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룬 기적 같은 이야기다. 그런 탓에 저자는 10년의 세월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독특한 시각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바로 2부의 두 번째 이야기 “세계를 둘러싼 두 개의 동심원”에서는 사랑과 나눔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생각건대 진정한 ‘나눔’은 바로 자신의 상처를 만나는 데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나눔’이란 성공한 사람, 돈이 있는 사람이 불쌍하고 연약한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베푸는 ‘동정’과는 다릅니다. 사회적 행위 이전에 먼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불쌍하고 연약한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먼저 내면 속에서 낮아지는 것입니다.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나약한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같은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후원자는 아이들, 교사들과 함께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한 공간에서 함께 살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율이 급등하고 해체가정이 부쩍 늘어나는 이 때 가정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되묻게 만든다. 또한 이웃간의 관계가 단절된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공동체성을 회복할 것인가를 되묻게 만든다. 지역사회와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되묻게 만들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해 새삼스럽게 되묻게 만든다. 때문에 최일도 목사의 책들이 우리 사회에 진정한 사랑과 교회의 역할을 환기시켰던 것처럼, ?감자탕 교회 이야기?의 감동이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환기시켰던 것처럼, [똥교회 목사의 들꽃피는마을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에 강한 생명력으로 피어나는 들꽃들처럼 희망을 피워내고 있다.

작가 소개
저자 | 김현수
◆ 김현수 목사

1955년 한여름, 강원도 태기산 자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마쳤다. 그 후 서울로 올라온 촌놈 김현수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1975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며 학내 시위를 주도하여 한동안 수감되기도 하였다. 1984년 새밭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다, 민중목회를 위해 1986년 안산으로 자리를 옮겨 안산노동교회를 창립하였다. 노동선교활동을 하다가 다시 수감되고 풀려나면서, 10년 동안 안산노동교회 담임목사로 있었다.
1994년 여름 교회에 스며들어 잠을 자고 있던 여덟 명의 거리 아이들을 만나, 그해 10월부터 그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예수가정’이란 이름으로 그룹홈을 시작하여 지금의 공동체 ‘들꽃피는마을’을 꾸리며 지내고 있다.
교회에 들어온 아이들이 싸놓은 똥을 치우면서 ‘똥교회’라는 소문이 날까봐 아이들을 쫓아냈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깨닫고, 지금까지 10년 동안 ‘세상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과 함께 ‘청소년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다. 2004년 5월 문화관광부 주최로 열린 모범청소년 및 청소년 육성 유공자·단체 포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가족으로는 함께 공동체 운동을 하는 어머니 권인희 권사님과 아내 조순실, 딸 심지, 그리고 들꽃피는마을의 많은 들꽃아이들이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 ㅣ 감사의 기도를 시작하며

1부 세상 밖으로 밀려난 아이들의 마을을 꿈꾸다
-들꽃피는마을이 둥지를 틀기까지

하나님, 당신의 계획
전쟁 같은 나날
가족이란 울타리를 넘어선 가족
맹렬 아내, 조순실
아이들의 비밀 언덕, 아이들의 안길 품
거리의 아이들과 함께 꾼 야무진 꿈 하나
베이스 캠프를 찾아서, 가나안을 찾아서
교사들의 교사, 정구영 선생님
학교마을의 꿈이 영글다

2부 아이들을 독립투사로 키우자
-들꽃피는마을의 오늘과 꿈

아이들을 독립투사로 키우자
세계를 둘러싼 두 개의 동심원
세상을 향해 열린 공동체를 향하여
사랑의 힘을 모아 모아서, 합력 프로젝트
수다와 사랑 속에 커다는 교사들의 공동체
아이를 독립투사로 키우는 들꽃교사의 세 가지 역할
들꽃 같은 아이들의 자유로운 나라, 들꽃피는학교
내일을 위한 쉼과 회복
말썽쟁이 목사에게 맡기신 소명

에필로그 ㅣ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분을 섬기는 소중한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