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이 쓴 글이다. 경상북도 영해부 곧, 현재 울진군 평해읍에 있었던 유사정이란 정자에 붙인 기문(記文)이다. 글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신축년(1361) 곧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대거 고려로 침입해 들어와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그때 공민왕이 안동 지역으로 피란하였는데, 목은은 왕을 모시고 함께 이 지역에 왔다가 외가가 있는 영해를 방문하였다. 이 글에 나오는 형은 그의 외가쪽 친척일 텐데, 그의 청탁으로 이 글을 짓게 되었다.
목은의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영해 사람인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목은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목은은 관어대부(觀魚臺賦)와 같은 영해를 묘사한 작품을 지었는데 이 글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글은 영해의 관아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 유사정(流沙亭)이란 정자를 묘사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이 정자는 평해에 있는 월송정, 관어대와 더불어 고려 때부터 이름이 있는 정자였다. 조선 중기까지 잘 보존되고 있었다고 한다. 유사정이란 이름이 붙은 것은 아마도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바닷물에 휩쓸려 다니는 모래사장을 흔히 유사(流沙)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월송정그림(허필)-선문대학교박물관소장
문제는 목은이 유사를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어떻게 보면 좀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목은은 유사를 고유명사로 해석하였다. 내 생각에 목은은 정자 이름을 오독하였다고 본다. 하지만 목은이 유사정이라고 명명한 본래의 이유를 몰라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의도적으로 오독을 한 것이다. 어쨌든 《서경(書經)》의 〈우공(禹貢)〉에서는 중국의 서쪽 끝에 있는 지역의 대표로 유사를 들었는데 목은은 이 지명을 가져다 정자 이름을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유사는 중국 강역의 서쪽 끝으로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을 상징해왔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지명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성정을 도야하거나 여유를 즐길 멋진 정자에 붙였단 말인가? 이것이 목은이 이 글을 이끌어가고 있는 논지의 핵심이다.
천하의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원대한 꿈을 가진다면 유사와 같은 불모의 땅에 사는 사람이라도 세계의 중심과 소통할 수 있다. 그런 의의를 목은은 동해 바닷가 정자에서 꿈꾸었다. 지금 천하의 외진 변방에 살지만 언젠가는 중심에 서보겠다는 무한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이 성사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모한 생각일까? 그는 마음이 있는 한 가능하다고 본 듯하다. 마음은 미약하지만 “우주를 감싸 안고 있으며, 현상과 사물을 접하여 대응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이 작용할 때 “위세와 무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고, 간교한 꾀와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서 우뚝하게 서있는 것이 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은은 몽골이 세계를 통일한 상태를 무척 의의가 있다고 바라보았다. 그는 세계인으로 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온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어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것을 꿈꾸었던 듯하다. 그런 의식을 가졌고 또 국난에 처했기에, 한가롭게 경치를 바라보며 여유를 즐겨야 할 유사정에서 이러한 의지가 넘치는 글을 쓴 것이나 아닐까?
구한말에 소려(小黎)는 이 글을 보고서 “흉금과 국량이 천하만큼이나 광대하다(胸襟宇量, 同其廣大.)”고 평한 적이 있다. 한 인간이 천하를 상대로 우뚝하게 서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의지를 발견하고서 내린 평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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