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팀주치의를 한다는 것은...
전 세계를 뒤덮은 “대~한민국”의 함성이 잦아든 지금, 영광을 이뤄낸 주인공들은 모두 흩어져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
외국 경기장에서, 혹은 TV나 신문지상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마음에서만 빛나는 명예를 간직한 채 묵묵히 자기 일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아마도, 前 국가대표팀 주치의 김현철 선생은 후자일 듯 싶다.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결과에는, 대학교수라는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임기 1년인 국가대표팀 주치의 자리를 자청한 김선생의 몫도 적지 않을 터지만 그의 생활은 이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오히려 환자 보랴, 강의하랴 눈코 뜰 새 없던 예전과 달리, 11월 예정인 관동대 명지병원의 개원을 기다리며 책으로 소일하고 있으니, 오랜만에 얻은 여유를 소득이라고 할까.
국가대표 축구팀 주치의를 하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맞는데 결과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남들이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내 선택의 결과고, 그런 경험을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사는 거죠.”라는 현답을 내놓는다.
월드컵 준비 기간 동안 ‘팀닥터’라는 자리에 대해 많은 회의를 했지만 그의 선택은 결국 ‘스포츠 의학’에 대한 애정으로 귀결된 듯하다. 그가 자리 잡을 명지병원은 파주 축구트레이닝 센터와 가깝고, 대학 이사장은 대학축구 협회장이며, 대학 축구부는 우리나라 아마추어팀 중 강팀에 속한다. 그의 머리 속은 이미 축구와 관련된 다양한 논문계획으로 가득하다.
족부 정형의에서
스포츠 의학전문가로
“레지던트 때부터 사람다리만 70개 정도 잘랐는데 아주 지긋지긋했어요. 그러다 이경태 선생님을 만나게 됐죠. 그 양반 따라서 부천 SK팀을 따라다니다 보니 축구가 점점 재밌어지더군요.”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형외과 수련을 마치고 사람들의 만류 속에 다시 족부 전문의 과정을 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스포츠 의학은 또 다른 재미로 다가왔다.
“FIFA의 룰에 A매치(국가간의 경기)에는 주치의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서, 팀 주치의를 공채했죠. 근데 그 자격요건이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40대 정도의 연구기관에 있는 사람이 그 조건이었는데 그런 사람은 대충 대학조교수 급이죠. 그런 사람을 1년 간 파견 보내줄 대학은 거의 없죠. 결국은 대학에 사표를 내야한다는 말인데…. 결국 이선생님이 전화하셨더군요.”
‘국가적인 축제에 우리병원 의사를 파견한다’가 아니라 ‘열심히 수술해 수익을 올려야 할 스탭 하나가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는 대학 입장에서 대표팀 주치의를 하겠다고 나선 그의 결정을 반길리는 없었다. 기자는 문득 ‘한국이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할 것을 미리 알았었더라면 대학 측의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선대에 사표를 내고 팀 주치의로 자리를 바꾼 그를 지지해준 사람은 이경태 선생을 제외하면 아내뿐이었다.
한국에서
팀닥터로 일하기
“처음엔 재밌게 보여서 시작했지만 이젠 사명감 같은 것까지 느껴요. 우리끼리는 ‘독수리 오형제’라고 부르곤 하죠. 나 아니면 누가 하랴, 이런 마음이니까요.”
물론 장밋빛 환상만 가지고 스포츠 의학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의 한계는 예상보다 심했다. 그 중 하나가 선수들의 태도였다. 어릴 때부터 ‘정신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온 선수들에게 부상은 치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참고 뛰는 것이 미덕인 선수들에게 의사가 필요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의사가 ‘내가 낫게 해줄께, 치료 좀 받아라’ 하고 선수를 쫓아다니게 되는 양상이었다.
두 번째는 제도적인 문제였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하는 보통 시스템으로는 상태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는 운동선수들을 진찰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운동선수 한 명을 본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볼 수 있는 10명의 일반 환자를 포기한다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수입 감소와 실적 저하에 대한 부담은 고스란히 담당의사에게 돌아온다. 작은 실수 하나에 환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몰리는 작은 시장도 문제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나라의 스포츠의학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였다.
“황영조 선수의 경우는 족저 반막염이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수술이었는데도 일본까지 간 것은 아무도 수술하려고 나서지 않아서였어요. 수술하고 나면 좋아지지만, 3년 정도 지나면 발 바깥쪽에 문제가 생기는 걸 다들 알고 있었거든요. 실제로 일본에서 수술하고 와서 황선수가 잠시 좋은 성적을 올렸다가 3년쯤 후 은퇴한 걸로 기억하는데, 만약 우리나라에서 수술했다면 아마 원인을 그 수술에서 찾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깨달음도 대표팀 주치의 역할에서 얻은 하나의 소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팀 주치의가 되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해줄 중요한 얘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팀 주치의가 되고픈
후배들에게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스스로 얻는 것을 만들어 가야죠. 물론 남들이 보면 희생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일종의 명예를 대신 얻는다고 생각지 않으면 팀 닥터가 되려는 생각은 버리는 게 낫습니다.”
그는 학회나 대학에서 짬짬이 강의를 하고 있다. 앞으로 발을 전공하고 싶거나, 팀 주치의가 되고 싶은 후배들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9월 예정이었다가 11월로 미뤄진 명지병원의 개원이 늦어지는 것이 답답한 이유도 하루 빨리 다시 강단에 서고 싶어서다.
대부분 젊은 스탭으로 이뤄질 명지병원에 대한 기대도 크다. 새로운 시도에 대해 우려의 시선부터 보내는 안정된 조직보다 하고 싶은 작업을 소신껏 할 수 있는 신생조직이 그에게는 더 좋은 조건이다.
다른 이들이 보면 잃은 것이 더 많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흔치 않은 새로운 경험을 가져왔고, 그는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교수 자리를 포기하고 얻은1년간의 경험은 다시 맞을 제자와 후배들에게, 그리고 우리나라 스포츠 의학연구를 연구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자신의 선택은 항상 “최선이 아닌 최고의 것”이라 믿는 김현철 선생에게서 젊은 청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김민아 기자 licomina@
사진 김선경 기자 potop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