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털동자는 어린아이처럼 솜털이 보송보송하다. 털동자 피어나면 '장마'가 올 조짐이다. | ⓒ 윤희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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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꽃이 피기 시작한다. 털동자가 피어나면 장마가 시작되고, 제비동자가 피면 제비 새끼들이 나는 연습을 한다. 동자 꽃은 애기동자라고도 부른다. 이름과는 달리 한여름 높은 산 초원에서 핀다. 동자 꽃을 찾아 산을 올라가자니 숨이 헐떡거리고 더운 기운이 목까지 차오른다. 동자 꽃이 산꼭대기에서만 살아야하는 애틋한 사연이 있다. 강원도 어느 깊은 산 속에 노스님 한 분이 부모를 잃고 떠도는 어린 동자를 데려다 길렀다. 어느 겨울 날 대처로 쌀 동냥을 갔다 눈이 쌓여 암자로 돌아오질 못했다. 허기와 추위에 지친 동자는 암자 밖에서 스님을 기다리다 얼음으로 변했다. 스님은 그 자리에 어린 것을 묻고 아침저녁 관세음을 염하며좋은 곳으로 환생하도록 천도(遷度)를 했다. 다음해 여름 동자의 얼굴을 닮은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어린동자를 떠올리며 ‘동자꽃’이라 불렀다. | ▲ 애기동자는 젖물병을 닮았다. 굶어죽은 동자승 아기의 넋을 기리듯... | ⓒ 윤희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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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동자꽃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쏙 빼닮았다. 꽃받침은 젖병꼭지 모양으로 꽃잎 사이마다 보조개가 옴폭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꼭지가 달랑거리면 보조개가 홍색으로 물들어간다. 주황색이면서도 되바라지지 않은 앙증맞은 꽃이다. 며칠 전, 돼지텃골 동갑내기 홍씨가 화천 5일장을 보러 가잔다. 먹자골목에 들러 소머리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검정고무신 한 켤레와 알사탕 두 봉지를 샀다. 홍씨가 뜬금없이 한 군델 더 들러가야 한다며 따라오라 한다. 골목 뒤에 동자보살이 신수점을 잘 본다 했다. 올핸 귀신이 붙었는지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며 구경삼아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홍씨의 신수점치기가 거의 끝날 무렵, 옆에 따라온 사람도 점괘를 올려보란다. 점을 쳐 본 경험도 없거니와 점 값도 없다 사양을 했다. 점방이 생소한데다 그렇다고 무엇을 알아보거나 답답한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떨 결에 따라와 그 동안 지은 죄가 백일하에 드러나면 어쩌나 괜스레 가슴이 쿵쿵거렸다. | ▲ 동자꽃이 하도 작아 앙증맞고 귀엽다. | ⓒ 윤희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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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주 값이 없다 사양했으나 그냥 가면 보살이 노한다며 삐뚤삐뚤한 방석 위로 끌어당겼다. 애기동자가 좋아하는 알사탕 한 봉지면 충분하니 그걸로 대신 올리라했다. 빨간 사탕봉지를 올려놓자 "동자야, 애기동자야" 하고 동자보살을 부르는데 목소리가 아기 가래 끓듯 가르랑거렸다. 원체 죄 많은 몸이라 업장(業障)을 들춰내면 어쩌나 했으나 보살은 그냥 눈을 스르르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한참 무슨 주문을 외는가 싶더니 올 해 안으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질 운세란다. '이름을 천하에?' 황소가 웃을 일이다. 하긴 '사는 이야기' 기사가 버금에 걸리면 몇 천 명의 독자가 읽어주니 그렇다면 그렇다 할 것이다. 기분을 붕 떠 올리는 바람에 배추 색깔 한 장을 올려놓고 자리를 뜰 참이었다. 또 애기 목소리로 "숨겨진 죄가 많아야, 주색을 조심혀, 술과 여자 앞엔 장사가 없는 벱여, 정신 차려, 이것아" 하는 것이었다. 술은 알겠는데 이 나이에 색은 뭐란 말인가. 그렇잖아도 요즘 정력이 허한 판에 기를 팍 죽여 놓을 게 뭐란 말인가. | ▲ 제비꼬리를 닮아 제비동자라 한다. 이 꽃 피어나면 제비 새끼들의 강남여행 갈 할강 훈련이 시작된다. | ⓒ 윤희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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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산 꼭대기에서 담아온 동자 꽃 사진을 보고 또 들여다본다. 깜찍하기 그지없다. 꽃들이 방긋거릴 때마다 잔잔한 바람이 일어 더위가 날아갈 듯싶다. 숨겨진 죄 값을 어떻게 치러야할까. 술은 끊을 수 있는 것일까. 괜스레 점집엔 따라가 공연한 걱정거리만 달고 왔다. 털동자 피어나 솜털이 보송보송,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나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