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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주부의 두 달 `가출`

60대 주부의 두 달 '가출'

  • 배정자 경기 구리시 주부

입력 : 2010.08.23 23:29

벌써 인생의 황혼인가… 기력은 떨어지고 마음은 우울해진다
두 달간 가족과 떨어져 살겠다고 하니 가족들은 당황했다.
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낯선 도시 도서관에서 여름내 책을 읽었다
남은 인생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다

인생은 80부터라는 말도 생겼다지만, 60 중반에 접어든 나는 온몸의 곳곳이 삐걱거린다. 비탈진 언덕이나 계단을 보면 시큰거리는 무릎 때문에 겁부터 난다. 이렇게 노년의 그림자가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제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것인가, 억척스레 살아왔던 예전과는 달리 기력도 없고 마음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내가 두 달 동안 가족과 떨어져서 살아보겠다고 말했을 때 가족들은 당황스러워 했다. 친척도 없는 낯선 동네에서 어떻게 지내려고 하느냐고 했다. 나는 그날그날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환경에서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갱년기인가도 싶었다. 마침 딸이 방학이 되어 집으로 올라오면 딸의 자취방에 내려가 있겠다고 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간 곳은 남부지역의 작은 도시였다. 대학교 옆 원룸이 딸의 자취방이었다. 집을 떠날 때 그 옛날처럼 책을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아이들과 도서관을 함께 다니며 책 읽던 행복한 기억을 되찾기로 한 것이다. 아마 그 기억은 지금도 어딘가 내 몸에 깊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 혼자서 낯선 도시에 올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오랫동안 책을 멀리 했던 나는 서점에 들러 책부터 샀다. 이곳 도서관은 30~40분을 걸어가야 할 만큼 먼 곳이었고 한여름의 더위는 나를 지치게 했다. 도서관에서 오래 앉아 있으니 무력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정해놓은 책을 다 보기 전에는 움직일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한동안은 책 읽기에 적응 못해 버스를 타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목표도 없이 '오늘은 36번 버스를 탔으니 내일은 22번을 타야지' 이런 식이었다. 강에도 가 보고 공원에도 가서 홀로 앉아있기도 했다. 때로는 시골 장터에 내려 구경을 하고 저녁이 되어 돌아온 적도 있었다.

"책 읽는 게 재미있어요? 지금 무슨 책 읽어요? 내려간 김에 이야기 책 한 권 써보는 게 어때요?" 큰아이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딸애는 "엄마, 농담 아니에요. 엄마가 도서관 오가며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그게 다 지금 보면 보석 같은 얘기야. 한 권도 안 팔려도 좋으니 혼자 간직할 수 있는 책을 써봐"라고 재촉했다.

그랬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도서관에 함께 가서 나는 성인실에서 열심히 책을 읽었다. "어떤 분이 전차를 타고 가다가 신발 한쪽을 떨어뜨렸어요. 그러자 신고 있던 다른 신발 한쪽마저 떨어뜨렸대요. 신발 한쪽을 주우면 소용이 없지만 두 쪽 모두 주우면 선물이 될 거라고…." 어둠이 깔리고 별빛이 내리는 언덕에서 나는 아이들과 그렇게 책 이야기를 하며 돌아오곤 했다.

책을 읽다가도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면 얼른 학생실로 달려가서 아이들을 불러냈다. "여기 좀 봐, 여기 눈물 젖은 별, 너무 아름답지." 아이들은 내가 읽었던 책을 도서관에서 다시 빌려다 읽었다. 때로는 자기들 수준보다 어려운 책도 있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어 내가 되레 감동받기도 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니었을까….

밑줄까지 쳐가며 더운 여름을 책읽기로 보냈다. 이렇게 끈기 있게 독서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삶의 상실감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옛날의 행복했던 그 시간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토지' '달과 6펜스' '면도날' '내 인생에 힘이 되어주는 한 마디' 등등…. 페테 빅셀의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책을 읽으며 노년을 아름답게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그리워졌다. 가족이 모여 앉은 식탁, TV 보는 저녁 시간이 그리웠다. 체육관 공원에선 옆집 할머니도 나와 운동하고 있겠지. 그 옆 길가에 가꿔놓은 꽃밭에선 접시꽃이며 붓꽃이 피고 있겠지. 밤에 핀 흰 꽃은 나를 얼마나 황홀하게 했던가. 모든 게 그리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힘든 여행을 끝마친 사람처럼 마음이 홀가분했다. 난생처음 선물을 받은 아이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행복했다.

나는 백화점에서 하는 글쓰기 교실에 가입하고 마을 도서관의 독서회에 참가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독서회에선 나와 같은 이들이 모여 서로 책을 읽고 시를 낭송했다. 아이를 못 낳아서, 아들이 소아마비에 걸려서, 딸만 낳아서 슬펐다는 다른 이들의 얘기를 들으며 아픔을 함께 나눴다. 지나고 나면 시간이 다 해결해 주는 일인데도 그때는 그 고통을 왜 죽느냐 사느냐로 받아들였을까.

"나는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때라고 생각해.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고 아직은 그런대로 건강하잖아. '바로 지금이야' 하고 여행 가려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어. '달과 6펜스'에 나오는 타히티 섬으로 여행을 갈 거야. 이 정도는 나를 위해서 써야 하지 않겠어." 독서회 한 동료가 집을 담보로 '30년 상환 대출'을 받아 여행 간다는 말에 우리는 "당신 멋져, 멋져"를 합창했다.

배정자 주부

정말이지 앞으로 남은 인생, 나는 나를 깊이 사랑하고 싶다. 시골에서 다니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시절, 소설 '상록수'에 심취해 동네에 야학을 열고 아주머니 대여섯명에게 한글을 쓰고 읽는 법을 가르쳤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50년이 지난 지금 그 용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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