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방송

천추태후는 왜 사촌오빠와 결혼했을까?

천추태후는 왜 사촌오빠와 결혼했을까?

고려시대 왜 '족친혼' 성행했나
최민호 (cnfqkf0816)
팔관회 행사에 가는 황보설, 황보수, 신정황태후 황보씨. 황보설과 황보수는 고종사촌 오빠인 경종과 혼인한다. KBS 드라마 <천추태후> 한 장면
ⓒ KBS
천추태후

지난 11일 방영된 KBS 2TV 주말사극 <천추태후>에서 고려 제 5대 왕 경종(최철호 분)은 대소신료들 앞에서 새 왕후를 들일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런데 왕후로 간택된 사람은 다름 아닌 경종의 외사촌동생인 황보수와 황보설이었다. 자신들이 밀던 김원숭(김병기 분)의 딸이 아닌, 정적인 황주 황보 가문의 두 딸이 새 왕후가 된다는 말에 신라계 인물인 시랑 최섬(이기열 분)은 그 혼인이 '족내혼(族內婚)'이라는 이유를 들어 불가함을 주장했다. 그러자 경종의 비웃는 듯한 한마디가 이어진다.

"거, 괴이한 말이로구먼. 선왕 때부터 족내혼은 황실에서 권장하는 일이외다. 그대 최시랑이 좋아하는 신라에선 더하지 않았는가?"

신라-고려 왕실, 친척끼리 결혼 성행

가족끼리 결혼하는 족내혼(근친혼)은 고려시대 후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내려오던 혼인풍습이었다. 요즘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 고려 왕실의 결혼은 대부분 족내혼으로 이뤄졌다. 경종은 고려 제 4대 왕 광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광종의 제 1비인 대목왕후 황보씨다. 대목왕후의 아버지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 어머니는 신정왕후 황보씨로 그녀의 동생인 왕욱(대종으로 추존)의 두 딸이 바로 황보수·황보설이다(후에 각각 헌애왕후·헌정왕후). 즉 경종은 외삼촌의 두 딸, 외사촌동생들과 결혼한 셈이다.

광종의 경우에는 누이동생과 조카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태조의 아들인 광종의 제 1비는 앞서 밝혔듯이 대목왕후, 그녀 역시 광종과 같은 태조의 자식이다. 광종의 제 2비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광종의 형이자 고려 제 2대왕인 혜종의 딸로 광종에게는 조카가 된다. 고려 제 6대 왕 성종은 태조와 신정왕후의 아들인 왕욱의 아들로 경종에게 시집간 헌애왕후·헌정왕후와는 친남매지간이다. 성종의 제 1비인 문덕왕후 유씨는 광종의 딸로, 성종과 광종이 삼촌지간이니 성종은 사촌누나와 결혼한 셈이다.

고려 왕실에서 족내혼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광종 때부터인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어땠을까? 태조, 혜종, 정종의 결혼 역시 족내혼과 그 의미를 같이 한다. 익히 알다시피 고려 태조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두었다.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고려 건국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방의 호족 세력 및 신라 왕족과 결탁해야 했던 태조는 결혼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서로보다 끈끈한 결속력을 다졌다.

이런 모습은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혜종과 정종에게서도 나타나는데, 혜종은 경기도 광주의 무장세력인 왕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런데 왕규는 태조에게도 두 딸을 출가시켰으니, 태조와 혜종은 부자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됐다. 정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두 딸과 결혼하는데 박영규 역시 태조에게 딸을 출가시켜 태조와 정종 또한 부자지간이면서 동서지간이 됐다.

태종무열왕은 김유신 매제이면서 장인

이런 족내혼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앞서 경종이 '고려보다 더하다'며 비꼬았던 신라는 지배층의 족내혼이 활발하게 이뤄졌던 나라였다.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북쪽의 영토 확장을 통해 신라 전성기를 구축한 진흥왕은 선왕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입종은 형인 법흥왕의 딸, 즉 조카와 결혼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진흥왕에게 어머니는 어머니인 동시에 사촌누나가 되는 셈이다. 또한 진흥왕의 아들 동륜의 아내는 입종의 딸이었다. 동륜이 입종의 손자이니 동륜은 자신의 고모와 결혼한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역시 족내혼을 통해 정치적 동맹자의 결속을 굳게 다졌던 이들이다. 장작불에 타 죽을 뻔한우여곡절 끝에 김춘추와 결혼하여 훗날 문명왕후가 되는 문희는 김유신의 막내동생이다. 그런데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김유신에게 출가하여 지소부인이 되니, 김유신은 조카와 결혼하고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매제이자 장인이 되는 셈이다.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신라는 족내혼을 통해 혈통의 신성함을 유지하고, 권력누수를 막으려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신라에만 여왕이 존재했던 까닭도 '김씨 왕가'의 배타적 권력독점을 위해서였다. 이런 시대에서 부모 모두 왕의 혈통이지만 본인 자신은 진골이었던 김춘추와, 멸망한 금관가야 출신의 방계 진골로서 중앙권력에 편입되고 싶어 하던 김유신은 족내혼을 통해 손을 잡게 되고, 김춘추는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도움으로 진골 최초로 왕위에 올라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처럼 신라, 고려시대의 족내혼은 정치적 권력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족내혼을 통해 집단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고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원 간섭기 거치며 족내혼 금하기도

그런데 이런 족내혼의 경향이 고려 제 8대 왕 현종 때부터 옅어지기 시작한다. 현종은 모두 13명의 비를 두었는데 그 중 3명의 아내만이 족내혼일 뿐, 다른 10명과는 모두 족외혼이었다. 현종을 기점으로 이후 고려왕들은 족내혼보다는 족외혼으로 맞이한 비의 수가 많아졌고, 족내혼으로 낳은 자식보다 족외혼으로 낳은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일 또한 빈번해졌다. 이것의 의미는 더 이상 고려왕실이 족내혼을 통해 권력누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적인 왕권을 일궈냈다고 볼 수 있다.

현종 이후에도 고려왕실의 족내혼의 전통은 계속 이어지는데, 고려 제 16대 왕 예종 때까지도 사촌 이내의 가까운 혈통끼리의 족내혼이 성행했다. 그 이후 족내혼끼리의 촌수가 점점 멀어지더니 원 간섭기에 이르게 되면서 대부분 촌수가 8촌을 넘어가 사실상 족내혼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다. 또한 고려 제 26대 왕 충선왕은 즉위년의 하교에서 "원나라 세조의 성지를 어기는 족내혼을 마땅히 금하여 이를 어기는 종친이 있으면 논죄할 것인즉, 마땅히 종친은 재상을 지낸 집안의 아들, 딸과 혼인할 것이다"라고 말해 고려왕실의 족내혼을 엄격하게 금했다.

역사적으로 천추태후는 외사촌오빠인 경종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성종의 뒤를 이어 고려 제 7대 왕 목종이 된다. 조카와 삼촌이 결혼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이 되며 이복남매가 결혼하는, 현대인의 윤리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혼인풍습이 500여년 전 고려시대까지는 왕실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족내혼의 풍습 뒤에는 집단의 권력을 유지해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려는 집권세력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고려의 왕과 여자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요즘 시각으론 '근친상간' 수두룩
인기 드라마 '천추태후'의 배경
이한우

고려에서는 왕의 본처를 왕후(王后), 첩은 부인(夫人), 어머니는 왕태후(王太后)라고 했다. 참고로 조선에서는 비(妃)와 빈(嬪) 그리고 대비(大妃)라고 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의 창업자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6명의 왕후(추존 포함)와 23명의 부인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 적자(嫡子)로 이어지던 왕통이 처음 방계로 이어진 것(傍系承統)은 선조 때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안씨의 손자였다. 그러면 고려에서 처음으로 방계승통한 임금은 누구일까? 고려의 왕통은 태조 왕건이 943년 세상을 떠나고 혜종(惠宗·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사이에서 난 장남), 정종(定宗·왕건과 신명 왕태후 류씨 사이에서 난 둘째아들), 광종(光宗·정종의 동복 아우) 등 이복(異腹)과 동복(同腹) 형제로 이어지다가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경종(景宗)으로 이어진다. 광종과 대목왕후 황보는 이복남매 간이었다. 아마도 이 혼인이 없었다면 요즘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천추태후'의 권력도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종은 재위6년 만인 981년 2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태조 왕건 사후 38년이 흐르는 동안 혜종 정종 광종 경종 등 4명의 국왕이 바뀌었다.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착한 사람을 멀리했다. 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쇠퇴하였다"는 사평(史評)을 듣는 경종은 죽음을 앞두고 사촌 동생 개령군 치(治)를 불러 선위(禪位) 의사를 밝힌다. 자기 아들(훗날의 목종)은 아직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종이 유일하게 평가를 받는 것은 이때 선위한 개령군이 왕위에 올라 비교적 안정된 정치를 베푼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령군 치는 경종의 외삼촌, 즉 훗날 대종(戴宗―추존왕)으로 불리게 되는 왕욱(王旭)의 아들이다. 왕욱과 (광종비) 대목왕후 황보씨는 둘 다 왕건과 신정왕태후 황보씨(원래는 왕후가 아니라 부인이었다가 개령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태후로 추존되었다) 소생이었다. 결국 왕건의 씨를 둘러싼 30명 가까운 여인들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자는 왕후가 아니라 부인에 불과했던 황보씨였다.

태조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왕욱은 이복누이인 선의태후(이것도 추봉) 류씨와 결혼해 아들 하나, 딸 둘을 두는데 그 아들이 성종(成宗)으로 즉위하게 되는 개령군이고 딸 둘은 각각 경종을 모셨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이다. 경종이 미련 없이 개령군에게 왕위를 넘긴 것은 바로 이처럼 겹처남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되면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현대적 시각으로 봐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만큼 민망한 대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981년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하고서 3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성종은 사관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특히 '고려사'를 편찬한 유학자들로부터 종묘사직을 설치하고 효자 효부를 기리는 등 유학적 세계관을 펼친 국왕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런 성종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그의 왕후 류씨는 광종의 딸로 다른 종친에게 시집을 갔다가 뒤에 성종의 배필이 되었다 하니….

경종의 죽음으로 일찍 과부가 된 성종의 큰 누이이자 경종비였던 헌애왕후가 드디어 애정행각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미 경종과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던 헌애왕후는 남편이 죽자 궁궐 내 천추궁(千秋宮)에 거처하면서 외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끌어들여 온갖 추문을 만들어낸다. 보다 못한 성종은 김치양을 외방(外方)으로 내쳤다. 997년 성종이 재위16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서 난 목종(穆宗)이 등극한다. 18세면 충분히 친정(親政)을 펼칠 수 있음에도 왕태후가 된 헌애는 천추궁에 자리잡고서 섭정을 한다. '천추태후'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돌아온 탕아' 김치양은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고 심지어 목종 6년(1003년)에는 천추태후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다.

천추태후와 같은 경종비였던 성종의 작은 누이 헌정왕후도 일찍 과부가 되자 왕건의 아들(이복 작은 아버지) 왕욱(王郁)과 통간하여 아들을 낳았다. 성종은 왕욱도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먼 지방(경상도 사천)으로 유배를 보낸 바 있다. 성종 사후 세상을 거머쥔 천추태후는 주변을 둘러보니 김치양과의 사이에 난 아들이 목종의 뒤를 잇는 데 방해물이 될 유일한 인물은 바로 헌정왕후와 왕욱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뿐이었다. 목종 재위기간 동안 왕순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결국 왕순은 목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22년간 재위하게 되는 현종(顯宗)이다. 그 바람에 왕욱은 안종(安宗)으로, 헌정왕후도 효숙 왕태후로 추존됐다. 다소 복잡하지만 고려 초 왕실 상황은 그랬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16)황제국가를 지향한 여걸―천추태후

    발행일 : 2002.07.24 / 느낌 / 38 면

    ▲ 종이신문보기

    천추태후 황보(皇甫·964~1029)씨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녀를 아는 사람들도 김치양(金致陽)이란 신하와 간통한 왕비 정도로 기억하고 있기 십상이다. 그러나 고려 다섯번째 왕인 경종(재위 975~981)과 결혼, 헌애황후가 된 그녀는 그 정도로 넘어가기에는 고려 초기에 남긴 족적이 너무 큰 여인이다.

    여덟 살 위의 사촌오빠와 결혼, 황후가 됐을 때만 해도 황보 소녀는 모든 것을 갖춘 행운아였다. 그녀의 친할아버지는 태조 왕건이었다. 황보라는 성은 외가 쪽을 딴 것인데, 그녀의 외증조부 황보제공(皇甫悌恭)은 예성강 서북의 패서(浿西) 내륙 일대를 대표하던 호족이었다. 그녀의 동생도 뒤이어 경종과 결혼시켜 헌정황후로 만든 것은 그녀 외가의 위세를 잘 말해준다.

    경종에겐 이미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는 앞선 왕비들과 치열하게 경쟁, 경종의 유일한 왕자 송(誦)을 낳을 수 있었다. 비록 순서로는 세 번째이지만 왕자를 낳은 그녀의 위치는 명목상의 서열을 앞질렀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6년 만인 981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두 살짜리 왕자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두 살짜리가 즉위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 오빠가 즉위한 것이다. 그가 바로 성종인데 그가 중국식 유학정치이념의 구현을 치세목표로 삼으면서 그녀의 인생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성종은 유학정치이념에 따라 동생들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했다. 그러나 열여덟 살의 헌애황후나 동생 헌정황후는 수절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또한 유학윤리에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 고려 여인이었다.

    헌애황후가 문제의 남자 김치양이 외가 친척이란 명목으로 승려 복장을 하고 나타났을 때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를 애인으로 삼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동생 헌정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경종 사후 왕륜사(王輪寺) 남쪽에 거주하던 헌정황후는 곡령(鵠嶺)에 올라서 소변보는 꿈을 꾸었다. 신라 김유신의 동생 보희의 꿈처럼 온 나라에 넘쳐흐르는 꿈이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오줌이 은(銀)바다로 변했다는 점이었다. 점쟁이는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꿈’이라고 풀이했으나, 그녀는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웃에 살던 이복숙부 왕욱(王旭)이 접근하자 그녀 역시 언니처럼 감정에 충실했다.

    두 여동생의 추문이 들리자 성종은 엄격한 유교윤리에 따라 김치양에게 곤장을 때린 후 귀양 보냈고, 왕욱도 멀리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 보냈다. 이미 임신 중이었던 동생 헌정황후는 귀양 가는 왕욱을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중 집 앞에서 아이를 조산(早産)했는데, 산후조리에 실패해 죽고 말았다.

    헌애황후는 자신들에게 엄격한 유학이념을 강요하는 성종에게 큰 불만을 느꼈다. 그녀는 성종의 유교정책은 할아버지 왕건의 뜻과 다르다고 판단했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팔관회나 연등회, 선랑(仙郞)처럼 왕건이 높였던 고려의 전통 행사들을 ‘떳떳치 못하다’고 생각해 폐지했다. 대신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시는 중국식 태묘,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 공자를 제사하는 문묘 등을 설치하는 등 중국식 유교화에 박차를 가했다.

    중국식 잣대를 들이대면 고려는 제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성종은 개국 이래 사용해오던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개칭했다. 조서는 황제가 사용하는 용어이고 교서는 제후의 용어다. 성종은 또 최승로 같은 유학자들과 신라계 인물을 적극 등용했다. 하지만 그의 유교화 정책은 상무정신을 약화시켜 거란족의 요나라 침입 때 국토 일부를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조정의 대세를 이루는 악영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서희(徐熙)와 이지백(李知白) 등 항전론자들은 조정의 소수파에 불과했다. 이지백의 “경솔히 국토를 떼어주기보다는 연등회, 팔관회, 선랑 등의 행사를 다시 거행하고 타국의 색다른 풍습을 본받지 말아 국가를 보전하자”는 주장은 고려 전통의 상무정신 부활을 요구한 것이었다. 헌애황후 역시 고려 전통파의 이런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성종이 재위 16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헌애황후는 성종의 잘못된 정책을 되돌려 놓기로 결심했다. 천추궁(千秋宮)에 머무르던 그녀는 자신을 제후의 어머니인 대비(大妃)가 아니라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부르게 함으로써 고려를 황제국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과시했다. 천추태후는 귀양 간 김치양을 불러들여 우복야 겸 삼사사에 임명했다. 목종을 도와 고려식 전통정책을 부활하는 한편 유행간(庾行間) 이주정(李周禎) 문인위(文仁渭) 등을 등용했다. 이들은 자신의 친정 세력이었던 패서호족(浿西豪族)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북진을 강조했던 왕건의 유훈을 실천하기 위해 목종에게 네 번이나 서경(西京:평양)에 행차하게 했다. 그때마다 산악과 주진(州鎭)의 핵심지역에 제사를 지내 전통신에게 가호를 빌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진관사(眞觀寺)를 짓고, 목종을 위해 숭교사(崇敎寺)를, 김치양의 출신지 서흥에 성숙사(星宿寺)를, 궁성 서북에 시왕사(十王寺)를 지었는데 이런 절들은 전통 행사 팔관회에서 모든 토속신앙이 어울렸던 것처럼 불교와 도교, 토속신앙이 함께 어울리는 장소였다.

    천추태후의 이런 정책들은 성종의 방향이 옳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유학자와 신라계 인물들을 반대파로 만들었다. 이들은 목종을 내쫓고 태후의 동생 헌정황후가 숙부 왕욱과 사통해 낳은 순(詢)을 국왕으로 삼으려고 획책했다.

    천추태후는 목종 6년(1003) 열두 살이던 조카 순을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삼아 우대했으나 반대파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자 1006년 그를 승려로 만들어 남경(南京:서울)의 삼각산(三角山) 신혈사(神穴寺)에 내려 보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정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1003년 김치양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수를 친 것은 반대파들이었다. 이들은 목종 재위 12년(1009) 정월 임금이 관등(觀燈)을 하는 틈을 타서 천추궁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정변을 시작했다. ‘고려사’는 목종이 천추궁 화재에 충격 받아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않았다’라면서 ‘궁내에만 있고 신하들을 만나기를 거부했다’고 적고 있으나 실제로는 쿠데타 세력에 유폐된 것이었다.

    결국 목종은 폐위당하고 대량원군이 현종으로 추대되는 것으로 쿠데타는 성공한다. 강조는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천추태후 세력을 대거 살해했다. 이때 천추태후는 46세였으나 쿠데타 세력은 그녀를 죽이지는 못했다. 목종과 김치양 사이의 아들까지 모두 죽여 재기할 싹을 자른 데다 태조의 손녀이자 선왕 경종의 황후인 그녀마저 살해하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목종이 죽은 후 그녀는 외가의 고향인 황주(黃州)에서 한을 달래며 여생을 보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고려 왕실의 족내혼

    ◈고려 왕실은 현재 우리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족내혼이 심했다. 족내혼이라기보다는 근친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정도이다. 정종의 제1비와 제2비는 모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朴英規)의 딸이었다. 고려 2대 임금 혜종은 자신의 딸을 이복동생 정종에게 주었으니 정종은 조카딸과 결혼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왕건의 셋째 아들이었던 광종의 비는 태조의 딸인 황보씨였으니 이복 남매끼리 결혼한 것이었다.

    이 경우 왕비들은 친가의 성이 아니라 외가의 성을 썼다. 광종 비 황보씨는 왕건의 딸로서 왕씨라고 써야 했으나 외가성을 따른 것이다. 이는 같은 진골끼리만 결혼했던 신라 왕실의 족내혼 유풍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만, 왕씨끼리 혼인한 것을 감추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