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간 연 날리다 102세 ‘연 할아버지’ 노유상 옹 방패연에 빠져… 전쟁터에서도 연 띄우고… 전통얼레 되살리고
두산(杜山) 노유상(盧裕相)옹. 1904년 생이니 올해로 102세다. 3·1 만세운동이 터졌던 1919년, 고향 황해도 장연에서 보통학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을 배웠다. 큰 아들 성규씨는 노옹의 호를 물려받아 ‘2대 두산’으로 연을 만들다 2004년 먼저 하늘로 떠났다. 50세였다. 그러자 대학 다니던 손자 노순(盧舜·27)씨가 자기도 연을 만들겠다며 ‘3대 두산’이 되었다. “순종 황제 시절에 황궁 경비대로 일하다가 북경 가서 사업을 했어요. 1934년인가 36년인가 거기서 민족 대항 연날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조그만 조선 방패연이 다른 연들을 다 잡아먹어 버리는 거라.” 이때 젊은 노유상은 연에 미쳐버렸다. 해방이 되고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나가서도 연을 날렸다. 1955년 군대를 나와 서울에 터를 잡았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전국 연날리기 대회를 지시했다. 그러나 연 날리는 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정전(停電) 사고 주범인 전신주 주변 연날리기 금지”라는 일제시대의 법(法) 탓에 해방 후에도 연이 드물었다. 어느 날 속을 태우며 신문로를 걷던 담당과장 눈에 연이 보였다. 골목골목 뛰어다니며 연줄의 행방을 쫓아가 얼레를 잡고 있는 노유상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이듬해 음력 2월 14일 제1회 전국연날리기 대회가 청계천에서 열렸다. 대통령과 장관들, 외국대사들이 닷새 동안 추위에 떨며 대회를 지켜봤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 연 체계는 이 ‘연 할아버지’가 다 만들었다. 얼레도 그가 복원했고, 연에 그려 넣은 문양도 제작 기술도 다 체계화했다. 그런데 가난했다. 돈만 생기면 자료를 수집하고 전통 연 체계를 만드느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 세월이 갔다. 전통문화를 복원한다는 자부심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도 속상했다. 88세 되던 1992년에서야 서울시 무형문화재 4호 지연장(紙鳶匠)으로 지정됐다.
남편을 장지(葬地)로 떠나 보내기 전날, 대학교 2학년이던 아들 노순이 말했다. “내가 연을 만들래.” 기어 다닐 때부터 아버지한테 “너도 크면 연 만들어야지”라는 말을 들었던 아이였다. 그래서 ‘3대 연 계승자’가 되었다.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해놓은 일이 너무 아까웠다”라고 했다. 수제칼을 만들던 삼촌 성도씨도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연을 만들고 있다. 연 만드는 집은 김포공항 부근에 있다. ‘한국민속연보존회(www.koreakite.com)’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거실은 한지, 대나무, 얼레 기타 등등 연 부속품이 빽빽하다. 초등학교에서 연 조립세트 주문이 늘고 있고, 문화센터에서도 연 제작과 날리기 강습이 많다. “먹고 살 만하다”고 했다. 12일 서울 여의도시민공원 하늘에 연 수백 개가 군무를 펼친다. 서울 연날리기축제다. 1956년 연 할아버지가 시작한 그 대회다. 할아버지도 축제 때 얼레를 잡을 작정이다. 작년에 엉덩이를 다쳐 지팡이를 들고 다니지만 기억력도 목소리도 정정하다. 그렇지 않겠는가, 100년을 맑은 하늘 보고 살았으니. 박종인기자 seno@chosun.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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