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 세월의 깊이와 무게
風景 그리고 사람 2009/07/23 23:09 너도바람
스물몇해만의 동행2. 나무에게 말 걸기
순흥면사무소 뒤 봉양각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께서 <저 세분 사진 좀 찍어주겠니껴. 구십 넘은 상노인인데 저리 곱고 정정하다는거 아니껴. 나는 일흔둘, 저 어른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 아닌껴>라고 하셨다. 내 눈엔 칠십 어르신이나 구십 어르신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하긴 오뉴월 하루볕에도 위계질서가 엄연한 양반 고을에서 스무살이라니... 경북 내륙 순흥, 예천 지방에서 만난 나무들이 꼭 순흥 어르신들 같았다. 그저 장하다 싶으면 기본이 오백년, 조금 우거졌다 싶으면 육백년이 훌쩍이다.
아직 반세기의 삶도 채우지 못한 몽매한 내가 오백년 혹은 육백년 동안 한 자리에서 세월을 켜켜이 쌓은 나무들의 무게와 깊이를 어찌 알랴. 나무를 찾아 떠난 길이었다고 해도 될 행복했던 나무와의 만남을 사진 속의 나무들을 꺼내어 다시 되뇌인다. 고맙고 또 고맙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긴 세월을 건너 내게로 와줘서.
전생이나 내생, 혹은 윤회가 존재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방글라데시에 홍수가 나고, 고비 사막에는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도 지구 전체의 물의 양은 변함이 없는 것처럼 현생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이 물질이 전생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고, 내가 사라진 뒤 다른 형태로 존재할른지도 모르겠다.
혹 내생이 존재한다면, 난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안티에게 말했다. 별이 쏟아지는 밤, 부석사 범종루 나무 아래서였다. 우리집 마당 귀퉁이의 회화나무여도 좋고, 망명당 앞 솔바람 소리를 내는 소나무였으면 더 좋겠다. 삼천육백억년 후에 별이 되어 만날 존재하지도 않을 인연 같은 것은 훌훌 털어 버리고 나무가 됐으면 좋겠다.



1. 정선 고학규 고택 앞 육백년 뽕나무
지난 5월 초 만난 정선읍내 육백살 뽕나무는 검은 나무 가지 끝에서 막 푸른 뽕잎을 토해내고 있었다. 육백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뽕잎을 무성히 틔운 푸른 뽕나무를 만날 꿈을 꾸며 여름을 기다렸다. 그리고 폭우 쏟아지는 여름 푸른 뽕나무를 만나러 갔다. 푸른 잎으로 뽕나무는 간간이 흩날리는 빗방울을 온 몸으로 막아 주었다.
뽕나무 아래 앉아 지난봄 폐업한것이 분명하다고 착각했던 정선목욕탕 카운터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 유리창에 어른거렸다. 가만히 뽕나무 줄기를 감싸 안았다. 며칠간의 폭우로 나무 줄기가 촉촉했다. 약속대로 다시 왔어, 무성한 푸른 뽕잎으로 맞아줘서 고마워. 가만히 가지가 흔들렸다. 나무와 나의 언어가 달랐음에도 우리는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뽕나무: http://blog.ohmynews.com/nedobaram/159006


2. 정선 아라리촌 은사시나무
자작나무 말고는 나무 껍질이 하얀 나무를 몰랐었다. 숲 속의 모든 이파리를 먹는것과 못 먹는것으로 구분하여 알려주는 숲속의 사부에게 무슨 나무냐고 질문하고는 이내 알았다. 아주 오래전 어느 학교 안에서 만난적있는 바람결에 반짝거리는 은사시나무임을.
바람결에 반짝이며 살랑거리는 은사시나뭇잎처럼 스무살의 내 안에 반짝이지만 흔들렸던 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심어져 있음을... 삭정이가 이탈된 옹이도 아름다운 무늬가 되게 한 것은 세월. 세월이 간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근사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은사시나무가 어느새 바람결에 이파리를 반짝거리며 저렇게 커 있는걸 보니...


3. 정암사 적멸보궁 주목
이미 죽어 껍질만 남은 나무 안에서 다시 나무가 자라고 있다. 죽어 천년 살아 천년이란 주목의 신화가 신화가 아닌 사실임을 정암사 적멸보궁 입구 주목 나무가 증명하고 있다. 껍질이 붉어 朱木으로 불리는데,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태백산 정암사에 봉안하고 나서 꽂은 스님의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자장율사의 그 지극함이 지팡이를 천년의 주목으로 키워냈으리라. 그 나무는 다시 껍질 안에서 새 나무를 키워내고... 나는 한번이라도 그러한 지극함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그 언저리에라도 미친 적이 있었던가. 신화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 천년의 신화, 주목을 만난 것은 길 떠난 이의 행운이리라. 그것도 부처의 진신사리를 지키는 적멸보궁을 지키는 살아 천년, 죽어서도 다시 천년을 사는 주목임에야.


4. 영월 장릉 버드나무
어린 왕의 슬픈 죽음을 애도하는 장릉의 나무들은 모두 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도 왕이었던 어린 소년의 넋을 위해 잠깐 나무처럼 고개를 숙인다. 내일은 순흥 금성단의 신단수를 만나 장릉 버드나무의 안부를 전해야겠다.




5. 사자산 법흥사 적송
겨울 법흥사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에 쌓인 눈의 무게를 이용해 스스로 가지를 쳐내어 옆나무와 햇빛을 고루 나누어 소나무 숲을 이룬다. 이미 숲을 벗어난 키 큰 소나무들은 공중에서 서로를 향한 가지를 쳐내어 허공에서 가지가 엉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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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법흥사 비로전 옆 밤나무
에게 사백살. 백단위로 넘어가는 나무들을 만난지라 사자산을 향해 날아갈듯한 비로전 처마 밑 밤나무를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밤나무란다. 천년을 견뎌온 돌과 사백년동안 부도와 비석을 지켜온 밤나무. 기운이 쇠했는지 나무에는 밤송이가 보이지 않았다. 유월 하얀 밤꽃을 피워 비릿한 밤꽃향으로 법흥사를 덮었었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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