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9.09 13:31 / 수정 : 2009.09.10 06:45
- ▲ 30년 동안 수집한 잡동사니로 꾸민 박물관, 그리고 최봉권
쉰 네 살 먹은 성공한 사업가 최봉권은 지난 30년 동안 대략 이런 물건들을 모았다.
진로소줏병, 놋요강, 이발소 그림, 엿장수 가위, 고동색 유약이 드문드문 칠해진 1970년대 다방 엽차잔, 경찰서 유치장 철창문, 일제시대 소방마차, 다리 네 개 달린 흑백 텔레비전, 기름 짜는 틀, 석유 판매점 깔대기, 시골집 벽에 걸렸던 가족사진 액자 기타 등등.
그 30년 세월 동안 가족 중에 아픈 사람 생기면 ‘귀신 붙은 물건들 땜에 그리 되었다’고 억지 굿을 해야 했다. 지붕 뜯으러 시골 집 지붕에 올라갔다 떨어지기도 여러번. 그래서 낙법도 정식으로 배웠다. 굿에 낙법까지 익힌 천하무적 수집광 최봉권 이야기.
- ▲ 엿장수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인마을에 공사가 한창인 텅 빈 건물이 있다. 건물 앞에는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다. “잊으셨나요? 무명치마, 흰 저고리 입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내년 3월에 문을 열 박물관, ‘한국근대사박물관’이다. 최봉권은 이 박물관 관장이다. 박물관이 헤이리로 오기까지, 참 지긋지긋한 경로를 거쳤다.
원래 박물관은 파주 교하에 있었다. 군부대가 옆에 있고, 주변에 맛집 많은 썩 괜찮은 곳이었다. 2004년 공사가 한창일 때 박물관 부지가 수용됐다. 어쩌겠는가. 그냥 공사를 진행해 2005년 초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딱 1년 운영하다가 그해 12월 31일 문을 닫았다. 지금은 상전벽해. 울창한 숲은 사라지고 아파트 정글이 들어서 있다. 그리하여 4년 세월이 흘러 이제 헤이리에 박물관이 재개관하게 됐는데, 이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한다.
물건이 쫓겨나거나 남편이 쫓겨나거나
젊은 날 최봉권은 어떤 기업 영업사원이었다. 지방 출장이 잦았다. 출장 업무가 끝나면 차를 몰고 무작정 오지로 들어가곤 했다. 고등학교 때 맛본 수집의 기쁨을 오지에서 채웠다. 그리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특별한 종이를 만드는 특수제지 회사다. 돈은 잘 벌렸고, 물건 놔둘 창고도 생겼겠다. 이제 제대로 고물(古物) 수집 시작이다.
사업 한다고 지방 출장 잦은 남편 뒷바라지하던 아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파트 구석구석이 온통 귀신 나올 듯한 잡동사니 천지가 아닌가. 썩고 냄새나는 오만 잡동사니들. 물건이 쫓겨나거나 남편이 쫓겨나거나 둘 중 한 사건이 수시로 터졌다.
간첩 웃기고 있네
최씨 고집, 못 말린다. 아예 1톤 트럭을 사서 회사 직원과 함께 전국을 누볐다. 서울에서 요강 사러 왔다며 진을 치고 앉아 있는 청년에게 한 노인이 말했다. "멀쩡한 젊은인데, 이런 거 줍고 다니지 말고 다른 일 해서 돈 벌어."
폐가로 변한 국밥집 옆을 지나가던 이 멀쩡한 젊은이가 땅바닥에 쭈그려 앉았을 때도 그랬다. “진로 소주병 있잖아요? 50년대 소주병 주둥이가 흙 위로 뾰족하게 보이는 거예요. 막 팠지요, 뭐. 병 모양이 시대마다 달라요. 그런 거 발견하면 그건, 야, 고려청자 발굴하는 거랑 똑같애." 소주병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는 젊은이를 보고 지나가던 마을 주민들이 귓속말로 수근댔다. "간첩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오만 쓰레기로 뒤덮인 트럭을 수색하다가 저절로 혼잣말을 하곤 했다. “간첩 웃기고 자빠졌네. 미친놈이다."
- ▲ 기억하시는지. 시골집 안방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액자.
지붕에서 떨어지고 낙법 배우다
잦은 객지 생활에 체력이 달렸다. 그래서 헬스클럽을 다녔다. 우물에 빠지고 지붕에서 떨어져 죽을 뻔했다. 그래서 낙법을 배웠다. 수십 년 된 먼지구덩이 속에서 발굴을 하면 그 먼지가 몸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래서 트럭에 막걸리와 소주를 가지고 다니며 목에 낀 먼지를 훑어내곤 했다.
그런 고생 끝에 물건을 가져오면 가족들은 귀신 붙었다고 굿을 하곤 했다. 최봉권 본인도 가끔 무섭다. 하지만 그 오만 잡귀신들과 30년 같이 논 끝에 “내가 귀신이 됐다”고 했다. “최봉권이 힘이 쎄니까, 다른 귀신들 다 이깁니다요.” 친구들은 "저놈, 아직도 미친 짓 하고 있네"하고 놀렸다. 가족들은 포기했다.
이거 다 사라지면 어떡해?
도대체 왜? 처음에는 재미, 오로지 재미였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 한분이 백제 역사에 해박하셨어요. 그 분 따라서 기왓장도 주워 보고, 절도 많이 다녔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지?"
"귀한 거는 사람들이 모으지 않는가. 그런데 흔해빠진 물건은 흔해서 금방 없어져 버려." 그 흔한 소주병, 그 흔한 요강단지, 그 흔한 버스 안내판, 그 흔한 이발소 그림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1980년대 건전가요 가사처럼, 대한민국은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으로 발전했다. 먹고 살 만하니까, 구질구질하니까, 돈 푼 안 드니까, 그래서 다 버리고 살아왔다.
- ▲ 복덕방 간판.
박물관 세웠다가 1년 만에 문 닫다
미친놈에 간첩에 귀신 취급 받으며 30년 모은 생활용품이 자그마치 7만점이다. 종이 보관하려고 만든 회사 창고는 그 귀신 붙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창고가 흘러넘쳐 회사 마당에 비닐을 깔고 거기에 물건을 부려놓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그 가운데 4만점을 골라 파주 교하 땅에 박물관을 지었다. 한국근대사박물관이다. 1999년 허허벌판이던 곳에 사둔 땅이었다.
몇 년 씩 컨테이너에서 먹고 자면서 사업도 팽개치고 일했다. 하도 돈이 많이 들어 집에서는 “안 들어와도 좋으니 생활비만이라도 달라”고 했다. 친구들은 "미친 짓 하더니 결국 원을 풀었구나"하고 축하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교하 신도시 건설용 부지로 수용된 것이다.
- ▲ 군대 내무반. '하면 된다!'
2010년 3월 헤이리에 박물관 재개관
물건들은 모조리 회사 창고로 들어갔다. 몇 달이 지나고 최봉권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또 다른 음모를 꾸몄다. 이듬해, 보상받은 돈으로 헤이리에 땅을 샀다. 목표는 재개관. 도면을 그리고, 건물이 뼈대를 잡으면서 소장품을 헤이리 건물 창고로 옮겼다. 그리고 3년 세월이 흘렀다. 박물관 이전이라는 간단한 일이 연수원으로, 체험관으로 풍선처럼 커졌다. 그러다 보니 올 초로 예정됐던 재개관이 내년으로 미뤄졌다.
- ▲ 지금은 흔적만 남은 박물관 홈페이지.
홈페이지(www.kmhm.or.kr)는 그대로 남겨뒀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왼쪽 머리에 뜬금없이 1950년대 공군 마크가 보인다. 6·25 전쟁 당시에 한국 공군이 전투기에 그려 넣었던 문양이다. “우리 기술은 아니지만, 우리의 태극 마크를 달고 하늘을 날던 기상이다. 우리가 옛것을 토대로 이 태극처럼 높이 솟았으면 해서 그리 달았다.”
“문 닫은 뒤에도 내 취미가 워낙에 이쪽이니까 저절로 또 트럭 몰고 가게 되더라. 선진국? 좋지. 하지만 선진국으로 가려면 우리 옛것들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선진국으로 가는 필수코스라고 생각한다.”
폐가가 된 홈페이지에는 이런 공지사항이 올라 있다. “박물관 부지 수용관계로 2005년 12월부터 휴관에 들어갑니다. 2008년부터 새로 오픈예정이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신에 미친놈에 간첩 취급받다가 한 3년 사업가로 복귀했던 사내, 또 다시 귀신에 미친놈에 간첩 취급 받을 준비 완료다.
- ▲ 천하무적 수집광 최봉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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